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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저씨 엎드려, 나 말 탈래

군수과 김 일병은 거의 날마다 군수과장 오 대위 집으로 작전(?)을 나갔다. 군수과장 오 대위가 김 일병을 ‘따까리’로 만들어서 자기 집에다 사역을 시킨 것이다. 오 대위 마누라는 방안에 누운 채 김 일병에게 물 긷기와 청소, 연탄 갈기, 밥 짓기, 설거지, 빨래까지 시킨다고 했다. 고참들이 김 일병의 이야기를 듣고 한 마디씩 했다. “야 이 씨팔, 아무리 군대라지만 엿 같다. 그래, 그 여편네 그냥 X으로 거기를 콱 찔러버려....” 가을 김장철이 되자 대대의 모든 장교부인들이 동원되어 벽제 여단본부장 댁에 김장사역을 나갔다. 때로는 우리도 차출되어 같이 갔다. 6655부대라는 공병여단본부의 군부대 같지 않아 보이게 함석판을 붙여서 만든 커다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원 스타 여단장 사택이 있었..

3. 군대생할 2022.04.25

20. 자대, 102 야전공병대대

가평 군단 신병훈련소에서 4주간의 ‘빡센’ 군기교육을 받은 다음 우리는 다시 자대로 돌아왔다. 자대인 102 야전공병대대는 의정부 북쪽 주내(샘내)의 도로변에 있었고 정문에 ‘제2908 부대’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부대 울타리는 간이비행장에 까는 구멍 뚫린 철판(이걸 무슨 플레이트인가 뭐라고 영어로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을 세워 이어 붙여서 둘러쳐 놓았고 그 위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넓은 부대 안 여기저기에 막사들이 기다란 드럼통 반쪽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부대에 복귀한 우리는 모두 열 명쯤 되었는데 대대 본부중대 인사계 사무실 앞에서 부대복귀 신고식을 했다. 하사관들과 선임병들이 우리를 차렷 자세로 세워놓고 두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치고 발차기를 했다. “옛,..

3. 군대생할 2022.04.25

19. 김해공병학교, 자대배치, 그리고 가평신병교육대

1973년 3월말쯤 우리는 6주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김해공병학교로 가게 되었다. 다시 5주간 후반기 야전공병 주특기 신병훈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새벽 2시쯤엔가 우리는 군용트럭에 태워져 안동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플랫폼으로 줄지어 걸어 들어갔다. 대구를 오가느라 내가 수도 없이 다니던 그 안동역 플랫폼. 그런데 그 어두운 새벽에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동생, 형,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사람들 틈에 어머니도 나와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내게 무언가를 던져 주셨다.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를 돌돌 묶은 돈 천오백 원이었다. “야야, 몸조심 하그래이, 집 걱정은 말고....“ 인솔하는 기간병들의 욕설이 날아들었다. “이 새끼들..

3. 군대생할 2022.04.23

18. 36사단 신병훈련소

군대....... 대한민국 남자들 이야기에 군대 빼면 뭐가 남을까? 1973년 2월, 부산화력을 떠나 고향 안동 36사단 신병훈련소에 입대하던 날 아침, 나는 옥야동 경안고등학교 앞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밀어요?” 이발사는 두 번이나 되물었다. “예, 밀어 주세요. 오늘 입대합니다.” 나의 무성한 머리가 바리캉으로 무참하게 잘려져 뚝뚝 떨어졌다. 내 머리를 밀던 이발사가 짓궂게도 좌측 절반만 밀어놓았다. 순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반은 나인데 반은 낯선 사내가 되어 있었다. 야누스 같았다. 오후 2시, 나는 안동 36사단 위병소에 도착하였다. 위병소에 위병을 서고 있던 군인은 하필 고등학교 동창생 익선이었다. “야, 익선아, 넌 좋겠다, 벌써 상병 달고 있구나.” 그 녀석은 나를 보더..

3. 군대생할 2022.04.23

17. 군입대

나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동아리 모임에 참가한 적도 없다. 학생데모도 여러 번 일어났지만 나는 그런 일에 나서거나 끼어들 입장도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면 발전소로 달려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놀기 좋아하고 게으른 나의 천성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퇴근하여 시간이 나면 잠을 자기도 하였지만 공부를 하다가도 합숙소 오락실에 나가서 당구도 치고 옆방 친구와 바둑, 장기도 두고 가끔은 화투판이나 포커판에 끼어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 재철이, 진동이, 해룡이, 종옥이랑 어울려 탁구장, 당구장도 다니고, 광안리 해수욕장, 해운대 해수욕장, 하단 에덴공원 찻집, 해운대, 태종대로 돌아다니고, 범어사, 밀양, 거제도 해금강에도 가보고, 여름방학 때는 학군..

