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43. 팔로버디의 친구들

Thomas Lee 2022. 7. 12. 00:02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미국인 친구들이 욕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 나와 단짝친구가 된 Paul Horn도 그랬다. Paul이 나에게 가르쳐 준 욕들 중에 쇠똥(Bull Shit)이나 개자식(Son of Bitch), 시발(Fuck) 같은 욕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더 심하고 노골적인 욕들도 많았다. 한국에도 입에 담지 못 할 육두문자 욕이 많지만 미국의 욕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욕을 무슨 씨리즈처럼 만들어 자동으로 연속적으로 발사했다.

 

Paul은 나와 나이가 비슷했고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백인이었는데 텍사스에서 한 여자와 함께 살다가 헤어진 다음 자동차를 몰고 아리조나로 혼자 왔단다. 나와 Paul은 건설현장에서도 같이 일했지만 퇴근한 다음에도 만나서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나를 말경주장과 개경주장에 데리고 간 것도 이 친구였고 Salt River에 데리고 가서 래프팅을 가르쳐 준 것도 이 친구였다. 래프팅을 할 때는 공기튜브를 한 개 더 빌려서 맥주 한 박스를 거기다 싣고서 맥주를 마시면서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맥주 말고도 이 친구가 좋아하는 건 Smirnoff라는 보드카였는데 비교적 값이 착했고 도수 높은 소주와 비슷했다.

독한 술인 데킬라 마시는 법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여기 손목에 레몬즙을 바르고 소금을 묻혀.”

“응, 이렇게?”“그래, 됐어. 이제 데킬라를 원샷으로 마시고 소금을 쪽 빠는 거야.”

“알았어. 큭, 캬아.......”

데킬라는 소주잔보다 더 작은 잔으로 마시는 것이었지만 무척 독했다. 레몬즙을 묻히고 거기다 소금을 묻혀서 안주로 삼는 장난스럽고 희한한 음주법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주량이 약했지만 Paul도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을 풀고 기분을 내는 그런 음주였다.

 

Paul은 욕만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나의 틀리는 영어발음도 고쳐주었다.

“야, 리, 넌 왜 맨날 날 막대기(pole)라고 부르냐? pole이 아니고 Paul. 따라 해봐, Paul."”응, 알았어, pole."

“아냐, 아냐, pole이 아니고 Paul이라니까. Paul, 다시 해 봐.”

“아, 파울?”

“그래, 그래. 이제 좀 비슷하다.”"야, 너 쌘프란씨스코라고 안 하고 왜 셴프란쉬스코라고 하냐? 쌘프란씨스코, 따라 해봐.“

“응, 센프란쉬스코.”

“그게 아니라니깐.... 쎄게 쌘프란씨스코. 너 영어 제대로 하려면 그 발음부터 좀 고쳐.”

 

내가 한글을 가르쳐주면서 발음차이를 말해 주었더니 이해 못 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불, 뿔, 풀.....”, “장, 창, 짱.....”, “강, 깡, 캉.....”, “달, 딸, 탈....”, “발, 빨, 팔....”

도무지 그 발음차이를 구분하지 못 했다. 다 똑같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Paul도 그랬지만 이 친구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특히 세계지리 같은 거나 일반상식에 속하는 건 내게 들고 와서 물었다. 중학교 때 지리시간에 세계지도를 그려가면서 배웠던 내게 어느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고 그 나라의 수도가 어디인지 쯤은 아주 쉬운 문제였는데 이 친구들은 그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야, 리, 넌 모르는 게 없잖아. 사람 몸에 펜딕스가 어디 붙어 있냐?”

“뭐? 펜딕스? 펜딕스가 뭔데?”

“야, 만물박사인 네가 펜딕스를 몰라? 펜딕스 말야. 펜딕스가 어디에 붙어 있느냐고.”

Appendix가 어디 붙어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는데 내게 ‘A" 발음이 안 들렸던 거다.

‘Appendix'라면 첨부물인데, 아, 그렇지. 맹장이 어디 붙었냐고 묻는 거로구나.

“아, 어펜딕스? 그거 배꼽에서 오른쪽으로 요만큼 아래, 요기쯤 붙어 있어.”

 

미국인 친구들은 성적인 표현들이나 저속한 이야기들을 예사로 했다. 농담과 우스갯소리도 참 많이 했다.

“해리, 넌 왜 콧수염을 기르냐?”

“응. 콧수염? 이거 XX 범퍼야. 여자의 거기는 꿀샘(Honey Well)"이거든. 부시면 안 되지.”

“어느 날 호수에서 세 친구가 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옆 사람에게 물었다. ‘너 라이터 있니?’ ‘없어.’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라이터 있니?’, ‘미안해. 나도 없어.’ 잠시 생각하던 그 친구, 담재 한 개비를 꺼내 호수로 던져버리고는 담배를 피웠다. ‘Oh, Now I've got one cigaret lighter.’라고 하면서. 어떻게 된 거지?”불 켜는 라이터와 더 가볍다는 뜻의 비교급 lighter의 스펠링이 같다는 걸 이용한 우스갯소리였다. ”담배 한 개비만큼 더 가벼워졌어.“가 ”나 담배 한 개비 피울 라이터를 얻었어.“가 되는 것이었다.

