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19. 김해공병학교, 자대배치, 그리고 가평신병교육대

Thomas Lee 2022. 4. 23. 02:56

1973년 3월말쯤 우리는 6주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김해공병학교로 가게 되었다. 다시 5주간 후반기 야전공병 주특기 신병훈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새벽 2시쯤엔가 우리는 군용트럭에 태워져 안동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플랫폼으로 줄지어 걸어 들어갔다. 대구를 오가느라 내가 수도 없이 다니던 그 안동역 플랫폼. 그런데 그 어두운 새벽에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동생, 형,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사람들 틈에 어머니도 나와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내게 무언가를 던져 주셨다.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를 돌돌 묶은 돈 천오백 원이었다.

“야야, 몸조심 하그래이, 집 걱정은 말고....“

인솔하는 기간병들의 욕설이 날아들었다.

“이 새끼들 고개 숙여, 고개 안 숙여? 이 씨발 놈들 죽고 싶어?”

나는 어머니가 던져준 돈을 얼른 바지춤에 숨겨 넣었다.

 

우리를 싣고 안동을 떠난 열차가 중앙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는지, 중앙선, 대구선, 경부선으로 내려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우리는 구포역에 도착하여 군용트럭으로 김해공병학교로 운송되었다.

“구포역이로구나. 아, 여기가 부산인데, 저 산 너머에 부산화력이 있는데, 아,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녀의 집이 있는데.....”

김해공병학교는 구포역에서 북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조금 더 가서 마산 쪽으로 가는 국도 옆 산골짜기에 있었다.

“아, 저 길이 진영을 거쳐 마산으로 가는 길이로구나. 내가 한국전력에 입사하여 처음 발령 받아갔던 마산화력발전소가 있는 그 곳, 진동이네 집이 저기 산 너머 어디쯤 있었지.....”

그런 감상에 빠질 틈도 주지 않고 빡센 김해공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야전공병반’, 우리가 받을 5주짜리 훈련코스 이름이었다. 건설공병은 집 짓고 다리 만드는 건축 병과이고 야전공병은 지뢰, 철조망, 폭파, 부교 만드는 야전 곡괭이, 삽자루 병과라고 했다. 우리 36사단 훈련소 말고도 논산훈련소, 또 대구인가 전주인가 어디, 어디 훈련소에서 온 훈련병들로 도합 150여명 되었는데 36명씩인가로 4개 소대로 나누어져 야전공병 훈련중대가 만들어졌다. 안동훈련소에서 우리가 가장 고학력에 속했다. 36사단에서 공병은 고학력자들이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우리 대학재학중, 혹은 대졸 훈련병들을 뽑아 김해공병학교로 배정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36사단에서 온 우리 훈련병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우람한 치선이가 향도가 되었고 몇몇 친구들이 분대장들이 되었다. 36사단 훈련병들이 가장 고학력인데다 훈련도 가장 빡세게 받았다는 사실이 금방 나타났다. 논산훈련소에서 온 친구들은 ‘원산폭격 실시!’라는 소대장 교관의 명령에도 원산폭격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김해공병학교의 훈련병 내무반에서 우리는 밤마다 가까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빳다 치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소리에 몸을 떨어야 했다. 몽둥이로 둔부를 내리치는 둔탁한 ‘퍽’ 소리와 뒤를 이어 “아아아악..” 하고 단말마처럼 질러대는 비명소리는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뭘로 어떻게 때리기에 저런 소리가 나며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인간이 저토록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우리도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가면 저렇게 두들겨 맞아야 하는 걸까? 사람이 저렇게 맞고도 살 수 있는 것일까? 3년 동안 무사히 살아서 제대할 수 있을까?

 

공병학교에서 주는 식사는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다. 그런데 밥을 어떻게 주걱으로 흔들어서 기술적으로 푸는지 분명히 한 그릇인데 스푼으로 꾹 누르면 반 그릇도 채 안 되었다. 밥을 국그릇에 부으면 그제야 딱 한 그릇이 되었다. “식사개시!” 호령소리에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크게 복창하고 나서 우리는 그 두 그릇을 한데 부어 말아서 후다닥 들이마시듯 퍼먹어야 했고, 일 분도 못 되어 “식사 끝!” 구령에 부동자세로 식사를 중지하고 식기를 들고 일어서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식사 한 그릇을 먹고, 아니 목구멍에 부어넣고 나서 연병장에 도열한 다음 중대별로 행진하여 훈련장으로 출장을 갔다.

