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18. 36사단 신병훈련소

Thomas Lee 2022. 4. 23. 02:55

군대.......

대한민국 남자들 이야기에 군대 빼면 뭐가 남을까?

1973년 2월, 부산화력을 떠나 고향 안동 36사단 신병훈련소에 입대하던 날 아침, 나는 옥야동 경안고등학교 앞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밀어요?”

이발사는 두 번이나 되물었다.

“예, 밀어 주세요. 오늘 입대합니다.”

나의 무성한 머리가 바리캉으로 무참하게 잘려져 뚝뚝 떨어졌다.

내 머리를 밀던 이발사가 짓궂게도 좌측 절반만 밀어놓았다.

순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반은 나인데 반은 낯선 사내가 되어 있었다. 야누스 같았다.

오후 2시, 나는 안동 36사단 위병소에 도착하였다.

위병소에 위병을 서고 있던 군인은 하필 고등학교 동창생 익선이었다.

“야, 익선아, 넌 좋겠다, 벌써 상병 달고 있구나.”

그 녀석은 나를 보더니 멋쩍은 듯 아는 체 마는 체 야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입대한 우리는 줄지어 여러 가지 신체검사를 받고 이리저리 예방주사를 몇 방이나 맞으며 끌려 다녔다. 밤 열한 시가 되어서야 신체검사가 끝나고 우리는 내무반으로 들어갔는데, 내무반 마루침상 위에는 자루 달린 미식기 한 개엔 밥, 다른 한 개엔 온통 뼈와 잔가시 범벅인 시꺼먼 물고기와 시래기인지로 끓인 국이 담겨져 싸느랗게 식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지만 대부분의 장정들, 아니 신병인지 훈병인지가 된 우리들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차가운 그 짬밥을 도저히 먹지 못 하고 그냥 짬빵통에 부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부산화력 합숙소에서 모래알 같은 통일벼 밥을 씹어 삼키던 실력으로 그 밥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이 밥을 못 먹는다면 내가 어떻게 3년 군대생활을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입대 첫날밤을 지난 다음날 아침, 나는 전날 밤 꾸역꾸역 먹었던 것 때문인지 오렌지색 식판에 받은 아침 짬밥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몇 숟갈 뜨는둥마는둥 나는 그 밥을 쏟아버리려고 짬밥통으로 들고 갔다. 우리 보다 먼저 입소해서 훈련 받던 옆 중대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그 밥 버릴라꼬요?"

"예, 도저히 못 먹겠네요."

"그거 일루 주소."

그 훈련병은 내 손에서 식기를 뺐더니 허겁지겁 그 자리에서 밥과 국을 게 눈 감추듯 들이켜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날의 온갖 기억들을 뒤로 하고 푸른, 아니 물이 빠져 누렇게 변색되는 군복과 이가 득실거리는 내의 속에 나를 파묻어야 했던 그 3년의 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아침마다 다그치듯 우리를 두들겨 깨우던 요란한 기상나팔과 밤마다 하늘로 울려 퍼지던 취침나팔, 냄새나는 짬밥, 가운데 통로를 마주 보고 양편으로 나누어진 내무반 마루침상, 동내의 겨드랑이에 실로 꿰매고 DDT를 넣어 매단 이 주머니, 침상마루 3선에 정렬하여 받던 점호, 군복과 내의에 종이를 접어 책을 쌓은 것처럼 만들어 정리해야 했던 관물정돈, 몇 십 년 동안 꼬질대로 쑤셔대어 반짝거리는 M1 소총의 총구멍,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열중쉬어 자세를 하는 원산폭격, 엉덩이를 얼얼하게 만들던 5파운드 곡괭이 자루의 매질, 선착순 집합과 빳다......, 3년의 군대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앗 뚤,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앗 뚤....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앗 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앗 뚤,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앗 뚤.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앗 뚤.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 강산 위에, 앗 뚤.....”

이놈의 군가, 무슨 가사가 이래? 왜 이렇게 내 속을 후비고 울리는 거야?