 

팔로버디 사막에 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는 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려고 섰는데 키 큰 흑인 작업자 한 사람이 내 곁에 와 서더니 한국말로 “야아, 비 온다.”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한국어를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좀 있었단다.

품질검사를 하는 한 흑인친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덩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팔뚝이 내 다리통만큼 굵었다. 이 친구가 나를 좋아해서 수시로 장난을 걸어왔다, 손으로 볼펜 끄트머리만 남겨놓고 잡고선 키득거렸다. “야, 리, 네껀 요거 만큼 작지? 내껀 이따만큼 크다.”

“그래? 어디 꺼내 봐. 좀 보자. Check and Verify. 품질검사 해야지.”

이 친구가 한 번은 자기가 휴가를 내어서 고향인 커넥티컷주로 가는데 나더러 같이 가잔다. “야, 리. 미국 동부 구경하고 싶지 않냐? 내가 휴가 때 트럭으로 갈 건데 같이 가자. 크루즈 컨트롤로 80 마일에 세팅해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면 차창에 비치는 풍경이 영화장면같이 착착 바뀌는 거 정말 멋지단다. 사흘이면 동부에 도착할 수 있어.”

따라가 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니다 싶어 참았다.

 

어느 날 쿰블라 라오가 나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인도음식을 대접하였다. 그 아내가 정성을 들여 마련한 풍성한 식탁이었는데 인도음식은 우리 입맛에 너무 맞지 않았다. 향신료 냄새는 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음식들을 맛있게 억지로 먹었다. 그리고 답례로 하모니카를 불었다. 아리랑, 닐니리야, 오 수재너, 클레멘타인....

 

장씨가 함께 일하는 전기부서에는 미스터 이키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금발인지 회색발인지 산타클로스처럼 풍성하고 멋진 턱수염을 가지고 있어서 나이가 많은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우리보다 몇 살 많지도 않았다.

또 이란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팔레비 왕을 축출한 호메이니가 미국대사관 직원들을 444일 동안 인질로 삼은 그 사건 때 미국에 유학 와 있다가 돌아가지 못 하고 주저앉았는지 망명하였는지 했다는데 뚱뚱한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여 그 여자에게 쥐어 살고 있었다.

우리가 그 집에 가보니 부부침실 사면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왜 온 사방을 거울로?’

네 살인가 된 아들 녀석과 좀 놀아주었더니 이 꼬마 녀석이 나에게 매달렸다.

“너 눈이 너무 예쁘다. 나 너랑 함께 갈래. 날 데리고 가 줘. 응?”

 

우리는 죠지 더키 집에도 가보았는데 이 친구도 마누라 손에 잡혀 사는 공처가였다. 우리가 갔을 때 마누라는 얼굴도 내밀지도 않았고 죠지 더키는 우리를 마누라 허락 없이 집으로 불렀다는 것 때문인지 마누라에게 죄지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 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음료수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곧 나와야 했다.

S계장과 친한 죠지 팔메로(George Palmero)라는 점잖은 친구도 있었다. 셋이서 미니골프장에서 퍼터로 공을 쳐서 넣는 놀이를 했는데 나는 그게 골프게임이라는 것도 몰랐다. 죠지 팔메로가 치는 공은 구멍에 쏙쏙 잘 들어가는데 내가 치는 공은 도무지 들어가지를 않았다.

우리는 그 친구의 이름을 갖고 키득거렸다.

“뭐, 그게 팔 메로 크다고?”

“그게 키보다 더 큰 죠지 더키도 있는데?”

죠지 팔메로는 나중에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에 지원하여 와서 몇 년을 일했다.

 

어느 날 미국인 친구들이 우리를 야유회에 초청했다. 공원에서 불을 피우고 바비큐를 했다.

그리고 배구시합을 했다. 나는 배구를 잘 못 했지만 다들 같이 하자는데 나 혼자 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친구들은 배구를 나보다도 더 못 했다. 나는 서브를 넣을 때 공을 들고 오른손 역수도로 공을 때렸는데 이걸 받아내는 친구가 없었다. “미스터 리, 무슨 공을 그렇게 세게 때려? 우리끼린데.”

배구인지 핸드볼인지 모를 그런 시합이었지만 넘어지며 자빠지며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에 우리 한국인 훈련생만 온 게 아니었다. 어느 날 대만전력에서 훈련생 몇 명이 왔다. 우리는 그 친구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는 못 했다. 우리도 영어가 짧은데다 그 친구들 영어도 우리나 마찬가지로 서툴러서 대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러는 오다가다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조금씩 이야기도 나누었다.

대만에서는 우리처럼 신원보증, 재산보증 같은 거 세우지 않는단다. 해외훈련생들을 감시, 감독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교육생들이 미국에서 도망가든지 주저앉든지 ‘그래. 미국이 좋으면 미국에서 살아라.’는 식으로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도 교육훈련이 끝나면 돌아갈까 미국에 남을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들 일흔, 여든이 넘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