 

대인지뢰, 대전차지뢰, 폭풍지뢰, 클레모어 같은 지뢰의 종류, 테트라사이트, 다이나마이트, TNT, 컴포지션 같은 폭약의 종류, 도화선과 도폭선 같은 폭파장치, 철조망의 몇 가지 형태와 종류, 부교, 조립교 같은 다리의 종류도 배웠다. 그러나 훈련시간 대부분은 교육이나 실습이 아닌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잔디를 떠다 심고, 석축을 쌓고 무너진 길을 보수하는 사역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조립교 훈련장, 지뢰, 철조망, 폭파 훈련장 주변에 돌로 축대를 쌓고 흙을 퍼날라 메우고 잔디를 입히고 길을 만들었다. 부교훈련장에 가서 부교훈련을 받는 대신 부교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사각형 쇠통들을 들어 옮겨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그 사각형 쇠통들은 가로 세로가 1피트 쯤 되고 길이가 4~5미터쯤 되는 속이 빈, 말하자면 속이 비어서 통나무 같이 물에 뜨도록 만든 사각통인데 이걸 물 위에 띄워 뗏목처럼 이어 조립하면 트럭이나 장갑차도 건널 수 있는 부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쇠통들이 얼마나 무거운지 두 사람이 맞잡아서는 들어 올릴 수가 없었고 양편에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달라붙어야 겨우 들어 올릴 수가 있었는데 손잡이를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만들어놓아 도무지 두 사람의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뭘 이 따위로 만들어 놓았지? 이걸 어떻게 들어 옮기란 말이야?”

무엇보다도 배가 너무 고팠다. 아침에 밥과 콩나물국을 합쳐 딱 한 그릇을 먹고 우리는 온종일 허기에 시달리며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고 돌을 날랐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는 네 줄로 열을 지어 군가를 부르면서 구보로 식당으로 달려갔다. 멀리 폭파 훈련장으로부터 부대로 돌아오는 길은 2~3 킬로미터 되는 꽤 먼 길이었는데 우리는 구령에 맞추어 단거리 선수들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 식당으로 달려와서 점심식사를 마치면 다시 그렇게 구보로 훈련장, 아니 사역 작업장으로 돌아갔다가 저녁시간이 되면 다시 그렇게 달려서 돌아왔다. 그 인원이 그렇게 촘촘히 대오를 지어 군가를 부르면서 발맞추어 그렇게 빠른 속도로 뛰는 것이 가능하다니.......

 

그 가운데서 작은 즐거움이라면 주말이 되면 열리는 훈련중대 대항 배구시합이었다. 우리 중대가 최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북사대 체육과를 다니다 입대한 농구선수 치선이, 럭비선수 익구, 유도선수 유경이가 버티고 있는데다 손이 재빠른 창우가 센터를 맡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선이의 192 센티미터가 넘는 거구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내리꽂는 스파이크는 아무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우리 중대가 오기 전까지 최강자였던 장교중대가 약이 올라 몇 번이고 재시합을 요청했지만 우리 졸병훈련병 중대의 적수가 되지 못 했다.

치선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거구였다. 거구이면서도 체격이나 운동신경도 탁월하였다. 그 당시 키가 190 Cm가 넘으면 신체검사를 통과할 수 없어서 현역입대가 안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치선이는 자기처럼 크고 강한 대한남아가 군대에 못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남자가 군대에 안 가면 남자가 아니다, 하면서 병역신체검사 때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목과 등도 구부려서 키를 최대한 낮추었는데도 190 Cm가 넘었단다. 그런데도 치선이는 자기 키가 189 Cm라고 우겼단다. 신체검사 하던 군의관도 귀찮았는지 무슨 생각이었던지, 189 Cm로 기입하고 통과시켜 주더란다. 그래서 입대했단다. 그런 치선이라 공병학교에서도 치선이게는 따로 식사를 더 제공하는 배려를 하는 것 같았다.

 

한 주일에 한 번 일요일 점심은 언제나 라면이었다. 주황색 플라스틱 식판에 담아주는 그 불어터진 라면도 훈련병들에게는 꿀맛이었다. 어느 일요일 점심식사를 마친 후 중대교관이 오더니 식당에 라면이 많이 남았으니 마음대로 퍼먹으라고 했다. 우리는 좋아라 하고 다시 식당에 가서 라면을 퍼다 먹었다. 그러고 난 다음 중대교관이 다시 우리에게 자유시간을 주었다. 저녁식사시간까지 마음대로 놀라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주어지는 자유시간이었다. 우리는 PX로 몰려갔다. 나는 어머니가 주신 돈을 꺼내어 찐빵을 샀다. 100원인가를 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 열두 개를 훈련모 안에 가득 담아주었다. 나는 그걸 꾸역꾸역 다 먹었다. 다른 친구들이 막걸리를 사 마시다가 내게도 권하는 바람에 막걸리도 반 깡통 쯤 마셨다. 그러다가 자유시간이 끝나고 저녁식사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집합하여 식당으로 갔고 저녁식사를 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내게 끔찍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너무 많이 먹은 것이었다. 워낙 배고프다 보니 음식물로 위가 가득차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도 먹는 것이 멈추어지지 않아 엄청난 과식을 한 것이었다. 배가 올챙이배처럼 터질 것만 같았다. 토하고 싶어도 토해지지도 않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배가 터져 죽는구나 싶었다. 나는 내무반 메트리스 쌓아놓은 뒷구석에 배를 잡고 누워 두 시간 가량을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살아났다. 내 평생 그렇게 미련하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아, 김해공병학교...., 내 평생 그 때처럼 배고파 본 적 없고 내 평생 그 때처럼 배불러 본 적 없다.

