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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식 공정관리와 세계 최저가 원전건설

우리나라의 80년대는 실로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 건설의 전성기였다. 78년에 고리 1호기가 준공되고 5년 뒤 83년에는 고리 2호기와 월성 1호기가 준공되었다. 고리 1, 2호기는 웨스팅하우스, 월성 1호기는 캐나다원자력공사(AECL)가 건설하여 한전에 열쇠를 넘겨주는 턴키(Turn Key)방식이었다. 이후 고리 3,4호기부터는 한전이 건설공사의 주인이 되어 난턴키(Non Turn Key)방식으로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85년 고리 3호기, 86년 고리 4호기와 영광 1호기, 87년 영광 2호기, 88년 울진 1호기, 89년 울진 2호기, 그야말로 해마다 원전이 잇달아 난턴키 방식으로 준공되었다. 원전의 잇단 준공으로 대한민국의 전력단가는 80년대의 엄청난 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떨어져 82년 kwh..

49.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어떻게 건설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기초과학부터 첨단기술까지, 토목공사로부터 정밀기계와 컴퓨터까지 포함하며, 과학기술 뿐 아니라 금융, 법률, 상거래, 사무, 인력관리 등, 모든 경영분야를 망라하는 기술과 자본, 인력의 총력전이며 거대하고 치밀한 경영매카니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자력건설에 종사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인들은 자기분야의 일은 잘 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프로젝트는 어렵다. 단독으로는 뛰어난데 협업은 약한 것이 한국인들이 아닌가 싶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핸드폰 분야에서 세계정상급 수준에 있지만 발전소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복잡한 설비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해낸 것은 서양인들이다. 증기기관차부터 시작..

48. 원전건설현장 기계기술계장

영광 1,2호기 건설공사는 순조롭게 시작되지 않았다. 내가 초임계장으로 본사 원자력건설부에서 일하던 1981년, 현대양행이 쓰러지고 전두환 국보위가 나서서 현대 정주영 회장과 대우 김우중 회장을 불러놓고 누가 자동차를 하고 누가 발전설비를 할 테냐 하는 빅딜을 시도하였을 때 영광 1,2호기, 곧 원자력 7,8호기의 건설공사는 정지작업과 굴토, 그리고 기초콘크리트 작업이 진행되던 초기단계였다. 그 때 정주영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자동차를 하겠다,’, ‘발전설비를 하겠다,’, ‘아니다. 도로 바꾸자,’면서 몇 차례 번복하고 오락가락하였고 영광건설현장에서는 회장님들의 말 한 마디에 현대와 대우가 불도저를 몰고 건설현장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들락날락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한 적이 있다. 인근 주민들의 반감도 심했..

47. 십자가 네 개, 10월 10일 10시 10분

내가 쌍문동 연수원에 초급간부교육을 받기 위하여 입소한 것은 1983년 8월 하순이었다. 잊을 수 없는 일이 그 때 일어났다. 바로 9월 1일에 전해진 KAL 007기 격추사건이다.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그 날 아침 전해진 엄청난 뉴스는 그야말로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소련공군기의 미사일에 맞아 269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국화꽃잎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할린 검은 바다에 떨어진 사건...... 아무리 공산당 유물사관으로 인간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저들이라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밤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미사일로 피격되던 그 순간, 그 미사일은 비행기의 어느 부분에 맞았을까? 미사일이 폭발한 순간 그 자리와 그 근방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행기는 동강이 났을까, 큰 구멍이 난 채..

46. 보조기기 구매 기술업무

다시 서울생활, 본사생활이 시작되었다. 홀아비 도시락 싸들고 아리조나 사막길을 달려 건설현장으로 가다가 이제 아내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잠실에서부터 버스가 내뿜는 매연을 마시며 회사로 출근하는 그 생활로 돌아간 것이었다. 본사는 그 때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맞은 편 한라빌딩에 입주해 있었다. 그 무렵 고리 3,4호기 건설공사는 중반에 접어들어 한창 진행중이었고 영광 1,2호기 공사는 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고리 1호기 복수탈염설비는 내가 귀국하기 얼마 전인 1982년 6월말 30개월 공사기간 계획대로 완성되어 계통에 성공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대우엔지니어링 염B 상무님이 내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보고(?)를 해 주셨다. “고리1..

45. 미국아, 잘 있거라.

