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독야근

16. 발전소근무와 대학공부

Thomas Lee 2022. 4. 18. 13:17

그렇게 나는 한국전력 직원이면서 동아대학교 학생이 되었다. 그 때 부산화력에는 나 말고도 그렇게 학생이 되어 근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직원들이 30여명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대학에 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다. 공부하겠다는 기특한(?) 젊은이의 앞을 가로막기도 어려웠을 게다.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우리는 주로 낮근무(Day Shift)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그 사람의 야간근무(Night Shift, 또는 After Shift)를 대신 해주었다. 대근을 부탁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밤근무 보다 낮근무 하는 게 낫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별 말없이 못 이기는 체 선심 쓰듯 근무를 바꾸어 주었다. 발전소에서 밤 11시부터 아침 8시까지 근무를 하고 낮에 학교에 다니면서 졸음과 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간근무 때 발전소 중앙제어실(일명 배전반)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로컬에서 근무하는 운전원들은 요령껏 벽에 기대거나 책상에 엎드려서 혹은 으슥한 구석에서 요령껏 도둑잠을 잤다.

 

당시 전국의 하루 전력소비곡선은 대략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전력소비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오전에 최대부하 근방까지 갔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전력수요가 잠시 떨어졌다가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시 전력수요가 늘어 최대수요 근방으로 올라가고 이 전력수요가 오후 내내 계속되다가 저녁을 지나고 10시, 11시를 지나면 수그러들고 자정을 지나 새벽 한 시쯤 되면 한낮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전국의 발전소들은 본사 중앙제어실의 전화명령에 따라 출력을 높이고 낮추었다. 본사 중앙제어실과 전국의 각 발전소를 연결하는 전화는 송전선을 이용하는 반송전화 혹은 캐리어라고 부르는 전화기였다. 밤중이 되어 부하가 낮아지면 발전소의 출력이 낮아지고 펌프, 송풍기, 열교환기 등 모든 기계들도 동력을 낮추어 조용히 돌아간다. 그러면 우리는 기기점검을 끝내고 나서 보일러실에 모여 라면을 끓여 밤참을 먹었다. 별일 없으면 아침 여섯 시 무렵까지 몇 시간 동안은 발전소도 조용히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니크롬선 전기 곤로에 알루미늄 냄비에 물을 담아 얹고 물이 끓으면 삼양라면을 뜯어 넣었다. 달걀을 깨어 넣기도 했다. 그 때의 냄비는 모두 알루미늄 냄비였다. 끓인 라면에서 금속냄새가 났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알루미늄이 치매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나중의 일이다.

 

발전소 출력도 낮아지고 온 세상이 고요히 잠들면 직원들은 보일러실에 모여서 바둑을 두기도 하고 섰다판을 벌이기도 했다. 근무시간에 바둑, 화투놀이라니! 그러나 한밤중 발전소 운전원들에게 바둑을 두거나 화투놀이를 하는 것은 잠을 쫓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권장까지는 아니었지만 묵인되는 셈이었다. 계장님이나 주임님도 지나가시다가 슬며시 몇 판 끼어들기도 하셨다. 우리 학생들은 구석진 곳에 앉아 학교공부를 하고 리포트를 쓰기도 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졸음을 쫓아가면서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맡은 구역을 돌면서 기계들을 점검하고 온도, 압력, 유량 따위 수치들을 Log Sheet에 기록하고 중앙제어실에서 출력을 줄이거나 늘일 때에는 중앙제어실의 지시에 따라 밸브를 더 열기도 하고 잠그기도 하고 버너를 교환하기도 하는 작업을 하였다.

