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독야근

14. 부산화력 보일러 운전원

Thomas Lee 2022. 4. 18. 13:15

서울에 올라간 나는 본사에서 근무하는 일가분을 찾아가 나를 부산화력으로 전근시켜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분은 높은 자리에 계시진 않았는데 대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나의 소원을 듣고는 인사부서 쪽으로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1970년 6월말, 나는 부산화력으로 전근발령을 받았다. 영월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나는 함께 근무하던 C계 계장님과 또 정든 직원들과 작별하고 또 하숙집 김씨네와 나의 사투리를 놀려대던 꼬마 녀석, 함께 하숙하던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그 짧은 기간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과 영월 처자와의 달콤했던 데이트의 추억, 그리고 잊지 못 할 석탄미분기를 뒤로 하고 영월을 떠났다.

 

부산역에 내린 나는 버스를 타고 남포동을 지나서 버스를 또 갈아타고 송도 뒤편 높은 고개를 넘어 감천으로 찾아갔다. 높은 송도고개를 숨 가쁘게 넘은 버스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조금 내려가자 부산화력발전소가 거대한 굴뚝 4개로 연기를 뿜으며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발전소 앞은 감천만 바다였고 발전소 뒤 산등성이로는 철탑들이 늘어서서 송전선을 둘러메고 산을 넘고 있었다.

 

부산화력은 6만6천 ㎾ 짜리 석탄발전소 1호기와 2호기, 그리고 10만 5천 ㎾ 짜리 석유(중유)발전소 3호기, 4호기, 도합 4기 34만 2천㎾ 용량으로 당시로서는 전국에서 발전용량이 가장 큰 발전소였다. 감천만 바다에서 냉각수를 취수하는 취수장(Intake)이 각 호기별로 하나씩 있고 1호기 쪽 한켠에는 석탄과 중유를 하역하는 선착장, 그리고 석탄을 쌓아놓은 저탄장, 그 뒤로는 제방으로 막아놓고 석탄발전소에서 나오는 재를 보내어 메우는 넓은 재(灰)처리장이 있고 그 뒤로 거대한 6개의 저유탱크, 그리고 발전소 바로 뒤에는 송전선으로 전기를 보내는 변전소가 1,2호기와 3,4호기 별로 따로 하나씩 있었다. 발전소 뒷담벼락 너머로는 감천을 지나 괴정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있었고 산비탈 송전탑 아래에는 왜정 때 사용했다는 일본군대의 막사들이 허물어진 채로 남아있었다. 발전소 남쪽으로 바닷가에는 횟집들도 있었고, 또 발전소 동쪽으로 아미동으로 넘어가는 산골짜기에는 빼곡하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독신자 숙소는 괴정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 미쳐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독신자 숙소에 내가 들어갈 빈자리가 없었으므로 나는 여기서도 하숙집을 찾아야 했다. 이리저리 찾다가 서대신동의 골목 안에서 대문에 조그맣게 ‘하숙집’이라고 쓴 집을 찾았다. 연세가 좀 많으신 부부이셨는데 바깥어른이 전의이가라고 했다. 일가라는 바람에 반가워서 일단 그 집에 짐을 풀었다. 좀 있다가 아주머니가 밥상을 차려 오셨다. 그런데 밥도 밥이지만 반찬이 얼마나 박하고 짜고 매운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도로 가방을 싸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또 얼마간의 돈을 드리고 못내 서운해 하는 두 분의 눈빛을 뒤로 한 채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찾은 집이 감천 발전소 바로 옆 바닷가 동네 방앗간집이었다. 그 집에는 병곤이와 강호가 하숙을 하고 있었다. 주인집에는 나이 지긋하신 부부와 함께 우리 보다 한두 살 아래인 여고생 하나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가끔씩 주문을 받아 방앗간 기계를 돌리곤 하셨다. 위로 큰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나가 살아서 만나본 적은 없다.

아주머니 음식솜씨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구석진 하숙생 방에는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슬었다. 방바닥이 온통 젖은데다 곰팡이가 슬어 방바닥에 요를 깔고는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나는 국제시장에 가서 야전침대를 하나 사와서 그 위에서 잤다. 야전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지고 엉덩이 부분이 걸리적거려 잠자기가 몹시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감천 합숙소에 들어갈 때까지 그 집에서, 그 방에서 강호랑 함께 지냈다.