우리는 군가를 배우고 군가에 발맞추어 제식훈련부터 받았고 총기와 군복, 내의, 통일화라고 불리는 훈련화, 다 떨어진 야전잠바와 유격훈련복을 지급받았다.

36사단 신병훈련소에는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훈련병 막사 중간에 파놓은 깊은 우물에는 바닥에 조금 물이 고여서 두레박으로 퍼 올리면 반 깡통도 안 되는 흙탕물이 올라왔다. 그런 식으로 퍼올리는 물로 수 백 명의 훈련병들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차가운 2월, 겨울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을 기는 훈련병들의 씻지 못 한 얼굴은 터서 산적같이 변해갔고 손등은 두꺼비 등처럼 갈라지고 귀에는 딱지가 앉았다. 고무로 만들어진 통일화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 발이 허옇게 불어터졌다. 씻을 물조차 없으니 옷이나 양말도 빨아 입을 수도 없었다. 우리 훈련병들은 금세 거지꼴로 변해갔다.

 

제식훈련....., 걷는 것부터 다시 배웠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갓”, 좌향 앞으로 갓“, 우향 앞으로 갓”, 제자리에 서.“

“주먹 쥐고 팔을 어깨높이로 흔든다.”

“행군 중에 군가 한다, 군가는 진짜 사나이, 반동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앗, 뚤, 센, 넷....”

학교에서, 또 대학 교련시간에 해보던 거라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교관과 조교들은 훈련병들을 달달 볶아댔다.

“차렷 자세에서 눈깔 돌리지 마라.”

“눈깔 돌리는 소리 보소. 자갈밭에 구루마 굴리는 소리 난다.”

“푸시업 20회 실시!”

"쪼그려 뛰기 10 회 실시!"

걸핏하면 엎드려 뻗쳐 기합이고 쪼그려 뛰기, 오리걸음, 선착순 기합에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취침, 우로 취침, 오리걸음, 원산폭격.... 별별 종류의 기합이 다 있었다. 때로는 주먹과 군홧발이 날아들고 정강이 까기도 가해졌다.

고문관이라고 부르는 얼간이 병사들이 꼭 있었다. 평소에는 잘 걷다가 구령만 붙이면 팔과 다리를 같이 움직이며 걷는 희한한 신병들도 있었다.

나는 다른 훈련은 다 받을 만 했지만 구보만큼은 정말 힘들었다. 나는 하체가 약한 편이다. 머리는 큰 편이다. 어릴 때 내가 다리를 심하게 앓아 걷지를 못 했고 그 때문인지 하체의 발육이 좋지 못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100미터, 1500미터 단거리, 중거리의 뛰어난 달리기선수이셨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 했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는 꼴찌를 도맡아 하던 내가 군대생활 3년 동안 그 숱한 구보를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다.

 

외우는 것도 참 많았다.

“군인의 길“, ”보초일반수칙“

“정지, 움직이면 쏜다.” “누구냐?”, “암구호”.... 이런 건 보초를 서는 요령이고,

“밀 우, 당길 좌”, 이건 M1 소총 가늠자를 좌우로 조정하는 나사를 돌리는 요령이다.

잘 외우지 못 하는 훈련병들에게는 반복훈련과 기합이 가해졌다.

가끔 내무반에서 정신교육도 받았다.

교육시간에 훈련병들은 앉기만 하면 내리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 하고 졸았다. 조교가 막대기로 두들겨도 그 때뿐 훈련병들의 졸음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매일 무거운 M1소총을 들고 땅바닥을 기었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 “철조망 통과”, “은폐”, “엄폐”, “각개전투”....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이 새끼들 동작 보소...”

 

군대에는 무슨 욕이 그리도 많은지, ‘이 새끼들’은 점잖은 욕에 속하였고 육두문자, 생식기의 이름들과 별 괴상하고 희한한 욕설들이 기간병과 조교들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세상의 욕이란 욕은 군대에 다 모여서 조교들 입에 자동소총처럼 장착된 것 같았다.

“야 이 씨발 새끼, 정신을 어따 두고 온 거야?”

