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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달려라,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

한 동안은 피닉스에 한 달 먼저 가있던 K계장이 운전하는 차에 얹혀 해결했지만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한 집에 함께 살 교육생 네 명 가운데서 내가 가장 먼저 운전면허를 땄다. DMV(차량국) 운전면허시험장에 가서 필기시험을 보았는데 필기시험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사지선다형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정답 번호를 선택해 버튼을 누르면 “맞다”, “틀렸다.”가 바로 하면에 표시되었다. 25문항 가운데 20문항 이상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시험도중에 여섯 문제를 틀리면 거기에서 시험이 중단되고 불합격 처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첫 문제부터 다섯 문제를 내리 틀리고 또 한 문제를 더 틀려서 초장에 보기 좋게 낙방하였다. 창피하지만 이상하게시리 모르는 ..

39. 후버댐, 라스베가스, 그리고 아리조나

벡텔사에서 교육을 받은 지 한 달 좀 더 지난 12월 어느 날인가, 벡텔사는 교육생들에게 2박3일 일정으로인가 견학인지 투어를 간다고 알려왔다. 강의실에 앉아서 강의만 듣던 교육생들은 모처럼 신이 났다. 나도 백화점인지 마트인지에 가서 거금 300 달러나 투자하여 일제(日製)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 한 대를 사고, 코닥인지 후지인지 필름도 몇 통 샀다. 또 12월이라 날이 추울 것 같아서 노랑색 골덴 재킷 하나를 구입하여 입었다. 마트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 뒤쪽에 볼링장을 지나면 있었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었다. 규모가 꽤 큰 그 마트엔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다 미국제 아니면 일제였다. 일제 카메라, 일제 텔레비전, 일제 장난감, 일제 공구와 문방구.....,, 한국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

38. 한국 촌놈들 미국구경

우리 교육생 거의 전부가 자동차를 운전해 본 적도 없었고 운전면허를 가지지도 못 했다. 따라서 미국에서 교육기간 동안 살아가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해야 했다. 나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운전면허를 따서 국제면허를 받으려고 청담동 운전면허교육장에서 연습도 하고 강남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시험도 쳤지만 오르막 눈물고개에서 시동을 꺼트리는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교육생 중에 이미 미국 운전면허를 가진 친구 하나가 있었다. 사무직 계장이었는데 이미 미국에 한 번 와서 교육을 받은 적 있고 그 때 미국 운전면허를 땄다고 했다. 그는 비오는 날 미국의 도로를 달리는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해외교육에 지원했단다. 그 친구는 미국에 오자마자 중고 승용차를 구입하여 운전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

37. 로스앤젤레스 사무소

1981년 11월초, 로스앤젤레스 인근 다우니에 자리잡은 벡텔사에서 교육이 시작되었다. 우리 교육생들에게는 두꺼운 교재가 한 아름씩 주어졌고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 벡텔사 직원들이 와서 강의를 했다. 바인더로 두껍게 만들어진 교육교재는 모두 열 권도 훨씬 넘었는데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 과정이 분야별, 과정별로 분류, 정리되어 있었다. 벡텔사 직원 강사들이 와서 열심히 강의하였지만 우리의 짧은 영어로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데다 시차 때문에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 해 조는 교육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벡텔사의 교재들은 발전소 건설 전체 과정을 경영, 재정에서부터 구매, 자재관리, 예산관리, 공정관리, 품질관리 뿐 아니라 토목, 건축, 기계, 전기, 계측제어 등 기술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교육하는..

36. 벡텔사 해외훈련

온 가족이 새벽부터 법석을 떨고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과 친척들로 구성된 환송단이 비좁은 13평 아파트를 덮치고 나는 그 환송단을 이끌고(?) 오후 1시인가 2시 쯤 잠실을 출발하여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거기에서 또 기다리고 찾고 부르는 어수선한 가운데 출국수속을 하고 짐을 부치고 난리법석을 떤 끝에 저녁 일곱 시쯤엔가 환송단의 전송을 받으며 나는 출국장을 지나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하루 종일 난리를 치른 것이다. 그렇게 비행기에 탑승하고서도 또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가 탄 KAL기는 활주로를 달리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비행기가 큰 원을 그리며 빙 도는가 싶더니 서울이 발 아래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깔린 서울은 보석 같은 불빛들로 한강물과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난생 처음 ..

