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20. 자대, 102 야전공병대대

Thomas Lee 2022. 4. 25. 21:19

가평 군단 신병훈련소에서 4주간의 ‘빡센’ 군기교육을 받은 다음 우리는 다시 자대로 돌아왔다. 자대인 102 야전공병대대는 의정부 북쪽 주내(샘내)의 도로변에 있었고 정문에 ‘제2908 부대’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부대 울타리는 간이비행장에 까는 구멍 뚫린 철판(이걸 무슨 플레이트인가 뭐라고 영어로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을 세워 이어 붙여서 둘러쳐 놓았고 그 위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넓은 부대 안 여기저기에 막사들이 기다란 드럼통 반쪽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부대에 복귀한 우리는 모두 열 명쯤 되었는데 대대 본부중대 인사계 사무실 앞에서 부대복귀 신고식을 했다. 하사관들과 선임병들이 우리를 차렷 자세로 세워놓고 두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치고 발차기를 했다.

“옛, 이병 ㅇㅇㅇ”

“이 새끼 복창소리 봐라.”

이단옆차기가 날아들었다.

“옛, 이병 ㅇㅇㅇ!”

나는 관등성명을 외치면서 옆으로 픽 쓰러졌다. 이단옆차기가 날아올 때는 꼿꼿하게 서 있지 말고 땅바닥에 픽 넘어져 나뒹굴어 줘야 한다는 걸 나는 재빨리 알아챘다.

 

그렇게 신고식이 끝난 다음 인사계에서 신상명세서를 쓰라고 하더니 중대로 배치했다.

학력이 좀 있는 놈은 본부중대, 안 그런 놈은 작업중대......

나는 글씨를 잘 쓴다고 본부중대 정보작전과 차트병으로 뽑혔다. 대학을 마친 익구도 같이 정보작전과에 배치되었고 함께 3년간의 군생활을 했다.

전남대학교 ROTC 4기라는 작전과장 이 대위는 퇴근하면서 차트를 만들라고 초안을 내게 던져주었고 나는 밤을 꼬박 새워 차트를 만들어야 했다. 아침에 다시 출근한 이 대위는 짜증을 내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똥대가리 새끼, 이것 밖에 못 해? 이게 챠트야? 챠트냐고.”

황당했다. 내가 한 번도 안 만들어본 챠트를 어떻게 제대로 만들 수 있나?

그렇게 똥대가리 취급을 받던 며칠 후 나는 다른 부대의 사병이 만들어놓은 차트를 처음으로 보았다. 챠트는 그냥 쓰는 보통 글씨로 쓰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 글씨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 차트 글씨는 저런 식으로 쓰는 거로구나.’ 그 챠트글씨를 흉내 내서 쓰기 시작하자 그 때부터 나도 곧 쓸 만한 차트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본부중대 내무반은 두 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동에는 인사과, 정보작전과, 행정과, 군수과, 그리고 통신과 사병들이, 다른 한 동에는 수송부와 장비부 사병들이 기거했다. 보통 군부대에는 내무반에 양편으로 마루 침상이 깔려 있는데 우리 부대는 기다란 드럼통 엎어놓은 모양의 철제 막사에 양편으로 출입문이 있고 개인별 철침대가 내무반 양편으로 놓여있고 침대 옆에 하나씩 관물을 넣는 철재 캐비넷들이 놓이고 내무반 가운데에는 난로가 놓여있었다. 전에 미군이 사용하던 부대라고 했다. 우리 전입 신병들은 그렇게 병영생활, 내무반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에 기상나팔이 울리면 우리는 본부중대 앞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북진통일"을 외치고 군가를 부르고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그리고 태권도 체조를 하였다. 저녁에는 내무반 청소를 하고 병기손질을 하고 관물정돈을 한 다음 점호를 받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 병장(이름이 김경언이었다고 기억된다)은 제대날이 가까워오자 지난 3년간의 군대생활이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며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졸병 때 매일밤 빳따로 얻어터지다가 월남에 지원해 가면 좀 나을까 해서 지원해서 갔더니 더 고생스럽고 비참하더라는 것이었다. 군기 빠진 우리 신병들의 군대생활이 너무 편한 것 같아 분하고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밤 통신과 이 병장과 함께 통신실에서 소주를 까다가 우리를 불러내어 술과 안주를 사오라고 했다. 부대 비행장 철판 울타리 뒤편 바로 너머에는 민가들이 붙어 있었고 구멍가게에서는 울타리 구멍으로 담배와 과자, 라면, 막걸리를 팔았다. 은하수 담배와 거북선 담배는 150원인가 그랬고 ‘라면땅’이라는 조그만 봉지과자는 10원인가 했다. 김 병장은 매일같이 우리 졸병들에게 술과 안주를 사오라 시켰는데 졸병들에게 그렇게 끝없이 술값을 댈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김 병장이 우리를 불러내어 으슥한 통신실 안에서 두들겨 팼다. 우린 엎드린 채 철항이라고 부르는 철조망 쇠막대기로 빳다를 맞았다. 허벅지에 떨어지는 쇠막대기는 살점을 파냈고 맞는 순간 다리가 감전 당한 개구리처럼 오그라들었다. 쇠막대기의 모서리가 다리의 신경을 끊어버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쇠막대기로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바닥에 뻗어서 한참을 버둥거렸다.

