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독야근

15. 동아대학에 들어가다

Thomas Lee 2022. 4. 18. 13:16

감천 동네에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서대신동에 있는 한 대학입시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부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고를 다니면서 고등학교 교과과정도 제대로 못 밟은 데다 석탄미분기 운전을 하고 보일러 버너 작업을 하면서 2년 가까이 지나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려니 모든 게 어설프고 설게 느껴졌다. 대학입시가 몇 달 남지도 않아 마음만 급했지 강사가 열심히 떠들어대는 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예습이나 복습도 도무지 되지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기술전공부라는 특수반에서 배운 게 줄질, 대패질, 땜질, 제도 그리고 기계공작, 기계재료, 재료역학, 유체역학, 원동기 같은 전공과목이 거의 전부였던 내게는 영어, 수학, 국어과목이 새삼 멀게 느껴졌고 공고에서는 구경도 못 해본 지학이니 생물 같은 과목들은 중학교 때 배웠던 물상과 생물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고출신이니까 예비고사 실업과목으로 당연히 공업을 선택해야 하나 했더니 공업에는 기계분야만 아니라 전기, 화학, 토목, 건축, 자동차, 방직 분야까지 망라되어 출제되고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공고출신은 아예 대학진학 꿈도 꾸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실업과목으로 중학교 때 배운 농업을 선택했다. 중학교 때 배운 걸로 대학예비고사를 본 셈이다. 나는 어쨌든 그 해 예비고사에 합격하였다. 1971년도 전국 대학입학정원은 1만 3천 명에 불과하였고 예비고사로 입시정원의 1.5배인 1만 9천 명 정도를 합격시켰으니 예비고사가 우리에게는 쉬운 관문이 아니었다. 부산화력에서 함께 일하면서 예비고사에 응시한 30여명의 공고출신들 절반 이상이 예비고사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대학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나는 예비고사에 합격하고 전기모집대학인 부산대학교에 응시하였는데 총점은 합격점수를 넘겼지만 수학과목 과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수학과락이 없는 문리대쪽을 택하였더라면 합격하였을 텐데 공대 기계과를 택하는 바람에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후기인 동아대학교 공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태어나서 시험에서 떨어져 보긴 처음이라 서운하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싶었다. 부산대학교에 합격했었다면 아마 도중에 체력이 달려 학교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부산화력발전소에서부터 부산대학은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부산 이 끝에서 저 끝이었다. 감천동에서 송도고개를 넘고 남포동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부산역, 부산진역, 범일동, 서면 로터리, 동래... 길다란 부산 시내를 통과하고 동래 온천장 동네를 지나 동래산성 밑에 있는 부산대학교까지 가는 길은 백리길, 40 ㎞는 족히 되는 것 같았고 시내버스 편도소요시간만 2시간이 넘었으므로 회사 교대근무를 하면서 그 먼 곳의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부산화력에 근무하면서 부산대학에 들어간 몇 친구들 중에 체력과 끈기가 워낙 좋아 탱크라고 불리던 태수랑 성갑이 외에는 모두 학교를 마치지 못 하고 중도에 그만 두었다.

 

어쨌든 나는 예비고사를 통과하고 동아대학교에 들어가 발전교대근무를 하면서 기계공학과를 다녔다. 69년에 졸업하고 71학번이 된 것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아버지께서 몹시 기뻐하셨다. 안 그래도 대학 보낼 처지가 안 되어 공고를 보내고 한전에 넣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당신의 큰 아들이 몹시 안쓰러우셨을 터였다. 어머니는 나의 대학합격축하차 부산으로 내려오셨고 아버지는 입학금은 당신이 내시겠다고 8만 3천원인가 되는 입학금을 어머니 편으로 보내오셨다. 당시 나의 월급이 2만 5천원도 안 되었으니 8만 3천원의 입학금은 사실 거금이었고 큰 부담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내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 옛터골 산골짜기에서 나고 자라신 내 아버지는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으셨고 안동사범학교에 1회로 들어가 졸업하시고 국민학교 교편을 잡으시면서 교사의 박봉으로 우리 다섯 남매를 키우셨다. 우리는 안동군 국민학교 여러 곳을 전근 다니시던 아버지를 따라 산골짜기 학교로만 다녔는데 내가 다닌 산골짜기 학교 4곳 중 3곳이 지금 안동댐과 임하댐 물속에 잠겨있다.

