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42.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

Thomas Lee 2022. 7. 9. 13:23

팔로버디 원전은 1,300 MW급 3기로 미국에서 가장 큰 단위용량을 가진 원전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운전초기에는 전기출력이 127만 킬로와트 정도였으나 나중에 설비개선을 하여 지금은 전기출력이 140만 킬로와트나 나온다고 한다,

팔로버디 원전의 원자로설비(NSSS)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 CE), 터빈발전기는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이 공급하였으며 앞서 말한 대로 벡텔사가 설계와 시공을 맡았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물이 없는 내륙 사막에 건설된 원전인 팔로버디 원전은 피닉스로부터 하수를 끌어다 정수처리하여 사용하는데 냉각탑에서 증발되어 날아가는 물이 워낙 많기 때문에 피닉스로부터 끌어오는 하수의 양이 1년에 약 1억 톤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로버디 원전의 설계는 System-80라고 했는데 원자로설비는 하나의 원자로에 두 대의 증기발생기(Steam Generator)와 네 대의 냉각재펌프(RCP)를 가진 2 Loops였고, 두께 1.2 미터의 철근콘크리트 원자로격납건물은 약 7만 4천 입방미터의 용적을 가진, 아마 세계에서 가장 큰 원자로격납건물일 것이다.

 

이 팔로버디 원전은 나중에 한국전력이 건설하는 영광 3,4호기 설계의 기본이 되었다. 영광 3,4호기는 130만 킬로와트급인 팔로버디를 참조발전소로 하여 여기에다 100만 킬로와트급 브레이드우드 원전의 원자로 노심, 100만 킬로와트급 카토바 원전의 터빈발전기, 그리고 역시 100만 킬로와트급 라살레 원전의 습분분리재열기(MSR)의 설계를 적용하여 설계하였기 때문에 국회에서 “짜집기 설계”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발전소 설계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130만 킬로와트급 팔로버디의 계통설계에 워낙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한국은 이를 이용하여, 또 팔로버디의 전기출력이 140만 킬로와트로 늘어났기 때문에, 140만 킬로와트급 한국형 원전 APR-1400의 설계를 완성하여 신고리 3,4호기와 신한울 3,4호기를 건설하고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 원전(BNPP) 수주에까지 성공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팔로버디 원전은 실로 한국에게 참 고마운 원전이다.

 

그러나 팔로버디 원전의 건설공사는 순조롭지 못 했다. 1982년 1월 우리가 갔을 때 1호기는 시운전중이었고 2호기와 3호기는 건설중이었는데 이들 3기가 모두 준공된 것은 우리가 거기를 떠난 지 무려 6년 뒤인 1988년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1979년에 있었던 드리마일 아일랜드(Three Miles Island) 원전사고로 인하여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USNRC)는 원전안전요건을 대폭강화 하였고 이 바람에 미국의 원전산업은 된서리를 맞게 된다. 새로운 안전요건을 맞추지 못 하여서, 혹은 늘어나는 공사비를 감당하지 못 하여서 미국의 많은 원전들의 건설공사가 중단되었고 전력회사들은 원전건설을 포기하였다. 워싱턴주에서는 공정율 90%를 넘어 거의 준공단계에 있던 원전조차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 후 30년, 40년이 지나도록 미국의 원자력산업은 기나긴 동면기를 맞게 된다. 팔로버디 원전은 그런 악조건을 헤치고 기어이 건설공사를 마무리하여 준공시켰으니 그야말로 악전고투로 성공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초 호기당 10억 달러 정도로 예정하였던 총공사비는 두 배로 늘어나 호기당 약 20억 달러, 총 59억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우리의 고리 3,4호기와 영광 1,2호기는 용량은 95만 킬로와트로 팔로버디 보다 작지만 한 기 건설에 대략 1조원 약간 넘는 공사비가 들어 이들 4기, 총 380만 킬로와트의 총공사비는 대략 4조 3천 억원, 그러니까 달러로 치면 35억 달러 정도가 들었고, 팔로버디 원전 3기(총 390만 킬로와트) 공사비의 절반이 좀 넘는, 60% 가량의 공사비가 들었다고 할 수 있다.