 

그 시절 아직 감천 앞바다는 맑았고 해녀들이 멍게, 해삼, 소라, 전복을 따내고 있었고 횟집이 몇 개 있었다. 나는 어느 날 횟집에서 200원을 주고 아나고 반 관을 사서 썰어서 얼음과 함께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서 들고 안동까지 열차편으로 올라가 아버지에게 드린 적이 있다. 도착할 때 얼음은 다 녹아버리고 물만 비닐봉지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부산에서 여덟 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올라온 아나고(바다장어)를 잡수시며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아나고 반 관에 200원...., 지금 돌이켜보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어쨌든,

 

나는 함께 전입해온 다른 몇 명의 전입직원들과 함께 2주간인가 발전소 적응교육을 받았다. 이상우라고 이름이 기억나는 교육계장님은 나를 보고 ‘야, 6.25때 태어난 아이가 벌써 한전에 들어오다니 세월 참 빠르다.’ 하시면서 웃으셨다. 교육을 마치고 나는 3,4호기에 배치 받아 보일러 보조운전원(ABO2)로 운전교대근무를 시작하였다. 부산화력은 영월화력에 비할 수 없이 깨끗하였고 영월화력 석탄미분기 운전에 비하면 일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로는 신형이라는 벤손형 관류 보일러(Benson Type One Through Boiler)였던 3, 4호기는 중유(Bunker-C Oil)를 연료로 사용하며 노내압력이 외기보다 높아서 항상 연소개스가 보일러 밖으로 새어나왔고 새어나온 연소개스는 보일러실과 발전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그 보일러 연소개스, 아니 아황산개스를 들이키면서 근무해야 했다.

 

석탄도 그렇지만 중유(벙커씨유 Bunker-C Oil))에는 황(Sulfur) 성분이 들어있다. 지금이야 정유공장이 탈황설비를 갖추고 황을 제거하지만 그 당시는 그런 처리를 하지도 않았고 황의 유해성이나 공해, 건강보건에 대한 인식도 없을 때였다. 황(S)이 보일러에서 연소되면 SO 혹은 SO2 아황산가스가 된다. 아황산가스가 공기중의 수분(H2O)과 합쳐지면 그대로 H2SO4, 황산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굴뚝으로 나가기 전에 배치된 공기예열기를 부식시키고 굴뚝도 부식시킨다.

사람이 아황산가스를 마시면 코와 기관지, 폐 속에서 황산이 생겨난다. 우린 항상 코로 황산을 마시는 셈이었다. 비를 맞으면 작업복에 구멍이 뽕뽕 나버렸다. 옷에 배어있던 아황산가스가 빗방울과 만나 황산을 만들고 빗방울 맞은 자리에 구멍이 나버리는 것이다.

 

내가 처음 받은 보직은 보일러 보조운전원(ABO2)이었다. ABO2가 하는 일은 벙커씨유 저유탱크와 연료유펌프를 점검하고 발전소에 연료가 이상 없이 공급되도록 하는 일이었다. 연료유 이송펌프의 운전상태를 점검하고 벙커씨(Bunker-C)유는 온도가 내려가면 굳어져서 배관에서 흐르지 않기 때문에 특히 겨울철에는 배관을 덥혀주는 가열증기 라인이 제대로 작동하고 벙커씨유의 온도가 적절히 유지되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발전소 운전 중에 저유탱크가 비어서 연료공급이 중단되지 않도록 항상 저유탱크의 레벨게이지를 점검하고 혹시 레벨게이지가 움직이지 않아 저유탱크가 다 비었는데도 아직 기름이 많은 걸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씩은 레벨게이지 줄을 잡아당기거나 흔들어보기도 해야 했다.

 

부두에 작은 유조선이 도착하고 연료유가 하역될 때는 하역되기 전 저유탱크의 연료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하역이 완료된 다음 저유탱크에 들어간 연료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연료계 직원과 함께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의 하나였다. 한 겨울 찬바람 몰아치는 밤 높은 저유탱크 꼭대기에서 맨홀 뚜껑을 열고 철사 줄에 연결된 조그만 기름통과 온도계, 줄자를 가지고 연료가 얼마나 들어있는지, 연료온도가 몇 도인지 연료계 직원과 함께 확인했다. 연료저장탱크 꼭대기에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면 저장조 안에서 끌어올린 온도계의 수은주는 눈앞에서 금방 뚝뚝 떨어져 내렸다.

