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독야근

13. 영월 처녀

Thomas Lee 2022. 3. 25. 20:25

일은 힘들고 험했지만 봉급은 많다는 게 위로였다. 2,500원의 벽지수당을 합쳐 약 2만 4~5천원 쯤 되었으니 만 18세 사회초년병의 봉급으로는 참 많은 셈이었다. 나는 봉급을 받을 때마다 하숙비 5,000원과 용돈 얼마씩을 떼어놓고 매달 1만 5천원의 거금(?)을 고향으로 부쳤다. 석 달마다 한 번씩 나오는 1만 5천 원가량의 보너스는 손도 안 대고 통째로 송금하였다. 우체국에 가서 송금할 때면 일하는 아가씨 앞에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영월에 있던 10개월 남짓 동안 내가 고향으로 보낸 돈은 17만원이 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부치는 이 돈으로 소 두 마리인가를 사서 시골의 아는 사람에게 맡기셨다. 소는 농사도 지으면서 잘 키우면 새끼도 낳아 늘어나니까... 아버지도 참, 지금생각해도 이재(理財)엔 밝지 못 하셨던 것 같다. 소 대신 땅을 사 두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시 영월읍의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영월 주변에는 많은 탄광과 시멘트 공장들이 있었고, 영월읍내에는 당구장도 몇 개 있었고 또 술을 파는 색시집이 많았다. 술집의 고객은 주로 인근의 탄광, 시멘트공장, 그리고 군청 직원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한전 영월화력발전소의 6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최대의 고객이었다. 조그만 영월읍내 거리에는 레코드 가게도 있었는데 '리베라이', '예스터데이' 같은 감미로운 번안곡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탄먼지 마신 데는 돼지고기와 소주가 최고여. 그래야 석탄가루가 씻겨나가.” 발전소 직원 고참 직원님들은 틈만 나면 영월읍내의 술집에 모였고 나도 불러내었다. 술자리에 나가보면 언제나 이삼십 명 되는 직원님들이 모여 있었다. 손님들과 같은 숫자의 색시들이 들어와 한 사람건너 한 사람씩 끼여 앉았다. 열아홉 살짜리도 곱게 한복을 입고 화장을 한 색시들, 아니 누님들 틈에 끼어 앉아서, 그 색시누님들이 춤추고 장구 치며 노래하는 걸 보면서 술을 마셨다,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연세가 아버지뻘이나 삼촌뻘은 족히 되는 선배 직원들은 우리 나이 어린 신입사원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료로 대해 주었고 하대도 하지 않으셨으며 술자리에 꼭 불러내어서 술과 돼지고기를 먹여 주시곤 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 했다. 그러나 고참 직원님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서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

 

나는 안동으로 갈 기회가 있으면 그 때마다 2리터짜리 됫병 안동소주를 두어 병씩을 사다가 고참직원님들에게 선물했다. 가방에다 커다란 소줏병 두어 개를 넣어 들고 가려면 꽤 무거운 짐이 되었지만 삼촌뻘, 아버지뻘 되시는 선배 직원님들이 “카아, 안동소주 맛 좋다. 절로 넘어가네.” 하면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안동을 갈 때마다 소주를 사오곤 했다. 그 때만 해도 안동에는 ‘제비원 소주’와 ‘금곡 소주’ 두 개의 공장이 안동소주의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축구를 좋아해서 아침마다 조기축구회에 나가신다는 김석두라는 이름을 가지신 고참 직원님은 술을 유난히 좋아하셨고 늘 술기운에 젖어 있으셨는데 내가 안동으로 간다면 꼭 안동소주 사오라고 부탁하시곤 했다. 아침에 나를 보기만 하면 얼굴을 찡그리고 배를 쓸면서 ‘어제도 술을 좀 마셨더니 속이 안 좋네.’ 하셨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셨으니 아마 오래 사시진 못 했을 것 같다.

 

하루는 한 고참직원님 집을 방문했는데, 그 분의 부인이 나를 보고 한 마디 하셨다. “영월 처녀 조심하세요. 이 곳 영월에는 총각으로 왔다가 총각으로 떠나는 사람이 없답니다.”

영월처녀들에게 발전소 총각은 최고의 신랑감이란다. 과연 나에게도 어느 날 영월처녀의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직원 한 분의 여동생 결혼식에 제천에서 있었는데, 회사버스를 타고 C계의 직원들이 전원 참석하였고, 결혼식이 끝난 다음 제천 의림지로 옮겨가서 흥겨운 가무 술판이 벌어졌는데 신부측 친구들 가운데 한 처녀가 살그머니 내게로 와서 전언을 했다. 한 처녀가 나를 잠시 보자고. 보트를 좀 태워주실 수 있느냐고 한단다.