 

2015년 팔로버디 원전의 발전원가는 kwh당 4.3 센트였다. 원전의 발전단가는 건설비용에 거의 좌우되기 때문에 만약 순조롭게 공사가 진척되어 예정공사비로 준공되었다면 팔로버디 원전의 발전원가는 kwh 당 2.5 센트 정도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고리 3,4호기, 영광 1,2호기, 울진 1,2호기의 발전원가가 그 정도, kwh당 2.5 센트, 우리 돈으로 30원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다. 영광원전 3,4호기는 격납건물 콘크리트 공극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몇 년씩이나 세워놓았기 때문에 발전원가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팔로버디 원전은 오늘도 열심히 돌아가며 50만 볼트 초고압송전선으로 전력을 보내어 아리조나주 전체전력의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 영광원전 3,4호기는 별로 돌리지도 못 하고 40년이 지나면 2030년 무렵 영구폐지 될 예정이지만 팔로버디 원전은 2060년대까지 최소 80년은 돌아가게 될 것이다. 돈이 많아 원전 따위는 40년만 쓰고 내버리는 대한민국과 가난하여 원전을 80년 동안 고쳐가며 돌리는 미국을 비교할 수야 없지...

 

아무튼 우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먹고 도시락을 싸들고 통근버스를 타고 건설현장으로 출근했다. 나는 3호기 기계과로, 권계장과 장씨는 전기과로, S 계장은 품질검사/품질관리부서로, C씨는 자재관리 창고로 출근하여 8개월 동안 현장실무교육(On the Job Training, OJT)를 받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는 미국인들이 김치냄새를 싫어한다 하여 도시락을 들고 우리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설현장에 출근하면 맨 처음 하는 행사가 각 부서별로 사무실 컨테이너 앞에 흰 헬멧을 쓴 엔지니어들과 노란색 모자를 쓴 작업인력이 모여 안전교육을 하고 안전구호를 외치는 일이었다. "Safety First"가 언제나 가장 강조되는 말이었으며 현장 여기저기에 안전구호와 그림들,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아리조나의 뜨거운 사막의 햇볕에 노출된 쇠붙이를 맨손으로 잡으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주의사항도 빠지지 않았다. 품질관리요원들의 품질교육도 있었다. 작업자들은 “Nukies never hurt anyone, 우리 원자력 종사자들은 절대로 누구에게나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의 작업계획에 따라 작업이 배정되고 작업책임자와 작업자들이 작업현장에 배치되었다.

 

벡텔 직원들이 우리 OJT 훈련생들에게 힘 드는 일이나 책임이 따르는 일은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업무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인도에서 온 쿰블라 라오씨의 영어는 발음이 딱딱하여 우습게 들렸다. 그는 현장에서 발행되는 부적격보고서(NCR)이나 현장설계변경서(FCR) 같은 것을 내게 보여주며 그 내용과 작성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간단한 FCR을 내게 맡기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FCR을 작성하고 스케치를 그려서 첨부하여 발행하였는데 현장에서 그 FCR을 보고 일한 기능공들이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넘버원 엔지니어! 네가 그린 스케치 정말 훌륭했다.”

 

가압기를 설치하고 하부 고정 볼트를 조이는 작업을 할 때는 내가 현장엔지니어(Field Engineer: FE)가 되어 작업절차서(WPP/QCI: Work Plan Procedure /Quality Control Inspection: 작업 및 품질검사 절차서)를 들고 나가서 작업감독을 했다. WPP/QCI(에는 각 작업단계별로 작업절차가 써져 있고 작업자와 FE, 그리고 QC가 확인과 검사를 하고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작업은 유압잭으로 볼트를 조이고 나서 볼트의 인장응력을 측정하여 적정한 강도로 볼트가 조여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가압기 하부를 빙 둘러 고정하는 볼트도 많았지만 작업이 쉽지 않았다. “치그덕, 치그덕, 치그덕.....” 작업자들이 유압잭을 조립하고 한참을 작업하여 볼트를 조인 다음 유압잭을 분리하고 볼트의 인장응력을 측정하였다. 인장력 수치가 조금 모자랐다. 인장력 수치가 요건대로 나올 때까지 작업이 반복되었다. 이 친구들은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는 법이 없었다. 수치가 덜 나왔으니 다시 작업하라고 하면 그저 세월아 가라, 바쁠 거 없다는 식으로 다시 재작업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퇴근시간 10분전이 되면 칼같이 일어나 퇴근버스를 타러 갔다.