피닉스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짐을 싸고 살림살이를 정리하였다. 이민백에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많은 물건들을 버려야 했다. 벡텔사가 한아름씩 안겨준 교육훈련교재도 너무 많고 무거워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덟 달을 신었지만 아직도 새것 같은 아까운 안전화는 누구 신을 사람 있으면 신으라고 쓰레기장 앞에다 고이 갖다 놓았다. 키우던 선인장 화분도 거기 갖다 놓았다. 가방과 이민백 안에는 카메라와 라디오와 밥솥과 사진들과 환등기 필름들을 챙기고 입던 옷과 선인장 그려진 티셔츠도 챙겨 넣었다. 여덟 달 가까이 우리를 태우고 다닌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는 ‘For Sale"종이를 붙이고 다녔지만 끝내 사는 사람이 없어 내가 몰고 LA까지 가기로 했다. 우리는 팔로버디에서 정들..

44. 미친 서부일주여행

7월이 되고 8월이 되자 피닉스의 태양은 더욱 뜨겁게 타올라 사막과 사막의 선인장들과 또 건설현장을 달구었고 들판의 농작물은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우리의 훈련기간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한 달 남짓이면 해외훈련도 끝나고 귀국해야겠지. 그러면 언제 다시 미국에 올 수 있을까? 귀국하기 전에 미국 구경을 더 해보고 싶었다. LA사무소 김계장님 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우리도 하계휴가 한 주일 낼 수 있습니까?” 김계장님은 별 문제 없으니 알아서 하란다. 나와 한 방을 쓰는 장o씨와 또 LA에 있는 양o씨가 의기투합하여 서부일주여행을 하기로 했다. 한 주일 휴가를 내면 토요일과 일요일이 앞뒤로 붙어서 9일간의 여행이 가능했다. 지도를 펴놓고 LA에서 요세미티 국립공원, 옐로우스톤 국..

43. 팔로버디의 친구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미국인 친구들이 욕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 나와 단짝친구가 된 Paul Horn도 그랬다. Paul이 나에게 가르쳐 준 욕들 중에 쇠똥(Bull Shit)이나 개자식(Son of Bitch), 시발(Fuck) 같은 욕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더 심하고 노골적인 욕들도 많았다. 한국에도 입에 담지 못 할 육두문자 욕이 많지만 미국의 욕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욕을 무슨 씨리즈처럼 만들어 자동으로 연속적으로 발사했다. Paul은 나와 나이가 비슷했고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백인이었는데 텍사스에서 한 여자와 함께 살다가 헤어진 다음 자동차를 몰고 아리조나로 혼자 왔단다. 나와 Paul은 건설현장에서도 같이 일했지만 퇴근한 다음에도 만나서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나를 말경주장과 개경주장에 데리..

42.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

팔로버디 원전은 1,300 MW급 3기로 미국에서 가장 큰 단위용량을 가진 원전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운전초기에는 전기출력이 127만 킬로와트 정도였으나 나중에 설비개선을 하여 지금은 전기출력이 140만 킬로와트나 나온다고 한다, 팔로버디 원전의 원자로설비(NSSS)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 CE), 터빈발전기는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이 공급하였으며 앞서 말한 대로 벡텔사가 설계와 시공을 맡았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물이 없는 내륙 사막에 건설된 원전인 팔로버디 원전은 피닉스로부터 하수를 끌어다 정수처리하여 사용하는데 냉각탑에서 증발되어 날아가는 물이 워낙 많기 때문에 피닉스로부터 끌어오는 하수의 양이 1년에 약 1억 톤에 달하는 것으..

41. 피닉스의 홀아비들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쌀을 씻어서 LA에서 사온 코끼리밥솥으로 밥을 지었다. 네 사람이 다 요리에는 젬병이라 채소와 고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썰어 넣고 된장이나 간장을 넣고 물을 부어 끓였다. 국인지 찌개인지 제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큰 문제없이 입에만 들어가 주면 되었다. 콩에다 간장과 물을 부어 끓이거나 햄이나 소시지에다 간장을 부어 조리거나 아무튼 짭쪼롬하게 만들어 김치와 함께 밥반찬을 삼았다. 그걸로 아침식사를 하고 또 도시락을 쌌다. 건설현장에는 점심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사먹을 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꼭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더러는 햄과 빵으로 도시락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역시 밥이 최고였다. 네 홀아비들이 함께 사는 10개월 동안 그런 식의 어설픈 요리와 식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