 

일곱 식구 생활을 아버지의 봉급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시골장터를 따라다니며 옷 보따리 장사도 하고 안동시내 장터에 기름방을 차려 기름틀을 짜는,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 드는 일도 하셨다. 교직원 자녀라 하여 학교에 내는 공납금에서 기성회비는 면제되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봉급으로 다섯 남매 공납금을 감당할 수가 없어 우리는 공납금을 제 때 못 내어 학교에서 집으로 쫓겨 돌아온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렇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내게 공고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전쟁이 나고 김일성이 쳐내려와 빨갱이 세상이 된다 해도 기술자는 안 죽인다. 공고 나와서 기술자 되는 게 제일 안전한 길이다.” 대학을 보낼 형편이 도저히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대구공고에 원서를 냈다. 대구공고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업입국 시책에 따라 기술전공부를 만들고 15등까지 국비대여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나는 몇 등인지는 모르지만 15등 이내로 합격하여 기술전공부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장학금은 분기마다 2,500원씩 나왔는데 그걸로 공납금이 충당되고 약간 남는 정도였다. 나는 대구 신암동에서 처음 두어 달 하숙을 하다가 아버지의 몇 천원 밖에 안 되는 박봉에서 3,000원이나 되는 하숙비를 낸다는 것이 너무 죄스러워 학교 공장에 야간경비원 식으로 들어가 공장에서 밥을 해먹고 공장 작업대 위에서 잠을 잤다. 여름철 밤 학교는 온통 모기투성이였다. 학교공장 천장은 왱왱거리는 수백, 수천 마리의 모기들로 가득했다. 모기장도 없이 작업대 위에 자면서 나는 얼굴과 팔다리를 보자기로 감싸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잠들었다가 갑갑해서 나도 모르게 벗어던져버리고 갑자기 얼굴에 숯불을 확 끼얹는 듯 한 뜨거움을 느끼며 얼굴을 감싸쥐면 손바닥에 모기들과 모기들의 피, 아니 모기들에게 빨린 나의 피가 시뻘겋게 묻었다. 평생 모기에게 물릴 걸 그 때 다 물렸다. 나는 다시 학교에서 나와 영석이와 함께 측후대 뒤편 6.25촌, 폐지 주워 생활하는 양아치 마을이라고 부르는, 흙벽돌로 옹기종기 집을 지은 마을에 들어가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 졸업할 때까지 신암동 일대에서 숙근이와, 또 승갑이와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연탄불을 갈고 냄비에 밥을 짓고 된장에 파 두어 쪽과 멸치 몇 개를 넣어 끓인 된장국과 김치가 단골메뉴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고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안동 녹전국민학교에서 교감으로 계시던 아버지는 사직을 하고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으로 안동시내 태화동 삼거리에 약국을 차리셨다. 내가 어릴 적 심하게 아픈 바람에 교편을 잡으시면서 일본어로 된 의학책으로 틈틈이 의학공부를 하시고(난 여태 그렇게 두꺼운 책을 본 적이 없다.), 그 바람에 시골학교를 전전하시면서 양호교사를 겸하게 되시고, 그러다가 무의촌 산골마을 사람들이 다치거나 병이 나면 모두 아버지를 찾아오는 바람에 졸지에 시골 의사노릇까지 해야 했던 아버지가 결국 사표를 내고 그 양호교사 겸 무면허 시골의사 경험으로 약국을 차리신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집안경제사정은 아버지가 교편 잡으시던 때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진작 그렇게 하셨더라면 나는 공고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우리는 선반 같은 공작기계를 돌리면서 기계기름으로 새까매진 손을 수돗가에서 빨랫비누로 씻었다. 겨울철에 찬물에 빨랫비누로 손이 제대로 씻길 리 없어 손톱은 항상 새까맸다. 그 수돗가는 학교 정문 바로 옆에 있었고 게시판이 그 옆에 서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그 게시판에 공고졸업생 모집공고가 붙었다.

“대구철공소 일당 90원”,

“무림제지 일당 100원“,

”제일모직 월 급여 4,000원“,

지금도 눈에 선한 구인광고들의 내용이다.

그제야 직업훈련을 받아온 공고졸업생의 진로가 우리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니 일당이 90원? 100원? 하숙비도 안 되는 그 돈으로 어떻게 살라고?”

