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21. 아저씨 엎드려, 나 말 탈래

Thomas Lee 2022. 4. 25. 21:21

군수과 김 일병은 거의 날마다 군수과장 오 대위 집으로 작전(?)을 나갔다. 군수과장 오 대위가 김 일병을 ‘따까리’로 만들어서 자기 집에다 사역을 시킨 것이다. 오 대위 마누라는 방안에 누운 채 김 일병에게 물 긷기와 청소, 연탄 갈기, 밥 짓기, 설거지, 빨래까지 시킨다고 했다. 고참들이 김 일병의 이야기를 듣고 한 마디씩 했다. “야 이 씨팔, 아무리 군대라지만 엿 같다. 그래, 그 여편네 그냥 X으로 거기를 콱 찔러버려....”

 

가을 김장철이 되자 대대의 모든 장교부인들이 동원되어 벽제 여단본부장 댁에 김장사역을 나갔다. 때로는 우리도 차출되어 같이 갔다. 6655부대라는 공병여단본부의 군부대 같지 않아 보이게 함석판을 붙여서 만든 커다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원 스타 여단장 사택이 있었다. 거기에서 김장을 담글 때면 각 부대에서 동원되어온 장교부인들이 여단장 부인에게 애교를 떨어가며 배추, 무를 씻고, 소금을 절이고, 고춧가루를 비비고 온 종일 부산을 떨었다. 작전과장 이 대위 마누라도 김장작전에 동원되었으므로 어느 날 나는 지프차에 태워져 의정부 시내 이 대위 집에 아이 보기 작전(?)을 나갔다. 이 대위 집은 방 하나, 부엌 하나 단칸방에 지퍼 달린 베이비 옷장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옷가지들과 몇 가지 부엌살림 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작전과장이 군부대 막사공사나 벙커공사의 설계변경을 하여 공영토건의 공사비를 늘여주기도 하고 건설업자가 수시로 뭘 갖다 주기도 하는 것 같던데 정작 그의 집에는 아무 쓸 만 한 물건도 보이지 않으니 참 이상했다.

 

이 대위의 아들은 너 댓 살 된 놈이었다. 이 대위가 나를 내려놓고 마누라를 지프차에 태워 여단본부로 떠났다. 그러자 아이는 내게 엎드리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엎드려."

"뭐? 뭐라고? 엎-드-려?"

"응, 엎드려, 나 말 탈래.”

“뭐? 말? 말을 타?”

“나 말 탈래, 어서어엉, 다른 아저씨는 엎드린단 말야. 안 엎드리면 아빠한테 일러 준다아.”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이 나중에 이 대위에게 뭐라고 일러바칠지 속으로는 은근히 겁도 났지만, ‘안 돼, 애를 이렇게 키우면 안 돼, 아이 버릇을 이렇게 들이면 안 돼’, 하는 오기도 발동했고 아이에게 엎드려 말까지 태워주며 비참하게 비굴해질 수는 없다 싶었다. 나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그러뜨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타기 안 돼! 이 녀석이 누굴 보고 엎드리라는 거야? 너 혼나고 싶어? 아저씨한테 기합 받아 볼래?”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너, 이 아저씨 말 잘 듣고 잘 놀아야 한다, 알았지?”

아이가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그래 놓고는 좀 있다가 “얘, 아저씨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해 줄까?”, “이리 와 봐, 아저씨하고 성냥개비 놀이하자. 빵 빵 총싸움하자. 산토끼 노래 가르쳐 줄게”, 달래 보았지만 이미 나는 아이에게 팍 찍힌 다음이었다.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모른다.

나중에 아이가 이 대위에게 어떻게 일러바쳤는지도 모른다.

“아빠, 그 아저씨 미워. 말도 안 태워주고 날 막 때렸어,” 틀림없이 그랬을 거 같다.

그 뒤로 이 대위는 다시는 내게 자기 아이를 보라는 사역을 시키지 않았다.

나 대신 그 ‘말 태워주는 아저씨’가 지프차에 실려 아이보기 적전을 나갔다.

