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10

10. 한국중공업 매각

10. 한중매각 그러니까 90년이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전이 한중에 발전설비를 몰아주고 영광 3,4호기 주기기와 보조기기를 발주해 주는데도 한중은 여전히 적자에 허덕이다가 결국 4,210억원의 자본금이 다 잠식되어 370억원만 남는 경영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중은 한전의 발전설비만으로는 도저히 경영이 안 되어 동남아로, 중동으로 영역을 넓혀 수주활동에 나섰었는데 그게 또 화근이 되고 만 것이다. 한중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씨르 시멘트 공장 건설공사를 4천만 불엔가 수주하였다. 그리고 아랍에미레이트의 제벨알리 담수설비-화력발전설비를 1억불에 수주하였다. 그런데 공사를 마치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 아씨르 시멘트공장에서는 공사비가 곱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4천만불 가량 손해보고 아..

9. 잘못 불출된 자재 때문에

9. 잘못 불출된 자재 때문에 한중이 한전의 원자력설비 기자재만 수주한 게 아니었다. 88 올림픽 후 90년 무렵부터 한국의 생활수준 향상과 함께 전력수요가 급성장하는 바람에 한전은 급하게 많은 화력발전소들을 건설해야 했고 한중은 원자력발전설비 보다 오히려 훨씬 많은 화력발전소 기자재를 수주하여 납품했다. 원자력을 담당하던 나와 직접적 관계는 없었지만 한중은 기력발전소의 기자재도 애를 먹인 때가 많았다. 한전의 50만㎾급 화력발전소의 보일러는 슐쳐형 관류보일러이다. 아, 관류(灌流)보일러가 뭐냐고? 예전의 발전소들은 보일러 내부에 수많은 튜브들을 배치하고 그 튜브 안으로 물이 흐르면서 가열된 다음 증기드럼에서 증발이 되게 하고, 그 증발된 증기를 다시 다른 튜브들을 통하여 흐르게 하면서 계속 가열하여 과..

8. 쪼개진 터빈 샤프트

8. 쪼개진 터빈 샤프트 나는 1988년부터 91년까지 3년가량 영광 3,4호기 주기기 공급계약 기술관리 담당과장으로 일하면서 매달 한 두 번씩 한중 창원공장에 내려갔다. 무슨 문제가 있거나 필요할 때면 또 내려갔다. 낡은 포니엑셀 승용차를 몰고 가기도 하고 고속버스편으로 가기도 했다. 나의 낡은 포니엑셀 승용차는 비가 내리는 날 고속도로에서 시속 60킬로미터만 넘으면 수막현상으로 미끄러지는 현상이 발생하여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한중분 주기기 계약금액은 제작진도를 확인한 다음 기성고(旣成高)로 매달 대략 수십억원에서, 백수십억원의 규모로 지불되었다. 기성고검사를 위하여 다른 담당과장과 함께 또 직원들과 함께 내려가면 한중은 우리를 상전 모시듯 영접하였고 한중 경내의 정성관이라는 호텔(?)에 묵게 해 ..

7. 현가화지수

7. 현가화지수 그런데 이러한 획기적인 원자력기술자립을 추진한 박정기 사장은 일부국회의원들과 반원전단체의 집요한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된다. 영광 3,4호기가 “짜집기 설계”라는 것이었다. 마치 영광 3,4호기가 너덜너덜 누더기로 누빈 옷처럼 위험한 원전이라도 되는 듯 떠들어댔다. 이런 공격을 받자 박정기 사장은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태산을 넘는 큰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훌훌 떠나버렸다. 1988년 늦여름인가 그랬다. 그러나 박정기 사장의 사임 후에도 영광 3,4호기에 대한 비난과 의혹과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짜집기 설계”라는 공격과 아울러 “CE로부터 3억 달러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아, 영광 3,4호기 계약추진이 진행되는 동안 역사는 숨가쁘게 ..

6. 짜깁기 설계

6. 짜깁기 설계 미사일에 맞아 269명의 목숨이 어두운 사할린 밤바다에 꽃잎처럼 흩날려 떨어진 KAL기 피격사건이 일어난 것은 1983년 9월 1일인가 그랬고, 그 날 나는 초급간부 교육을 마치고 연수원에서 나왔고, 이삿짐을 꾸려 가족을 데리고 머나먼 전라도 영광으로 내려가 9월 3일엔가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 기계과 기술계장으로 근무하도록 발령을 받았다. 내 나이 서른세 살, 아내는 서른 살, 아들은 일곱 살, 딸은 세 살 때였다.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 기계과 기술계장으로 일을 시작하고 며칠 지난 10월 9일 한글날이자 일요일, 아웅산 폭탄 테러가 터졌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영광 2호기 격납건물 공사도중 600톤 링거크레인이 부러지면서 돔철판이 떨어지는 대형사고가 났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 1,2호..