35. 전두환의 공사화와 김대중의 해외매각

대구공고 선배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선배가 무슨 소용인가? 구악일소니 새 질서 확립이니 하는 적폐청산(?)은 나에게도 많은 피해와 상처를 안겨주었다. 지금도 문재인 정권에 의하여 적폐청산이니 보수궤멸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물갈이 작업이 있었지만 그 때에도 신군부는 이른 바 기득권층을 비리척결 대상으로 보는 듯 했다. 한전에서도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살벌한 인원감축이 이루어졌고 퇴직금을 대폭 삭감하여 개선(?)하였으며 민간이 보유한 한전 주식을 100% 강제매입 하여 한국전력주식회사를 한국전력공사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보유주식은 은행에 공탁한다고 들었다. 퇴직금 제도를 바꾸는 것은 노사단체협약의 변경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공기업의 노조위원장들을 불러 ..

34. 초급간부임용고시, 그리고 해외훈련요원 선발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79년, 한전 본사는 비좁은 을지로 사옥을 떠나 여의도로 이사하였고 우리 원자력건설부도 퇴계로에서 여의도 KBS맞은편 전경련 빌딩으로 이사하였다. 나는 잠실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여의도로 출퇴근하였는데 통근버스를 놓치면 택시나 버스, 또는 지하철로 영등포를 거쳐서 여의도로 출근하였고 퇴근할 때는 영등포로 나와 천호동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천호동에서 출발하여 잠실을 거쳐 여의도로 가는 통근버스는 강변도로(올림픽대로)를 달렸으므로 우리는 버스 안에서 아침의 한강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듣기로는 겨울에 한강이 두껍게 얼어붙어서 멋진 스케이트장이 된다고 했는데 그 때에는 한겨울에도 한강이 거의 얼지를 않았다. 성수동을 끼고 옥수동 쪽 한강으로..

33. 고리 1호기 복수탈염설비

고리원자력 1호기가 준공된 것은 1978년 4월, 그러니까 내가 원자력건설부로 가기 딱 1년 전이었다. 나는 고리 1호기 건설에는 참여하지 못 했다. 부산화력에서 일하면서 대학교에 다닐 때 대학친구들과 고리 1호기 건설현장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월내해수욕장에 가서 놀다 온 적이 있었고 또 고리 건설현장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러 한 번 갔던 적이 있다. 그 때 고리 부소장이었던 이종훈씨를 찾아 인사드린 기억이 난다. 고리 1호기를 1972년에 착공할 때 계획공사비는 550억원이었고 계획설비용량은 55만 킬로와트였다. 6년 뒤 1978년 4월 준공되어 상업운전 착수 때 최종공사비는 물가상승으로 인하여 1,280억원이 되었고 설비용량은 58만 7천 킬로와트가 되었다. 공사비가 두 배 넘게 늘었지만 불과 1,2..

32. 원자력건설부

원자력건설부에 전입한 나는 기전공사과에 배치되었다. 나는 입사한 지 11년째나 되는 고참직원이었지만 원자력건설부에 전입하자 도로 신입사원이 되어버렸다. 발전소 안을 뛰어다니며 운전기록지(Log Sheet)를 적고 밸브 돌리고 버너를 뽑아 교체하던 내게 사무실에서 하는 업무는 생소한 새로운 일이었다. 내부결재니 기안지니 협조전이니 하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른 부서와의 업무관계 파악도 어려웠고 원자력 업무에 사용되는 영어와 용어들도 생전 들어보지 못 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물어가면서 배워가는 수밖에. 과장님과 계장님은 처음에는 내게 비교적 쉬운 일들을 시키다가 내게 문장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부터는 우리 과에서 작성되어 올라가는 거의 모든 기안서류를 나더러 작성하거나 교정하게 하였다. 김 계장님..

31. 서울로 가다

1979년 3월, 공고졸업 10년 만에 대학을 마친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사장님은 김영준씨였고 원자력건설부장은 이종훈씨였다. 사실 나는 서울로 올라갈 처지가 전혀 안 되는 상황에 있었다. 서울 본사로 간다고 서울에 사택이 있거나 주택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우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달랑 전세금 80만원 들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그 무서운 서울로 올라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일가족 집단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무모한 행보였다. 잠깐 그 당시 내가 받던 한전의 봉급수준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군대에 가기 전에 받던 월급은 대략 2만 5천원이었다. 군에 있을 때 우리 정보작전과장 대위의 봉급이 2만원도 안 되다가 대폭 인상되어 3만원이 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