3. 군대생할 2022.04.23

16. 발전소근무와 대학공부

그렇게 나는 한국전력 직원이면서 동아대학교 학생이 되었다. 그 때 부산화력에는 나 말고도 그렇게 학생이 되어 근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직원들이 30여명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대학에 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다. 공부하겠다는 기특한(?) 젊은이의 앞을 가로막기도 어려웠을 게다.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우리는 주로 낮근무(Day Shift)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그 사람의 야간근무(Night Shift, 또는 After Shift)를 대신 해주었다. 대근을 부탁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밤근무 보다 낮근무 하는 게 낫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별 말없이 못 이기는 체 선심 쓰듯 근무를 바꾸어 주었다. 발전소에서 밤 11시부터 아침 8시까지 근무를 하..

2. 주독야근 2022.04.18

15. 동아대학에 들어가다

감천 동네에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서대신동에 있는 한 대학입시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부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고를 다니면서 고등학교 교과과정도 제대로 못 밟은 데다 석탄미분기 운전을 하고 보일러 버너 작업을 하면서 2년 가까이 지나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려니 모든 게 어설프고 설게 느껴졌다. 대학입시가 몇 달 남지도 않아 마음만 급했지 강사가 열심히 떠들어대는 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예습이나 복습도 도무지 되지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기술전공부라는 특수반에서 배운 게 줄질, 대패질, 땜질, 제도 그리고 기계공작, 기계재료, 재료역학, 유체역학, 원동기 같은 전공과목이 거의 전부였던 내게는 영어, 수학, 국어과목이 새삼 멀게 느껴졌고 공고에서는 구경도 못 ..

2. 주독야근 2022.04.18

14. 부산화력 보일러 운전원

서울에 올라간 나는 본사에서 근무하는 일가분을 찾아가 나를 부산화력으로 전근시켜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분은 높은 자리에 계시진 않았는데 대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나의 소원을 듣고는 인사부서 쪽으로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1970년 6월말, 나는 부산화력으로 전근발령을 받았다. 영월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나는 함께 근무하던 C계 계장님과 또 정든 직원들과 작별하고 또 하숙집 김씨네와 나의 사투리를 놀려대던 꼬마 녀석, 함께 하숙하던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그 짧은 기간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과 영월 처자와의 달콤했던 데이트의 추억, 그리고 잊지 못 할 석탄미분기를 뒤로 하고 영월을 떠났다. 부산역에 내린 나는 버스를 타고 남포동을 지나서 버스를 또 갈아타고 송도 뒤편 높은 고개를 넘..

2. 주독야근 2022.04.18

13. 영월 처녀

일은 힘들고 험했지만 봉급은 많다는 게 위로였다. 2,500원의 벽지수당을 합쳐 약 2만 4~5천원 쯤 되었으니 만 18세 사회초년병의 봉급으로는 참 많은 셈이었다. 나는 봉급을 받을 때마다 하숙비 5,000원과 용돈 얼마씩을 떼어놓고 매달 1만 5천원의 거금(?)을 고향으로 부쳤다. 석 달마다 한 번씩 나오는 1만 5천 원가량의 보너스는 손도 안 대고 통째로 송금하였다. 우체국에 가서 송금할 때면 일하는 아가씨 앞에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영월에 있던 10개월 남짓 동안 내가 고향으로 보낸 돈은 17만원이 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부치는 이 돈으로 소 두 마리인가를 사서 시골의 아는 사람에게 맡기셨다. 소는 농사도 지으면서 잘 키우면 새끼도 낳아 늘어나니까... 아버지도 참, 지금생각해도 이재(理財..

2. 주독야근 2022.03.25

12. 영월화력발전소

영월읍내에서 발전소까지는 10여리 되었는데 출퇴근 시간에 어두운 초록색깔의 통근차가 다녔고 우린 우체국 건너편에 모여서 통근차를 기다렸다. 구화력은 1931년엔가 왜정 때 지은 참으로 오래 된 구닥다리 발전소였고 신화력은 차관을 도입하여 1965년에 건설한,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형에 속하는 발전소였다. 구화력은 8개의 보일러에 4대의 터빈발전기를 연결하여 모두 10만 kw였고 신화력은 5만 kw짜리 2기였으므로 영월화력은 도합 20만 kw의 발전소였다. 당시 전국의 수력, 화력, 내연력 발전소를 몽땅 합쳐 163만 7천 kw였으니 20만 kw이면 약 8분의 1을 차지하는 대형사업소였던 셈이다. 인원은 600명 가까이 되어 본사 보다 인원이 많은 전국에서 가장 큰 사업소였다. 구화력의 보일러는 정말 고물이..

2. 주독야근 2022.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