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8

24 . 제대

그 때의 사병봉급(월급)은 이병 때 800원, 일병 때 900원, 상병 때 1,100원, 병장 때는 1,200원이었는데 내가 제대하던 해에는 조금 올라서 병장봉급이 1,560원인가 그랬다. 그 돈으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더러 PX에 가서 찐빵이나 깡통 막걸리 같은 걸 사먹기도 했지만 월급 받았을 때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훈련소에서부터 사병들에게는 화랑담배가 배급되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병에게는 건빵이 한 봉지 더 나왔다. 화랑담배는 처음에는 필터가 없었다가 나중에 필터가 달려 나왔는데 필터재료가 조악하고 쓴 맛이 나서 담배를 피우는 사병들은 사제담배를 사 피우기도 했다. 은하수 담배가 120원이었던가 했고 거북선 담배가 150원인가 했다. 더 싼 담배로는 ..

3. 군대생할 2022.05.01

23. 아버지의 면회

내가 군에 있던 3년 동안 딱 세 사람이 면회를 왔었다. 첫 번 째는 그녀가 김해공병학교로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간 것이었고, 두 번 째는 가평신병교육대로 어머니가 찐 통닭을 가지고 면회를 오신 것이었고, 세 번 째는 아버지께서 벽제 용미리로 찾아오신 것이었다. 내가 입대한지 이태 째 되던 해 여름 우리 부대는 벽제에서 북쪽으로, 공동묘지 조금 지나 용미리에 나가서 월남에서 돌아오는 백마부대를 위한 막사를 짓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지공사와 도로공사, 석축공사, 벙커 같은 것은 우리 부대 장비부와 작업중대가 직접 맡아 하고 막사와 건물 건축공사는 공영토건이 맡아서 했다. 우리 작전과도 공사현장으로 나가 텐트를 치고 상황실을 설치했다. 챠트병인 나는 상황판, 현황판을 열심히 만들어 붙였다. 용미리 마을 한..

3. 군대생할 2022.04.27

22. 동계훈련과 유격훈련

우리 102 야전공병대대는 도로공사, 벙커공사, 군부대 조성 및 막사 건설공사를 많이 했다. 74년 무렵부터 월남에서 맹호부대, 백마부대 같은 부대들이 대거 철수하여 귀국하였기 때문에 건물과 막사를 건축하고 연병장과 길을 닦는 부대조성공사가 많았다. 본부중대 수송부는 수십 대의 트럭과 덤프트럭 찦차들을 운용하는 운전병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장비부는 불도저, 그레이더, 페이로더, 트레일러 같은 중장비를 운용했다. 이들은 작업중대 병력과 함께 작업장에 투입되었다가 공사가 끝나면 차량과 장비를 끌고 복귀했다. 우리 부대가 맡은 공사는 직영공사와 도급공사로 나누어져서 진행되었다. 부지정지공사나 도로공사, 벙커공사 같은 건 직영으로 하고 건물과 막사를 건축하는 도급공사는 주로 한신공영이라는 민간회사가 맡았다. 전체..

3. 군대생할 2022.04.27

21. 아저씨 엎드려, 나 말 탈래

군수과 김 일병은 거의 날마다 군수과장 오 대위 집으로 작전(?)을 나갔다. 군수과장 오 대위가 김 일병을 ‘따까리’로 만들어서 자기 집에다 사역을 시킨 것이다. 오 대위 마누라는 방안에 누운 채 김 일병에게 물 긷기와 청소, 연탄 갈기, 밥 짓기, 설거지, 빨래까지 시킨다고 했다. 고참들이 김 일병의 이야기를 듣고 한 마디씩 했다. “야 이 씨팔, 아무리 군대라지만 엿 같다. 그래, 그 여편네 그냥 X으로 거기를 콱 찔러버려....” 가을 김장철이 되자 대대의 모든 장교부인들이 동원되어 벽제 여단본부장 댁에 김장사역을 나갔다. 때로는 우리도 차출되어 같이 갔다. 6655부대라는 공병여단본부의 군부대 같지 않아 보이게 함석판을 붙여서 만든 커다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원 스타 여단장 사택이 있었..