 

나는 창동이와 함께 우린 취직하지 말고 대학에 진학하자고 의기투합하였다. ‘그래, 부모님이 가난하다고 대학 갈 길이 없겠냐, 안 되면 사관학교나 해양대학에라도 가자,’ 둘은 그 때부터 학교의 실습시간과 공업전공과목시간의 수업을 거부하고 진학준비를 시작하였다. 선생님들도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하지는 못 하셨다. 나는 한 달에 200원이나 되는 학원비를 내고 신암동에서 삼덕동까지 10리길을 걸어서 학원에도 다녔지만 그러나, 기울어진 학력의 차이를 고3이 되어서 극복하기란 이미 글러버린 다음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연탄불에 밥을 지어 김치나 무말랭이 같은 반찬으로 도시락을 만들어 싸들고 학교에 갔다가, 수업을 마치면 십리길이나 되는 삼덕동으로 부지런히 달려가서 학원공부를 하고 밤 열 한 시나 되어 자취방으로 돌아와 연탄불 갈고 쓰러져 자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코피를 쏟기 시작하였고, 하늘과 세상이 노란빛으로 바뀌면서 나를 태우고 둥실둥실, 빙그르르 떠나는 때가 종종 생기기 시작하였다. 왕성하게 자라던 키가 딱 멈추어버린 것도 이 때였다. 여름방학 때 반쪽이 되어 집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겁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학교 게시판에 붙었던 입사모집광고 이야기를 해 드리고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대학을 가겠노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오자, 선생님께서는 한국전력주식회사가 공업고등학교와 공업전문학교 졸업예정자를 모집한다면서 평균성적이 80점을 넘는 사람만 원서를 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전력 입사를 목표로 공부하고 준비해온 녀석들이 우리 반에도 많았다. 그 전해이던가 한전에 입사한 선배가 학교에 와서 한전이 얼마나 좋은 회사인지, 한전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한전 자랑인지 특강인지를 하고 간 뒤로 많은 급우들이 한전을 선망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60년대말 그 시절, 아직 삼성이나 현대나 대우 같은 기업들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큰 기업이라면 충주비료공장, 대한석탄공사, 대한중석공사 같은 국영기업, 그리고 대구지방에서는 제일모직이나 무림제지 같은 회사들이나 알려진 시절이었으니 그 선배가 와서 늘어놓은 한전 자랑, 금방 입사한 자기의 봉급이 우리 선생님 보다 훨씬 많다는 자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러나 나와 창동이는 3학년이 되고서 공장실습과 전공과목을 포기하고 있었고 한국전력이 신입사원을 뽑든 말든 관심도 두지 말고 오로지 대학을 목표로 하자고 다짐을 해 온 터였다.

 

그런데 신문공고를 보고 아셨는지,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께서 학교로 찾아오셨고 대학진학을 고집하는 나에게 일단 한국전력에 시험이라도 보라고, 대학은 그 다음에라도 준비해서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달래셨고, 다음날 이용고 담임선생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내게 한국전력 입사시험을 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석차순으로 매겨지는 성적증명서가 점수를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에 아버지의 청을 들은 선생님이 궁리 끝에 점수를 80점으로 기재하여 원서를 내 주신 것이었다. 시험날이 겨우 일주일 남아 있었다. 나는 벼락치기 시험준비를 시작하였다. 할 수 있는 준비라야 그 동안 처박아 두었던 기계공작, 재료역학, 기계재료, 원동기 같은 전공과목 책들을 꺼내 쌓아놓고 읽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포장에 올빼미가 그려진 잠 안 오는 약을 사서 먹어 보았는데 잠을 견디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지만 위장을 몹시 상하였던지 나중에 배가 오랫동안 아팠다.

 

나와 함께 자취하던 대구상고에 다니던 승갑이도 한전에 원서를 내었고 우리는 함께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승갑이네 친척집에 이틀 밤을 자면서 입사시험을 보았다. 부산에서 전차를 처음 보았고 우리는 부산상고에서 입사시험을 치렀다. 한국전력의 기술직원 채용고시는 학력차별 없이 공고졸업생과 공전졸업생 구분 없이 똑같은 문제를 놓고 똑같은 조건으로 시험을 보았고, 똑같이 성적순으로 합격여부를 가려졌다. 기계과의 경쟁률은 13대 1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막상 합격자발표 때, 한전입사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 온 여러 급우들은 떨어지고 미안하게도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끼여 있었다. 영남지역에서 공고, 공전 모두 합하여 기계분야에 13명이 선발되었는데, 이 13명에 우리 반 아이들 다섯 명이 들었고 그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 내가 합격한 것은 나도 놀랐지만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놀란 일대사건이었다. 나와 같이 자취를 하던 대구상고 승갑이는 떨어졌다.

 

그렇게 한전에 입사하여 쌍문동 연수원교육가 마산화력 수습교육을 받고 영월화력 석탄미분기 운전원을 하던 아들이 부산화력으로 옮겨서 이류 지방대학이긴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주었으니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 하여 공고에 보내셨던 아버지는 얼마나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더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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