 

부산화력 3,4호기의 보일러에서 발생되어 터빈을 돌리는 시간당 400여 톤의 고온고압증기는 압력이 154기압 정도 되고 온도는 530도 가량 되었다. 엄청난 고압고온 과열증기다. 만일 사고로 배관이 터지거나 찢어진다면 근방의 사람은 증기에 찢어지고 삶아져버릴 것이다. 실제로 이런 끔찍한 사고가 다른 발전소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 시신이 돼지고기를 삶아놓은 것 같았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보일러실 아래 11미터 위치를 지나 터빈빌딩으로 들어가는 직경 24인치짜리 거대한 주증기배관의 보온재가 손상되어 조금 벗겨진 채 운전된 적이 있었는데 밤에 그 벗겨진 배관을 보면 벌겋게 빛이 났다. 증기가 흐르는 강철배관이 단 쇠처럼 벌겋게 빛이 나는 것을 보니 무서웠다. 증기는 저 보다 더 붉을 것이란 뜻이었다. 우리는 보일러 이곳저것을 다니면서 계기를 읽고 기기를 점검했지만 혹시 이 배관이 터지거나 밸브가 깨어져 그 뜨거운 과열증기가 터져 나와 나를 찢어버리고 익혀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심한 화상을 입겠지, 하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항상 있었다.

 

밤중의 발전소가 언제나 출력을 낮추고 그렇게 조용하게 돌아가 주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야간에 발전소가 정지되거나 긴급보수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때는 밤새도록 발전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기기를 돌리고 밸브를 잠그고 여느라 학교에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어 퇴근하기도 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교대시간이 되면 우리는 샤워실로 달려가 후다닥 샤워를 하고는 여덟시 10분에 정문에서 떠나는 퇴근버스를 타고 합숙소로 퇴근하여 식당으로 달려갔다. 버스가 합숙소에 도착하면 8시 15분이나 20분 쯤 되었다. 정신이 몽롱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면 발아래 땅바닥이 쑥쑥 꺼지고 몸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는 밥숟가락이 입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느낌, 때로는 입과 턱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밥이 씹히지 않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합숙소에서 독신자들에게 주는 아침밥은 푸석거리는 통일벼 쌀밥이었고 무국이나 멸치 나물국, 김치와 단무지, 꽁치 같은 반찬과 함께 식판에 담겨서 나왔다. 그 아침밥 한 그릇을 무슨 맛인지 느낄 겨를도 없이 모래알을 삼키듯 목구멍에 쑤셔 넣고 방으로 달려가 책가방을 챙겨서 큰길로 달려 나가면 이미 8시 40분, 50분, 감천에서 나오는 16번 입석버스를 타고 괴정을 지나고,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때는 분뇨처리장이 있어서 똥냄새 나는 대티고개를 구불구불 넘어 서대신동 구덕운동장 앞에서 내리면 이미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구덕운동장 뒷길로 학교까지 가는 길은 또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부지런히 달려 올라가 강의실에 도착하면 수업은 이미 시작된 지 한참 지났고 나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졸면 안 돼.”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눈꺼풀에 힘을 주고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어느 새 책상 위에 엎드려 혼곤히 잠에 떨어져 있었던 거다. 그렇게 어떻게 하루를 버텼는지 학교강의가 끝나면 나는 또다시 회사로 들어가 밤을 새워야 했다. 그 힘든 시절, 나는 56킬로, 57킬로를 오르내리는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고, 세수를 할 때면 코피가 터져 나와 세면기에 뚝뚝 떨어졌고, 코를 풀기는커녕, 머리를 숙이거나 낮추기만 해도 코피가 터져 나왔기 때문에 엉거주춤 선 채 손에 물을 적셔서 얼굴을 대충 훔쳐내는 식으로 세수를 하곤 하였다.

 

밤도 낮도 없이 생체리듬이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깨어진데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낮이나 밤이나 항상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한 번은 학교 기말고사 때 잠을 못 자고 버티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니 오후 4시, 합숙소 식당 저녁식사시간 6시까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방을 쓰던 영하에게 밥 먹으러 갈 때 좀 깨워달라고 부탁하고는 침대에 누워 잠에 곯아떨어졌다. 잠시 후 깨어보니 바깥이 좀 어둑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지나고 있었다. 정신이 개운하고 몸이 가뿐했다.

'내가 두 시간 자고 일어났나?'

어쩐지 이상했다. 영하가 자고 있었다. 영하를 두들겨 깨웠다.

"야, 밥 먹으러 가자.'"

영하가 짜증을 냈다.

"좀 더 자고..... 아직 여덟 시 안 됐잖아."

알고 보니 아침이었다. 내가 두 시간을 잔 게 아니라 열 네 시간을 잔 것이었다. 영하가 내게 그랬다. 나를 깨웠는데 죽은 듯 일어나지 않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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