“이 새끼, 엄살 부리네? 다시 엎드려. 똑바로 못 해?”

신 이병은 우리 내무반 막내둥이였다.

“서울은 지금 몇 시인가?”로 한 때 유명했던 신흥재벌과 이름이 같다.

“아이구 아야, 오매, 나 죽네...”

신 이병은 쇠막대로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야 이 새끼, 똑바로 엎드려. 못 엎드려?”

김 병장은 철항으로 다시 신 이병을 내리쳤다. 신 이병은 철항을 막으려고 팔을 쳐들었고 철항은 그대로 그의 팔을 때렸다.

신 이병은 팔을 감싸 안고 눈을 뒤집은 채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고, 폴이야! 아이고, 내 폴, 아이고, 내 폴, 내 폴...”

보다 못 해 익구가 나섰다.

“김 병장님,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

“뭐, 이 새끼 봐라? 너 통뼈야? 어디 죽어볼래?”

 

이튿날 선임하사가 우리가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고서 물었다.

“야, 너희들 걸음걸이가 왜 그래?”

익구가 우리가 구보훈련 하다가 발꿈치에 물집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그 못 된 김 병장이 제대하는 날 나와 영건이랑 몇 명이 위병소 옆 울타리 쪽으로 갔다. 김병장이 개구리복이라고 부르는 제대복을 입고 위병소를 나가 저만치 가고 있을 때 영건이가 조그맣게 소리를 쳤다.

“야, 경언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김 병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영건이가 다시 소리를 좀 더 높여 한 마디 날렸다.

“경언이 이 씨발놈아,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

김 병장은 잠시 멈칫 서서 우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부대 밖으로 사라져갔다.

신참이 고참을 골탕 먹인 일도 있었다. 술을 마시면 보통 막걸리나 소주, 소주에 환타를 섞은 혼합주였고 안주는 라면 안주였다. 고참들이 짓궂게 신참들에게도 깡술을 먹였는데 한 번은 사달이 났다. 술에 취해 뻗었던 신참이 밤중에 변소에 간다고 일어나서 고참의 관물대 캐비넷 문을 열고 시원하게 소변을 본 것이다. 봉변을 당한 고참도 어이가 없었던지 웃고 넘어갔다.

 

내 기억에 이 부대에서 내가 복무하는 동안 모두 열 한 명인가의 탈영자가 있었다. 어떤 사병은 부대 뒤편 무덤의 묘석 위에 제 손을 얹어놓고 M1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은 다음 헌병대에 이첩되어 남한산성 영창으로 끌려갔다. 내가 고참이 되었을 때 우리 분대에서도 한 녀석이 외박을 갔다가 애인이 변심했다고 미귀(부대에 돌아오지 않고 탈영)한 일이 있었다. 즉각 탈영보고를 해야 원칙인데 내가 인천까지 가서 그 녀석을 찾아서 데리고 왔다. 그 녀석이 순순히 따라왔으니 망정이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녀석을 못 데리고 왔더라면 나는 물론 소대장 중대장까지 작살날 뻔 한 모험이었다.

 

내가 병장이 되어 제대를 얼마 안 남겨놓았을 때 어느 날 나이가 서른일곱인가 서른여덟 살이라는, 우리 삼촌뻘쯤 나이가 되는 사내가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입해왔다. 그 때 내가 내무반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사내에게 어찌하여 그 나이에 군대에 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사내는 이등병 때 탈영하여 십 오 년 넘게 숨어살았고 그 동안 결혼하여 아이도 낳았는데 병역미필자라 아이들 출생신고를 못 하고 있다가 아이들이 취학연령이 되자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자수하여 남한산성 영창을 거쳐 여기로 왔노라고 한숨을 섞어가며 신세한탄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 이등병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문제될까 걱정했지만 부대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없이 넘어갔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었을까?

 

부대 뒤편에는 사격장이 있었고 그 옆으로 불국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도랑이 우리의 세탁장이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군복과 내의와 양말을 빨았다. 군복은 빨 때마다 군복에서 빠진 물로 도랑물이 시퍼렇게 되었다. 처음 지급 받을 때 녹색이던 군복이 한 번 빨면 연두색이 되고, 두 번 빨면 누렇게 되었고, 세 번 네 번 빨면 허옇게 되어 버렸다. 내 기억에 윤필용 장군이던가가 군복 납품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뉴스를 본 것이 입대하기 직전이었는데, 그 때문이었던지 우리는 물 빠지는 군복을 참 오랫동안 입어야 했다. 전쟁이 나면 이 허연 군복을 입고 전투를 해야 하나?