"이 X 새끼들, 똑바로 못 해?"

“눈깔 깔아, 이 새끼야, 아니꼬워? 아니꼬우면 할마이 XX로 나오지 이 X새끼야.”

“복창불량! 엎드려 뻗쳐. 하나 하면 정신, 둘 하면 통일, 푸샵 열 개 실시!”

“군대는 복종이다. 명령불복종은 죽음이다. X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고, XX로 침상의 못을 빼라면 뺀다, 알겠냐?”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동원하여 이런 식의 무조건 복종을 가르치는 건 또 얼마나 기막히게 기발한 것인지.

거지같은 몰골을 하고 다 떨어진 유격훈련복과 야전잠바를 걸치고 발에 맞지도 않는 통일화를 신고 M1 소총을 들고 욕설범벅 고함소리 속에서 군가를 부르고, 높은 포복, 낮은 포복을 하던 우리의 모습은 이미 자랑스러운 조국의 아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가 기고 있던 훈련장을 나르던 까마귀가 부러웠고 저 멀리 지나가던 개가 부러웠다.

10분간 휴식시간에 피워 무는 필터 없는 화랑담배가 그나마 우리의 가슴을 잠시 위로해 주었다. “휴식 끝, 선착순 집합....”

우리는 다시 달리고 구르고 기었다.

취침시간이 되면 훈련병 중에 한 사람은 막사 밖에 나가 ‘동초’라는 이름의 보초를 서고 한 사람은 내무반 안에서 불침번을 섰다. 막사 바깥에서 동초 불침번을 서며 쳐다보던 싸늘한 밤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나를 측은한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훈련병 막사 뒤편으로 난 언덕길은 훈련병들이 얼마나 기었던지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 눈물고개라고 불리던 그 언덕을 우리도 몇 번인가 소총을 머리 위로 거꾸로 쳐들고 앉은뱅이 오리걸음으로 넘었다. 그냥 오리걸음만 한 게 아니었다. 오리걸음 하면서 군가를 부르라는데 그 군가는 유행가였다.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 찾아 여기 왔나....."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내려온 전설의 M1소총은 참 무거웠다.

그 무거운 소총을 들고 총검술 훈련을 받았다. 박력 있게....

"찔러, 찔러, 길게 찔러.", "개머리판으로 쳐."...

사격술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가늠자를 가늠쇠와 일치시켜 정조준한다."

"숨을 들이마신 다음 조금 내쉬고, 숨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긴다...."

총이 움직이지 않도록 방아쇠를 가만히 당기는 연습을 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십원짜리 동전을 총구 끝 위에 올려놓고 방아쇠를 당겨서 동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연습도 했다.

 

1,000 인치(25 미터) 영점사격하는 날이 되었다.

표적지를 붙여놓고 세 발을 사격하여 그 세 발이 탄착군을 형성해야 한다고 했다.

'엎드려 쏴' 자세를 잡고 표적지 가운데 검고 작은 동그라미를 향하여 조준한 다음 가만히 방아쇠를 당겼다.

"꽝!"

총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소총의 반동으로 얻어맞은 오른편 얼굴 광대뼈가 얼얼했다. 내가 쏜 총알은 세 발이 가까이에 탄착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합격이었다.

표적지에 탄착군이 형성되지 않거나 표적지를 제대로 맞추지 못 한 훈련병들은 혹독한 기합을 받았다. 기간병들은 불합격 훈련병들을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 낮은 포복으로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도록 하더니 나중엔 배를 하늘로 쳐들게 하고서는 철모로 물을 떠다가 배 위에 들이부었다. 결국 견디다 못 한 훈련병 중 하나가 졸도하고서야 그 혹독한 체벌은 끝이 났다. 졸도한 훈련병은 의무대로 실려갔다. 내가 쏜 총알들이 탄착군을 만들어 주었으니 다행이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250미터 거리의 표적지를 쏘는 사격훈련도 했다.

나는 별 문제없이 그 표적지들을 다 맞추었다.