3. 군대생할 2022.04.25

20. 자대, 102 야전공병대대

가평 군단 신병훈련소에서 4주간의 ‘빡센’ 군기교육을 받은 다음 우리는 다시 자대로 돌아왔다. 자대인 102 야전공병대대는 의정부 북쪽 주내(샘내)의 도로변에 있었고 정문에 ‘제2908 부대’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부대 울타리는 간이비행장에 까는 구멍 뚫린 철판(이걸 무슨 플레이트인가 뭐라고 영어로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을 세워 이어 붙여서 둘러쳐 놓았고 그 위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넓은 부대 안 여기저기에 막사들이 기다란 드럼통 반쪽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부대에 복귀한 우리는 모두 열 명쯤 되었는데 대대 본부중대 인사계 사무실 앞에서 부대복귀 신고식을 했다. 하사관들과 선임병들이 우리를 차렷 자세로 세워놓고 두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치고 발차기를 했다. “옛,..

3. 군대생할 2022.04.25

19. 김해공병학교, 자대배치, 그리고 가평신병교육대

1973년 3월말쯤 우리는 6주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김해공병학교로 가게 되었다. 다시 5주간 후반기 야전공병 주특기 신병훈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새벽 2시쯤엔가 우리는 군용트럭에 태워져 안동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플랫폼으로 줄지어 걸어 들어갔다. 대구를 오가느라 내가 수도 없이 다니던 그 안동역 플랫폼. 그런데 그 어두운 새벽에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동생, 형,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사람들 틈에 어머니도 나와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내게 무언가를 던져 주셨다.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를 돌돌 묶은 돈 천오백 원이었다. “야야, 몸조심 하그래이, 집 걱정은 말고....“ 인솔하는 기간병들의 욕설이 날아들었다. “이 새끼들..

3. 군대생할 2022.04.23

18. 36사단 신병훈련소

군대....... 대한민국 남자들 이야기에 군대 빼면 뭐가 남을까? 1973년 2월, 부산화력을 떠나 고향 안동 36사단 신병훈련소에 입대하던 날 아침, 나는 옥야동 경안고등학교 앞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밀어요?” 이발사는 두 번이나 되물었다. “예, 밀어 주세요. 오늘 입대합니다.” 나의 무성한 머리가 바리캉으로 무참하게 잘려져 뚝뚝 떨어졌다. 내 머리를 밀던 이발사가 짓궂게도 좌측 절반만 밀어놓았다. 순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반은 나인데 반은 낯선 사내가 되어 있었다. 야누스 같았다. 오후 2시, 나는 안동 36사단 위병소에 도착하였다. 위병소에 위병을 서고 있던 군인은 하필 고등학교 동창생 익선이었다. “야, 익선아, 넌 좋겠다, 벌써 상병 달고 있구나.” 그 녀석은 나를 보더..

3. 군대생할 2022.04.23

17. 군입대

나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동아리 모임에 참가한 적도 없다. 학생데모도 여러 번 일어났지만 나는 그런 일에 나서거나 끼어들 입장도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면 발전소로 달려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놀기 좋아하고 게으른 나의 천성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퇴근하여 시간이 나면 잠을 자기도 하였지만 공부를 하다가도 합숙소 오락실에 나가서 당구도 치고 옆방 친구와 바둑, 장기도 두고 가끔은 화투판이나 포커판에 끼어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 재철이, 진동이, 해룡이, 종옥이랑 어울려 탁구장, 당구장도 다니고, 광안리 해수욕장, 해운대 해수욕장, 하단 에덴공원 찻집, 해운대, 태종대로 돌아다니고, 범어사, 밀양, 거제도 해금강에도 가보고, 여름방학 때는 학군..

3. 군대생할 2022.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