좌우간 충성스럽게 상납을 잘 해서였는지 마누라가 김장을 잘 해서였는지 이듬해 이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용인에 있는 3군사령부 본부로 갔는데 거긴 예비군 담당이라 돈이 더 많이 들어오는 자리라는 소문이 들렸다.

 

구 소위가 우리 정보작전과의 보좌관이었다. 한 때 서울시장과 이름이 같았다. 3군 사관학교를 거쳐 임관한 구 소위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구 소위는 자신이 이 대위에게 욕을 먹고 빳다를 맞거나 기합을 받아도 우리 사병들에게는 언제나 형님처럼 친구처럼 다정하였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 구 소위가 언젠가 한 번 우리 사병들을 집합시켜놓고 빳다를 친 적이 있었다. 세게 치지도 못 하고 빳다 치는 흉내만 냈다. 그러고서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빳다를 맞은 우리가 오히려 그를 위로해야 했다.

구 소위는 제대하면 석남사에 가서 중이 되는 게 장래희망이라는 소리를 잘 했다.

“아니, 보좌관님, 왜 하필이면 석남삽니까?”

“응, 거긴 여승들만 있거든.”

“그럼, 보좌관님도 성전환 수술 받으시려고요?”

“그래, 그래. 여자가 난 좋다.”

구 소위 같은 사람이 군인이 된 게 잘못일까?

군인이 되려면 성질 사납고 무지막지해야 되는 거 아닐까?

군대에서 이런 상하관계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우리 사이엔 형제와 같은 신뢰와 우애가 싹트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 심부름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육군본부 앞에서 나는 다른 일로 온 구 소위를 만났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손을 잡고 한참을 걷다가 음료수라도 마시자면서 한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를 지키던 주인이 우리에게 그랬다 “이상도 하네. 군인도 손잡고 다니나요?”

제대 후 나는 익구를 두어 번 만난 적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다음 구 소위와 이 하사를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구 소위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함께였다. 구 소위, 아니, 구 중위는 자신의 희망대로 제대하였는데, 석남사 중이 되는 대신에 그 아가씨와 곧 결혼할 거란다. 백 번 잘 생각했지. 지금은 어디에서 잘 살고 있을까?

 

작업중대 3중대 황 하사는 어느 날 내게 진정서 작성을 부탁하였다. 내가 차트병을 하니까 잘 쓰는 글씨로 진정서를 좀 써 달라는 것이었다. 인근동네 주민 명의로 국방부 장관 앞으로 보낼 진정서라는데 써달라고 불러주는 내용이 기가 막혔다.

“우리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공병부대의 황 모 하사는 성격이 포악하고 거칠 뿐 아니라 주벽이 심하며....... 우리 주민들에게 걸핏하면 욕설을 하고 시비를 걸고...., 동네 처녀들을 희롱하고...., 이렇게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는 마땅히 군에서 퇴출 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에 진정하오니 적절한 조치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황 하사님, 이렇게 진정서를 쓰라고요? 동네주민 명의로요?”

“이 상병, 그렇게 해서라도 제대하고 싶어서 그러오. 몇 번이나 제대를 신청했지만 말뚝하사들이 제대하기가 쉽지 않네요. 제대만 하면 뭘 해먹고 살든 군대보다 못 하겠소?”