몇 그룹으로 나누어 사격이 진행되었는데 다른 그룹이 사격을 하는 동안 한 그룹은 표적지 바로 아래 '감적호'라고 부르는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표적지 어디에 총알이 맞았는지를 기다란 장대 끝에 달린 흰 동그라미를 흔들어서 알려주는 거였다.

그 감적호 안에서도 군기 잡는 기합을 받았다.

"이 새끼들, 정신 바짝 차려. 총알 한 방이라도 놓치면 죽을 줄 알아."

조교는 우리에게 원산폭격, 쪼그려 뛰기,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기합을 주더니 감적호 벽에 기대어 늘어서게 한 다음 머리는 벽에 댄 채 양발을 앞으로 내밀라고 했다.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일보 앞으로, 일보 앞으로... 일보 앞으로 안 해? 안 해? 이 새끼들 죽을래?"

조교의 발길이 날라들었다.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발길질을 당하니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야간매복훈련이라는 것도 있었다. 어두운 밤에 산비탈에 올라가 이리저리 기었다.

한참 그러다가 중대장이 집합명령을 내렸다.

어두운 밤에 얼굴도 잘 안 보이는데 계단식으로 만들어놓은 강의교육장에 신병들이 모여 앉았다.

중대장이 말 했다.

“제군들 훈련 받느라 수고 많다. 오늘 훈련은 이만 하고 휴식한다.”

그러더니 그랬다.

“휴식하면서 담배 일발 장전한다, 실시!”

훈련병들이 모두 필터 없는 화랑담배 한 개비씩 입에 물었다.

“모두 담배에 불을 붙인다, 실시!”

훈련병들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탄알 일발 장전!”

훈련병들이 일제히 입에 문 담배를 빨아 당겼다.

백 수십 명의 훈련병들이 입에 문 담뱃불들이 한꺼번에 빨갛게 피었다.

“발사!”

훈련병들의 입에서 일제히 흰 연기가 뿜어져 어두운 하늘로 올라갔다.

그것 참 구경꺼리였다.

 

신병훈련소에서 철조망만 넘으면 거긴 내가 중학교 때 뛰어다니던 동네와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서 산 하나만 넘으면 우리 집이 보이는데.... 저 철조망을 지나면 태화동 상현이네 집이고, 거기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평화동이고, 거기서 철도관사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옥동파출소가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신시장이고 우리 집인데.....”

나는 가끔씩 내가 만일 탈영한다면 어느 길로 가면 가장 빠르고 안전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곤 했다.

 

신병훈련 5주째였던가, 저만치 우리 동네가 바라다 보이는 36사단 신병훈련소 뒷산에 지어진 화생방훈련장에서 그 따갑고 지독한 최루가스훈련을 받으며 눈물, 콧물을 범벅으로 흘리고 돌아온 날 밤이었던가 나는 꿈을 꾸었다.

캄캄한 밤 산등성이를 따라 판초우위를 뒤집어쓴 우리는 행군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행군행렬 속에서 걷고 있었는데 망토 같이 긴 검은 옷을 입으신 아버지가 슬픈 얼굴을 하고 우리가 행군하는 길가에서 나를 바라보며 서 계시는 것이었다.

“아부지...”

나는 나지막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아무 대답도 없이 점점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셨다, 마치 3년 군생활의 터널 같은 어두움의 저 편으로.....

 

우리가 훈련 받던 때 바로 옆 중대에서는 몇 명의 탈영병이 나왔고 내무반에서 목을 매어 죽은 훈련병도 있었다. 훈련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때로는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훈련과 기합의 고통 보다 죽음의 고통이 덜 한 것일까? 3년을 견디지 못 해서 일생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다니...

 

신병훈련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중대장 대위가 우리 신병들 앞에 서서 훈시인지 뭔지를 하다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봐, 자네, 자네는 훈련을 받은 거야 안 받은 거야? 얼굴이 왜 그리 하얘?”

겨울햇볕이긴 하지만 6주일 동안 훈련받은 새까만 훈련병 가운데 유난히 하얀 얼굴을 지키고 있는 나를 중대장이 이상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