“41도로군요.”

“어디 보자, 39도, 아니 38도인데요?”

사무직인 연료계 직원은 될 수 있으면 온도를 낮게 적으려는 것 같았다. 온도를 낮게 잡으면 같은 부피의 연료라도 양이 많게 계산된다. 온도 1도 차이로 연료 한 드럼 반인가 차이가 난다고 했다. 한 드럼 반이면 150 리터, 그 당시의 기름값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예를 들어 1리터에 300원씩 잡으면 4만 5천원, 많게는 십만 원, 이십만 원까지도 온도기록 하나만으로 지불대금에 차이가 난다. 우리 월급이 2만 몇 천원이었을 때니 적은 돈이 아니다. (아, 영월화력에서 받던 벽지수당 2,500원이 없어지는 바람에 부산화력에서의 내 봉급은 2,500원 줄었다.) 이 연료계가 발전소 꿀보직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중의 일이지만 마산화력에서 그런 식으로 연료의 양을 속여 해먹다가 들통이 나서 연료계 직원과 기름운송선박회사 직원이 쇠고랑을 찼다는 소문이 들렸다. 부산화력은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았다.

 

3,4호기 보일러실은 16미터 높이에 있었다. 호기별로 보일러실에는 BO, ABO1, ABO2,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근무했다. 양쪽 3,4호기 합쳐서 여섯 사람인 셈이다. 양쪽 호기가 연결이 되어 있어서 여섯 사람은 오가며 서로 일을 돕기도 했다. 보일러에는 버너 8 개가 비스듬히 아래 방향으로 꽂혀져 있었다. 버너는 보일러 안으로 벙커씨유와 고압증기를 뿜어 넣는데 그 분무상태가 좋아야 보일러 안의 연소상태가 좋게 된다. 버너를 하루나 이틀 정도 사용하면 버너 팁의 구멍들이 달라붙은 연소부착물로 막혀서 흐름이 나빠지고 보일러 연소상태도 나빠진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은 중앙제어실(배전반)의 운전원의 지시가 있을 경우 버너를 교체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통상 한 shift에 버너 두 개씩 정도 교체하는데 배전반 운전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보일러 연소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몇 개라도 교체해야 했다.

 

버너는 길이가 3~4미터, 굵기가 팔뚝 정도, 무게는 꽤 무거워 50 킬로그램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이 버너를 보일러에 집어넣거나 뽑아내는 작업을 하기 위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작업대 통로가 설치되어 있고 천장에는 도르래가 매달려 있고 거기에 쇠고리가 달린 밧줄이 걸려 있었다. 버너를 교체할 때는 BO가 우선 보일러 불시정지를 막기 위하여 릴레이 바이페스 코드 플러그를 분전반에 꽂아놓고 버너를 정지시킨 다음 기름밸브와 증기밸브를 잠그고 다시 증기밸브를 열어 버너 안에 남아있는 기름을 제거한 다음 버너를 뽑아내는 작업을 하였다. 버너를 뽑아내고 새 버너를 다시 집어넣는 작업에는 세 사람이 모두 매달려야 했다. 버너에 밧줄 쇠고리를 건 다음 한 사람은 위에 올라가 버너를 끌어올리고 두 사람은 아래에서 도르래 밧즐에 매달려 버너를 끌어당겼다. 위에 올라간 사람은 보일러에서 뿜어져 나와 얼굴을 때리는 가스를 막기 위하여 방독면 마스크를 써야 했다. 버너가 뜨겁기 때문에 모두 석면장갑을 끼고 작업을 해야 했다. 우리는 석면장갑에서 떨어져 나오는 석면가루를 마셨지만 그 시절엔 석면이 발암물질이라는 것도 몰랐을 때다.

 

“영차, 여엉차.....”

그렇게 버너를 뽑아내면 버너를 일단 바닥에 내려놓고 준비된 새 버너를 다시 고리에 걸어 끌어올려 보일러에 집어넣고 레버를 돌려 버너를 조립한다. 그리고 증기밸브와 기름밸브를 열어 버너를 작동시킨다. 그러면 일단 버너교체작업은 마친 거다. 그리고 뽑아놓은 길다란 버너를 두 사람이 ‘영차, 어영차..’ 맞잡아 들고 작업대에 들어올린다. 렌치로 버너팁을 돌려 분리해서 솔벤트 통에 담가둔다. 나중에 이 버너팁을 와이어 브러쉬로 깨끗이 닦아 다시 버너에 조립해 둔다.