 

우리의 배고픔이나 훈련과 사역에는 아랑곳없이 공병학교의 넓은 산비탈과 골짜기에는 진달래와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꽃향기 가득한 공병학교 뒷산 폭파훈련장에서 삽질을 하다가 한 훈련병이 뇌까렸다, “이 씨팔, 내가 장가가서 아들을 낳아 키우면 개새끼다. 아들 낳으면 그 자리에서 숨통을 눌러 죽여 버릴 끼다.”

어느 날 위병소 기간병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가 면회를 왔었단다. 모든 훈련병이 출장훈련중인데다 규칙상 면회가 안 된다고 했더니 몇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결국 울면서 돌아갔단다. 아, 그녀가 여길 찾아왔었구나.

 

우리는 김해공병학교에서 후반기 5주 훈련을 마치고 다시 의정부 101 보충대로 갔다. 103보충대나 105 보충대로 가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가겠네.....’ 강원도 인제, 원통 같은 험악한 산골짜기 전방에 간다던데 우리는 101 보충대라 경기도에 배치될 거라고 했다. 101보충대는 의정부 남쪽 어디쯤 되는 것 같았다. 도봉산이 가깝고 한전 쌍문동 연수원도 멀지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여러 훈련소에서 다양한 병과의 수많은 신병들이 따불백을 메고 입소하였다. 저녁 점호시간에 한 장교가 들어와 전차병과 신병들에게 구령과 군가를 시켰다. 전차병과는 탱크 안에서 죽는다나, 전차병과 신병들은 대답과 구령, 그리고 군가를 탱크 엔진이 뿜어내는 ‘크르렁’ 소리처럼 했다.

 

우리는 이틀인가 머문 다음 벽제에 있는 제1공병여단으로 실려갔다. 6655부대라고 부르는 제1공병여단은 문산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커다란 함석판 출입문을 달아놓아 군부대인지 무슨 허름한 야적장 창고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었다. 치선이는 공병여단 본부에서 담박 눈에 띄어 909부교중대에 배치 받았다. 나중에 909부교중대장이 치선이를 특별히 자기 옆에 재우면서 아꼈다는 소문이 들렸다. 혹시 심기를 건드리면 휴가나 외출을 가서 키가 너무 크다고 제대신청을 하고 귀대하지 않을까봐 특별관리, 노심초사했다나. 나는 익구와 함께 의정부 북쪽에 있는 102야전대대로 팔려(?)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입신고도 하기 전에 또다시 가평 1군단 신병교육대에 가서 4주 신병훈련을 또 함께 받았다. 1군단 신병교육대 4주 훈련은 1군단에 배속되는 모든 신병이 의무적으로 거치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그게 1973년 5월이었다. 그 사이에 진달래도 지고 아카시아도 졌다. 가평신병교육대는 산을 넘어 꽤 큰 개울 옆 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일대가 드넓은 밤나무 숲이었고 마침 밤꽃이 구름처럼 만발하여 있었다. 밤꽃 냄새는 왜 하필이면 그런지....

우리는 흙먼지 풀풀 나는 넓은 연병장에서 온종일 제식훈련을 받았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갓, 좌향 앞으로 갓, 우향 앞으로 갓, 제자리에 섯!........”

36사단 신병훈련 6주, 김해공병학교 5주, 가평신병교육 4주..... 우리가 입대한 지도 넉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는 훈련에 우리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저녁시간 피엑스 흑백텔레비전에서 박건이 노래를 토해내고 있었다.

“루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처럼 봄비가 흘러내리듯....”

아, 그건 내 노래였다. 봄비가 흘러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요일, 나는 교회 갈 장병 나오라는 소리에 손을 들고 교회엘 따라갔다.

부대에 남아있으면 사역이나 할 것 같아서였다. 아니,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교회는 부대에서 좀 떨어진 마을에 있었고 교회 가겠다고 손을 든 신병들은 거기까지 대오를 지어 발을 맞추어 걸어갔다. 내가 그 때는 예수가 뭔지도 모를 때였으니 예배니 설교가 뭘 하는 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안 되었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예배당 바닥에 신병들 틈에 함께 앉아 그저 잠시나마 쉼을 얻은 그 시간에 속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앉아있었다.

고향을 생각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안동역 그 아우성 속에서 내게 꼬깃꼬깃 뭉친 돈 천오백 원을 던져주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영월화력에서의 추억과 또 떠나온 부산발전소와 감천합숙소를 생각했다.

동아대학교 캠퍼스에 피던 마로니에를 생각하고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아, 그녀를 생각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치는 서러움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그런 시간도 우리에겐 계속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취침시간이 지난 밤 열 한 시에 느닷없이 완전군장 선착순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배낭을 메고 M1 소총을 잡고 연병장을 낮은 포복으로 기었다.

수백 명의 신병들이 맨땅을 기니 흙먼지가 입과 코로 마구 들어왔다.

“이 새끼들 빨리 안 가? 똑바로 안 해?”

군홧발과 몽둥이가 배낭 위로 날아들었다. 배낭에 매달린 반합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훈련병을 치면 부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군홧발과 몽둥이로 배낭과 반합을 차고 두들기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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