나는 슬그머니 술판에서 빠져나와 그 처녀를 태우고 의림지 보트를 저었다.

엄영희라는 이름의 처녀.... 미니스커트가 멋지게 어울리던 아가씨였다. 보트를 타면서 우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는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직원들의 가무술판이 파하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마이크로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우린 둘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우린 그 뒤로도 자주 만나 손을 잡고 동강 낙화암으로, 청령포로, 장릉으로 쏘다녔다. 그녀는 밤에도 내 하숙집으로 놀러왔다. 스스럼없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 밑에 함께 발을 넣고 재잘거리다가 돌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쾌활하였고 재치와 애교가 넘쳤으며 언제나 대화를 즐겁게 이끌어가는 멋진 아가씨였다.

 

어느 날 그녀는 나를 영월읍내 다방으로 불러내더니 자기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인사를 시켰다. 그것은 나를 예비신랑으로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 그녀가 한 번도 내게 나이를 물어본 적 없고 나도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본 적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나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이고 그녀가 내 나이를 알면 떠나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나는 며칠 후 그녀를 읍내다방으로 불러내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내가 이제 스무 살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잠시 놀라는 듯 하더니 자기는 나보다 세 살 위라고 했다. 그녀는 갑자기 어른이 되었고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동생이 된 것처럼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위로해 주었고 그리고 나를 떠나갔다.

 

두어 달 지난 어느 날 나는 벚꽃 핀 공원에서 그녀가 어떤 다른 사내와 함께 데이트하는 것을 보았다. 그 사내는 나보다는 훨씬 나이가 든 늙다리 아저씨 같았다. 그녀는 그 사내에게 시집갔을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그녀, 50년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 팔십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을 그녀.....

 

영월에는 당구장도 몇 개나 되었고 비밀댄스교습소도 있었다. 나는 당구를 치러 읍내로 가끔 나갔다. 그런데 깡패들이 슬슬 다가와 시비를 걸고 술 사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 중 유난히 나를 찍어 집적거리는 수염이 시꺼먼 한 녀석이 있었다. 나는 당구를 치다가도 그 녀석이 나타나면 기회를 보아 화장실로 가는 척 줄행랑을 쳤다. 어느 하루는 우리 신입사원 몇이서 읍내에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깡패들이 대여섯 놈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꼼짝없이 잡혀서 놈들에게 술과 고기를 사줘야 했다.

"야,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엉?"

"아, 그럼요, 알지요. 앞으로 친하게 지냅시다요."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하면서 새벽까지 붙잡혀 있다가 그놈들이 마신 술값, 고깃값까지 지불하고 풀려나왔다.

영월은 원래 그렇게 험악했단다. 전에는 한전 봉급날이 되면 깡패들이 발전소 입구를 막고 버스에 올라 수금(?)을 하기도 했단다. 박정희 대통령이 소탕명령을 내려서 한 동안은 괜찮았는데 잡혀 들어갔던 놈들이 이제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와 다시 저런다고 하였다.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덕포리에는 고물 유성기를 틀어놓고 “슬로 슬로 퀵퀵”, 지루박, 부루스, 탱고, 차차차, 폴카 같은 춤을 가르쳐 주는 아줌마들이 있었다. 나도 명호와 함께 3천원인가 교습비를 내고 지루박, 부루스, 탱고를 배웠다. 한 달 동안 그 아줌마들에게서 춤을 배웠지만 그 후 평생 캬바레나 나이트클럽 같은데 가 본 적도, 그 춤을 다시 춰본 적도 없다.

 

영월화력에서의 힘들고 고달픈 석탄미분기 운전원 생활, 고참직원들과 어울려 다니던 술집, 혼자서도 가던 영월읍내 당구장, 아줌마 댄스교습소, 영월처녀와의 짧았지만 달콤하였던 데이트.... 이런 생활에 나는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산화력에 가있던 태수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부산에서 대학에 진학해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대근무를 하면서 야간에 일하고 주간에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료직원들에게 주간근무를 부탁하고 대신 그 사람의 야간근무를 해주면 좀 고달프고 힘은 들지만 학교는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뭐, 대학? 대학에 다닌다고?”

그건 충격이었고 내게 찬물을 끼얹듯 정신이 확 깨는 소식이었다.

“그래. 내가 영월 골짜기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나는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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