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17. 군입대

Thomas Lee 2022. 4. 23. 02:53

나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동아리 모임에 참가한 적도 없다. 학생데모도 여러 번 일어났지만 나는 그런 일에 나서거나 끼어들 입장도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면 발전소로 달려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놀기 좋아하고 게으른 나의 천성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퇴근하여 시간이 나면 잠을 자기도 하였지만 공부를 하다가도 합숙소 오락실에 나가서 당구도 치고 옆방 친구와 바둑, 장기도 두고 가끔은 화투판이나 포커판에 끼어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 재철이, 진동이, 해룡이, 종옥이랑 어울려 탁구장, 당구장도 다니고, 광안리 해수욕장, 해운대 해수욕장, 하단 에덴공원 찻집, 해운대, 태종대로 돌아다니고, 범어사, 밀양, 거제도 해금강에도 가보고, 여름방학 때는 학군훈련체험 프로그램으로 한 주일 동안 해군함정 92함이던가 하는 고속수송함을 타고 진해에서 인천 앞바다까지 해군 함포 사격 구경도 하면서 갔다가 돌아오기도 해 보았으니 나름대로 대학생활을 즐겨보려는 노력도 꽤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했으니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등록금만 헛되이 갖다 바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도 학업 보다는 대졸간판만 딴 셈이 되었다.

 

당시 남포동 광복동 거리에는 다방도 많았고 당구장도 많았다. 18번 완당집도 있었고 아이스케키 집도 있었다. 수 다방, 오아시스, 백조, 돌체 같은 이름의 음악다방들에는 언제나 커피와 팝송을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커피 한잔 값은 50원인가 그랬다. 당구장은 10분에 20원인가를 받았던 것 같고 충무동에는 200원인가 300원을 주면 닭 한 마리를 삶아주는 집도 있었다. 자동차 운전게임, 망치로 두더지 잡는 게임, 토끼 세 마리가 나오면 돈을 따는 슬롯머신장도 생겼다. 그리고 OB500 생맥주집도 많이 생겼다. 생맥주 500 cc 한 컵이 150원이었고 땅콩 안주 한 접시가 50원이었다. 두 사람이 맥주 두 잔에 땅콩안주 한 접시로 즐기고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놓고 나오면 팁까지 해결됐다.

 

그러나 아무리 놀고 공부를 대충 한다 해도 발전소에서 교대근무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수시로 치르는 시험과 학점을 따는 일, 특히 기말시험을 치를 때는 마치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기말시험 때는 거의 한 주일 동안 밤새워 공부를 하고 잠을 거의 못 잤다.

 

나의 몸은 항상 긴장상태였고 체중은 58 킬로그램 정도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 발전소에서 근무를 할 때 잠이 쏟아진다고 함부로 잠을 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발전소를 운전하는 근무요원이 근무중에 잠을 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졸다가 수시로 순찰을 다니시는 계장님이나 주임님에게 걸리면 혼이 나고 어떤 때는 시말서도 써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잠이 쏟아져서 졸더라도 의자에 앉아 기댄 채 신경을 바짝 세우고 주변에서 돌아가는 모든 기계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졸아야 했다. 발전소 안에서 시끄럽게 돌아가는 온갖 기계음 속에서 조금만 이상한 다른 소리가 나도, 페이지 폰이 울리기만 해도, 누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거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전혀 졸지 않았던 사람처럼 즉각 반응해야 했다. 퇴근해서 합숙소 내 방에서 잠을 잘 때도 나는 습관적으로 주변의 모든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누가 문 밖에서 조그맣게 내 이름만 불러도 나는 눈을 번쩍 떴고,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아도 아무도 나 모르게 방문을 열고 들어올 수 없었다.

 

잠들고 깨는 것도 자동으로 되어졌다. 학교에 갈 때에도 16번 입석버스를 타고 빈자리가 있으면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3초 내에 잠이 들었고,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정확히 깨어서 내렸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친 적이 한 번도 없다. 잠을 자면서도 차장의 목소리는 다 듣고 있는 것이었다. 또 어디에서 어떤 자세로라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든 작은 널빤지 위에 누워서든, 시멘트 바닥에 라면박스를 깔고 누워서든 5초 내로 금방 잠이 들 수가 있었고, 그러나 잠을 자면서도 사방의 모든 소리와 상황을 다 감지하는 인간 감지기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예민한 잠귀는 군대에 가서 고쳐졌다. 한 시간마다 보초, 불침번 교대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깨우는 조그만 소리에 내가 매번 깼다. 그러다가 나와 상관없는 소리는 무시하고 잠자는 데 조금씩 익숙해져 갔고 결국 보통사람의 수준으로 둔해져서 군대에서 제대하였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 당시의 나는 그랬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던 1972년 여름, 2학년 때 문제가 터졌다. 당시 한국전력 사장은 보통 군장성 출신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는데 내가 입사하던 때는 정래혁 사장이었고 다음은 김일환 사장이었고 그 다음 사장이 육군중장 출신인 김상복 사장이었다. 그 김상복 사장님이 어느 날 ‘뭐. 회사를 다니면서 학교를 다닌다고? 모조리 사표를 받아라. 학생들은 학교냐, 회사냐, 양자택일하라.’는 추상같은 엄명을 내린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서울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한 친구가 ROTC까지 했는데 여름방학 때 ROTC 입영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장기휴가를 허락해 달라는 신청을 회사에 했고 회사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ROTC 복장을 한 채 사장님의 집을 찾아가서 허락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회사업무에 전념해야 할 직원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미안할 일인데 ROTC훈련까지 받겠다고 학군복을 입고 사장에게까지 가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장기휴가를 허락해 달라고 했으니 사장님도 기가 막혔을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그 황당한 친구 때문에 사장은 불호령을 내렸고 졸지에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다 자퇴서를 제출하고 자퇴증명서를 떼어다 회사에 내어야 했다. 당시 부산화력에서는 모두 26명인가가 동아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단체로 휴학계를 내고 학교에서 기념촬영까지 했다. (나는 훗날 영광원자력건설현장에 근무할 때 그 ROTC 문제를 일으킨 친구를 만났었다. 그 친구는 내게 자신의 그 황당한 무용담을 늘어놓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동료들의 인생을 뒤바꾸어놓은 엄청난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학교의 학칙상 자퇴하는 경우는 복학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 사정을 설명하고 언젠가 사정이 허락할 때 다시 복학하겠으니 예외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하여 총장님의 허락을 받았다. 나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퇴를 하는 셈이 되었다. 학교에 자퇴원을 내자 곧 신체검사통지가 나왔고, 신체검사를 받자 곧 녹색 입대명령서, 국방부장관의 초청장이 일사천리로 날아왔다. 나는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고향으로 올라갔다. 내가 군입대를 위해 부산을 떠나던 날, 해양대학에 다니던 창동이는 날 전송하러 부산역까지 나왔고 그녀는 개찰구에서 나를 붙잡고 울었다. 1973년 2월이었다. 아, 군대는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고, 우리의 가슴을, 우리의 인생을 찢어놓고 있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