 

우리는 외출, 외박증을 받아 부대 밖으로 나갈 때면 허옇게 물 빠진 군복에 풀을 먹이고 줄을 세워 입고 나갔다. 허연 전투복 위에 또 물 빠진 허연 국산 야전잠바를 입기가 뭣해 우린 거금 몇 백원씩 주고 미군 야전잠바를 구해 허연 전투복 위에다 덮어 입었다. 미군 야전잠바는 우리의 모습을 제법 근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입대한 지 2년 쯤 지나서야 물이 안 빠지는 혼방사 군복이 지급되었다. 나중 내가 제대하고 나서 도로공사 사장이 윤필용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도로공사 사장이 되었는지, 동명이인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외출이래야 위수지역이라 하여 의정부나 법원리 일대에까지만 갈 수 있었다. 외출을 나가면 헌병이 어디 있나 살피면서 다녔다. 헌병한테 걸리면 복장불량, 군기불량으로 100원 정도는 기본으로 뜯겨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 헌병이 보여 골목 안으로 재빨리 도망쳤는데 골목 끝에 나오니 그 헌병이 골목 입구를 딱 지키고 있었다. “이 시키, 어디로 도망을 가?” 할 수 없이 100원을 뜯겼다. 군생활 3년 동안 세 차례 휴가를 받아서 고향으로 갔는데, 그 때도 그랬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갈 때도 우리는 열차 안에서 헌병에게 복장검사를 받고 얼차려 기합을 받고 100원씩 바쳤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동역에 내리니 개찰구에 헌병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도착한 장병들을 모두 연행하여 헌병초소로 데리고 가서 단체로 복장검사를 했다. 또 100원씩 내고 석방되었다. 그 뿐 아니라 어리숙한 군인들을 공갈로 등쳐먹으려고 군복을 입고 헌병복장을 한 가짜군인들이 역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훗날 내가 제대한 후 한 번 열차 안에서 내 나이또래의 젊은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부산에서 안동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군대에서 헌병이었다고 했다. 청량리에서 부산까지 열차를 타고 검문검색하는 일을 했는데 청량리에서 부산까지 한 번씩 내려가고 올라갈 때마다 휴가병들로부터 그런 식으로 뜯어내는 돈이 쏠쏠했단다. 뜯어내는 돈의 3분의 2 가량은 상납을 하고 나머지는 모았는데 제대할 때 제법 큰돈이 모여 그걸로 의류가게를 얻어 옷장사를 한다고 했다. 남자바지를 도매상에서 천원쯤에 떼어 와서 2천원도 받고 4천원도 받는단다. 그런데 바지가 싸면 잘 안 팔리더란다. 4천원 정가표를 떼고 8천원 정가표를 붙였더니 더 잘 팔리더란다. 그 친구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고 있겠지?

 

군부대 안 한쪽 구석에는 세탁소와 이발소, 그리고 보안대 사무실이 있었다. 보안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우리부대 소속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안대는 헌병보다 더 무섭게 굴었다. 전화를 좀 늦게 받았다고 때려죽이겠다고 뛰어내려왔다. 나는 그 보안대 하사만 보면 도망을 쳤다. 보안대에서 글씨를 잘 쓴다고 나를 불러서 보안활동보고서를 대신 쓰게도 했다. 보안대의 활동은 군부대 안에만 국한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에게 대필을 해 달라는 보안대 군인은 의정부의 한 민간인 몇 명을 사찰, 감시한 내용을 불러 주면서 쓰라고 했다.

“김 모씨는 몇 월 며칠에 이웃집 사람들과 함께 막걸리 회식을 했습니다. 유신반대의사를 나타내는 듯 한 발언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계속 감시, 예의주시하겠습니다.” 사찰은 무슨 사찰? 창작소설이지.......

 

자대에서는 훈련소처럼 그토록 심하게 배고프지는 않았다. 식사시간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식사시간에는 식당 안에 패티김과 김추자의 노래가 울려나왔다. 그러나 그래도 먹는 게 부족하여 배가 고팠기 때문에 우리는 밤에 취사장에서 보초를 설 때는 취사장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식판에 남은 밥을 반찬도 없이 훔쳐 먹고는 했다.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군수과에서 ‘부식추진’이라는 붉은 글씨로 간판을 매단 트럭으로 법원리에 있는 127대대로 부식을 수령하러 갔다. 나도 몇 번 사역병으로 차출되어 간 적 있다. 트럭 뒤 칸에 앉아 모처럼 부대 밖 도로를 달리니 일단 기분은 좋았다. 부식추진 트럭은 배추와 무, 파, 감자 같은 부식재료들과 고기,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것을 수령하여 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냥 돌아오지 않았다. 대대장 집에 들러 큼지막한 소고기 뒷다리 한 덩어리를 내려 드리고 인사계 집에 들러 20 리터짜리 큼직한 된장 깡통을 내려드리고 군수과장님 댁에 또 들른 다음 부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