 

한 핸가 두 해를 지나서 나는 ABO2를 거쳐 ABO1으로 승진(?)했다. 보일러실 안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함께 버너교체작업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ABO1이 하는 일은 보일러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돌아다니며 여러 기기와 계측기들을 점검하고 조작하는 일이었다. 꼭대기에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했지만 내려올 때는 계단을 많이 걸어다녔다. 그리고 매일 한 번씩 굴뚝 바로 밑에 있는 두 대의 공기예열기 수트블로잉(Soot Blowing) 작업을 했다. 증기밸브를 열고 모터를 작동시켜 공기예열기 내부를 증기분사로 청소하는 작업이었다. 공기예열기 내부가 깨끗하지 않으면 연소가스가 연소공기에 열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여 보일러 열효율이 떨어진다 하여 매번 근무시간마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는 바람이 아황산가스를 육지 쪽으로 날려 보내 주었기 때문에 할 만 했다. 그러나 반대로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바람이 불어올 때는 죽음이었다. 뜨겁고 매캐한 아황산가스 속에서 밸브를 열고 닫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석면장갑을 끼고 멀찍이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다음 재빨리 달려가서 밸브 핸들을 힘껏 돌렸다. 그러나 힘든 밸브조작을 숨을 멈춘 채 한 번에 끝낼 수가 없었다. 숨이 차올라 어쩔 수 없이 숨을 쉬면 아황산가스가 내 목구멍으로 폐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발전정지를 할 때면 또 힘 든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일러 하부에 설치된 밸브실...., 거기에는 수십 개의 조그만 밸브들, Drain Valve와 Vent Valve들이 있었는데 이걸 열고 잠그는 것은 사람의 보통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제작된 밸브렌치를 밸브핸들에 끼운 다음 거기에다 쇠막대 철봉을 또 끼워서 젖 먹은 힘까지 다 짜내어 돌려야 밸브들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고 닫혔다. 밸브 한 개 여닫는데 십 분씩 씨름을 해야 했다. 수십 개의 밸브를 잠그고 여는 그 작업을 몇 시간 동안 하고 나면 녹초가 되었다. 아, 이런 이야긴 끝이 없으니까 이쯤서 그만 두자.

 

해풍(海風), 육풍(陸風)....., 우리는 16미터 보일러실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있었는데 낮에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밤에는 육지 쪽에서 바람이 불 때가 많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면 보일러실은 한결 지낼 만 했다. 보일러실 창문을 열어두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보일러실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그러나 육지 쪽에서 바람이 불 때면 보일러실은 아황산가스 덩어리가 되었다. 우리의 젊은 가슴은 그렇게 아황산가스와 석면가루로 채워지고 있었다.

 

보일러 꼭대기 39.7 미터와 45 미터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팔다리를 흔들며 걷는 모습이 마치 거미가 땅바닥에 납작 붙어 움직이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도 보일러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오금이 저리는 일이었다. 아무튼 3, 4호기 보일러 꼭대기가 감천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고 전망대였다. 어느 날 보일러 꼭대기에서 함께 일하다가 감천만을 바라보며 영백이가 내게 노래를 하나 가르쳐 주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보일러 꼭대기에서 홀로 내려다보는 감천 동네는 아름다웠다. 높직한 천마산은 검은 장막처럼 감천 동네를 내려다보며 진치고 있었고 감천 동네에는 불빛들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감천만 바다는 양편으로 산을 거느리고 몇 척 선박들의 불빛을 담아 안고서 대양을 향해 검은 빛으로 찰랑이고 있었다.

 

내가 부산화력으로 오기 전 해, 그러니까 내가 영월화력에 있을 때 부산화력 4호기 보일러 꼭대기 39.7 미터에서 우리 입사동기인 영남인가 하는 한 친구가 떨어져서 죽었다고 했다. 신발을 벗어놓고 안전모와 플래쉬라이트를 그 옆에 놔둔 채....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무슨 상처가 그리도 아팠기에 그렇게 젊은 목숨을 꽃 같이 던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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