5. 빨간 실타래 로고

성낙정 사장은 한전출신으로 한전 사장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성낙정 사장 후 유일한 한전출신 한전사장은 이종훈 사장이다.) 그 성낙정 사장이 한전사장 얼마 하지도 못 하고 졸지에 한중 사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성낙정 사장은 한중 사장으로 옮겨가서 한중의 방대한 공장설비를 매각, 정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경기도 군포의 공기조화기, 열교환기 제작공장을 금성전선인가 대우인가 경원세기엔가(기억이 가물가물한다)에 매각하고 창원공장의 건설중장비 공장을 삼성에 매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자구노력에도 한중의 경영은 험난한 태산준령의 연속이었다. 한 편 박정기 사장은 한중을 떠나면서 “나는 한중을 떠나지만 관중석에서 여러분을 계속 응원하고 지원할 것입니다.”라고 이임사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어이가 ..

4. "사장 바꿔서 해 봐!"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은 크게 몇 분야로 나누어서 진행한다. 우선 주기기(主器機)는 원자로설비(NSSS)와 터빈발전기(T/G)이다. 둘째는 주기기를 제외한 기타 보조기기(輔助器機, Balance of Plant: BOP)들이다. 그 다음 건설현장 시공(Construction)이다. 그 다음은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플랜트종합설계와 기술관리(Architectural Engineering)다. 그리고 발전소 준공단계에서 한전이 시운전(試運轉)을 하면서 설비계통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설비를 인수해 나간다. 그 외에도 비파괴검사, 사업관리, 금융관리, 핵연료 조달, 주변설비 등 많은 분야들이 있다. 1987년 준공된 영광 1,2호기의 총공사비는 2조 440억원(2기 합하여)이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분야별..

3. 한국중공업의 탄생

69년 그 때 마산 바다 건너편에 보이던 창원시 귀곡동 골짜기... 마산화력발전소는 80년대에 철거되고 아파트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69년에 입사하여 마산화력에서 교육받고 나서 나는 영월화력 석탄미분기운전원, 부산화력 보일러 운전원을 하면서, 또 군대 3년을 갔다 오고,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그렇게 10년을 보냈고, 그 다음 원자력건설부서로 옮기고, 해외훈련을 다녀오고, 영광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에서 5년 동안 일하고, 그렇게 치열한 20여년을 보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나고 내 나이 마흔 무렵인 88-91년경 나는 본사 원자력건설처에서 영광 3,4호기 주기기(원자로설비, 터빈발전기) 기술업무를 담당하면서 몇 년 동안 서울로부터 그 귀곡동 골짜기로 수없이 출장을 다니게 된다. 창원시 귀곡동 ..

2. 마산화력 수습직원 훈련생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그 유명한 가곡 “가고파”의 고향 마산, 내가 69년 2월 입사하여 4주간 쌍문동 연수원에서 초등반 교육을 받고 빨간 색깔로 인쇄된 A4 반 장 크기의 수습사원 발령장을 받아들고 처음 간 곳이 마산화력발전소였다. 나는 중앙선 열차를 타고 고향 안동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마산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안동에서 중앙선 타고 영천으로, 다시 대구선 타고 대구로, 다시 경부선 타고 삼랑진으로, 삼랑진에서 다시 남해선으로 갈아타고 마산에 도착하니 하루가 저물었다. 마산화력...., 2만5천㎾ 짜리 석탄발전소 2기, 마산화력발전소는 잔잔한 마산 앞바다 한 켠 해운동이라고 부르는 동네 바닷가에 서 있었다. 마산만은 깊숙이 들어온 내해(內海)라 파..

1. 열아홉 살의 한국전력 입사

한국전력의 기억 1. 1969년 한전입사 내가 공고를 졸업하고 한전에 입사한 것은 1969년 2월 17일이다. 그 전 해 1968년, 나는 공고 3학년이었고, 9월에 부산에서 한전입사시험(필기시험)을 보고 합격한 다음 10월에 서울 을지로 입구 한전본사에 올라가 면접시험을 보았다. 밤새워 중앙선 열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한 것이 새벽 4시 반. 성호와 함께 을지로 입구 한전본사까지 택시를 타고 갔는데 요금이 거금 160원 나왔다. 서울이 난생 처음이었다. 시청 앞에는 전차들이 스파크를 지지직- 내면서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이른 새벽에 시청앞 골목 안에 문을 연 이발소는 부지런한 중국인 이발소 뿐이었다. 성호는 중국인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였고 나는 중국인 이발사에게 내 머리와 얼굴을 맡기기가 싫어 그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