기가 막혔지만 나는 황 하사가 써달라는 대로 진정서인지 고발장인지를 써 주었다. 진정서 작전에도 불구하고 황 하사는 내가 제대할 때까지도 제대를 못 하고 있었다. 그 황 하사가 나중에 소원대로 제대를 하였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군복무 3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는 하지만 군대생활이 꼭 그래야만 했을까? 아까운 청춘을 다 썩히고 세월을 썩히고 재능을 썩히는 그런 곳이어야 했을까? 나는 우리 공병부대에서 장비부와 수송부가 제일 부러웠다. 자동차도 그렇지만 특히 중장비를 운전하고 정비하는 기술을 배워서 제대한다는 것은 적어도 세월허송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새파란 청춘들 불러서 전쟁놀이, 병정놀이 말고 무언가 쓸 만한 한 두 가지 기술이나 기능은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장비부와 수송부는 기름 도적질을 많이 했다. 운전병들이 시내 주유소에 들러 연료통의 기름을 팔아먹고 귀대하는 식이었다. 그런 수송부와 장비부에 기름창고 열쇠까지 맡겨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름창고지기 연료계는 우리 작전과가 맡고 있었다. 나는 챠트병을 하면서도 때로는 정훈병 노릇도 겸하고 연료계를 겸하기도 했다. 차량이나 장비가 출동할 때는 출동명령서와 운행예정거리를 기입한 연료불출 신청서를 담당장교와 작전과장의 싸인을 받아 연료창고로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신청서를 접수하고 대장에 기입한 다음 드럼통 뚜껑을 열고 5갤런짜리 통에 연료를 부어서 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기름도둑질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선임 연료계와 수송부, 장비과 고참들이 기름도적질 비법과 요령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우선 5갤런짜리 기름통 우그러뜨려 기름이 적게 담기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비싼 휘발유에 값싼 디젤유를 적당히 부어넣어 휘발유의 양을 늘리라는 것이었다. 휘발유에 디젤유를 섞어 넣으면 차량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무 문제없으니 걱정 말란다. 더러는 작업 중대장이나 장교들이 결재 받은 양보다 많은 연료를 부탁하거나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기름을 좀 더 주면 좋은 소리 듣지만 거부하거나 곧이곧대로 적게 줬다가는 괴로워질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 그랬다. 나는 한 번 작업중대장 대위가 더 달라는 연료를 좀 적게 주었다가 앙심을 품고 달려온 그 대위이게 군홧발로 정강이를 까이고 따귀를 맞았다.

 

수송부, 장비부는 연료 뿐 아니라 장비와 공구를 시중에 팔아먹는 때도 많았다. 한 번은 장비부 담당장교 김 중위가 내게 와서 그리스 펌프(Grease Pump)가 없어졌다면서 연료계 책임이라면서 무조건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장비부 사병들이 훔쳐다 팔아먹은 것 같은데 내게 내놓으라니 기가 막혔다. 우리 작전과 보좌관에게 이야기했더니 황당해 하면서도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그 장비를 구하려 외출외박증을 끊어 서울로 갔다. 무슨 수로 그걸 구해 오나, 막막했다. 나는 영등포 구로공단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 노하를 찾아갔다. 내 이야기를 들은 노하가 다음날 청계천에 가서 그리스 펌프를 하나 구해왔다. 노하가 구해온 그리스 펌프를 보니 그게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바로 그 그리스 펌프였다. 나의 구세주가 되어 주었던 노하, 지금도 고맙기만 하다.

그리고 내게 그리스 펌프 분실 책임을 뒤집어 씌운 그 김중위는 어느 날 들이닥친 헌병대에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는데 군사재판을 받아 이병으로 강등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엔진을 팔아먹었다던가, 뭘 팔아먹었다던가....

 

우리 작전과 부사관인 이 중사는 군부대 바로 옆 동네에 방을 얻어서 마누라와 넷인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살면서 출퇴근하던 영외거주자였다. 구정이 가까워오자 그는 연료계를 담당하고 있던 내게 휘발유를 빼돌려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자기에게 상납하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어왔다. 별 융통성 없는 내가 수송부와 장비부 녀석들에게 부탁해서 휘발유를 팔아오게 해서 근근이 몇 푼 마련해서 갖다 주긴 했는데 액수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이 중사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다른 트집을 잡아 나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뺨을 때리고, 군화발로 정강이를 걷어차고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한참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는데 이 대위 후임으로 새로 부임한 작전과장 강 대위가 출근해서 콘센트 막사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니, 이 중사,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애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면 쓰나?”

강 대위가 눈치를 챘는지 나를 연료계로부터 빼주었다. 신 일병이 나를 대신하여 연료계 일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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