 

3호기도 격납건물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가압기 같은 거대한 설비들이 수십 개, 아니 백 개가 넘는 바퀴가 달린 거대한 트레일러에 실려 현장에 도착하였다. 수백 톤씩 나가는 저 중량물들을 링거크레인과 격나건물 천장크레인으로 어떻게 권양하여 설치할까 궁금하였는데 그런 중량물 설치광경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 했다. 안전 때문에 그러는지 중량물 설치작업은 언제나 작업자들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3호기에도 원자로가 설치되고 증기발생기와 가압기가 설치되었다.

 

증기발생기 하부기초에는 특이하게도 ‘슬라이딩 베이스’라고 부르는 반달 모양의 두꺼운 강철 쟁반, 즉 무수한 구멍을 뚫어서 흑연을 집어넣은 강철받침이 놓여졌고 그 위에 수백 톤이나 되는 증기발생기가 올려졌다. 그 쟁반의 흑연이 미끄러운 윤활유 역할을 하여 열팽창에 따라 증기발생기가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 슬라이딩 베이스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다. 열팽창과 열수축에 의하여 증기발생기가 움직이도록 설계한 것에는 동의가 된다. 그러나 왜 둥그런 쟁반이 놓이는 베이스의 홈이 아래로 반구(半球) 모양으로 파져 있는가 말이다. 슬라이딩은 수평방향으로 일어날 텐데 반구 모양의 쟁반 위에 증기발생기를 올려놓으면 수평방향의 슬라이딩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증기발생기 전체가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일 게 아닌가? 지금도 슬라이딩 베이스를 왜 그렇게 설계했는지, 설계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하긴 수십 년 동안 문제없었다면 문제없는 거겠지.

 

원자로와 증기발생기를 연결하는 거대한 냉각재배관(Hot Leg) 용접작업이 시작되었다. Hot Leg 배관은 지름이 사람 키만큼 컸고 두께가 무려 10 센티미터 가까이 되었는데 용접부위가 선반으로 가공되어 있었고 이걸 설치하여 맞추어 붙여놓으니 용접부위가 ‘V' 노치가 되었다. 용접은 조금씩 수없이 반복되는 작업으로 그 용접노치를 채워가는 것이었다. 용접을 하면 용접부위에 용접수축이 일어나기 때문에 원자로용기와 증기발생기, 그리고 Hot Leg 배관 곳곳에 수 십 개의 감지기들이 부착, 설치되었다. 그 감지기들로부터 신호를 전달하는 전선들이 커다란 제어반에 빼곡하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에 원자로, 증기발생기, 그리고 배관의 그림과 각 감지기가 보내는 위치신호들과 용접수축이 얼마나 어느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신호들이 표시되었다. 그렇게 해놓고서 배관용접작업이 몇 주 동안 진행되었다. 책임 엔지니어들이 매일같이 용접작업으로 인하여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및 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열변형과 용접수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체크하고 회의를 하곤 하였다.

 

냉각재 배관 용접작업은 TIG용접인지 뭔지로 하였는데 파이프의 둘레를 따라 레일이 부착되고 그 레일을 따라 용접기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용접이 진행되는 자동용접이었다. 그 용접작업을 하는 작업자가 한국인이었는데 성이 방(方)씨였다. 영어로 ‘Bang'이라고 했는데 미국인 친구들이 키득거렸다. “미스터 뱅...” Bang이라는 단어가 저속한 은어라고 했다.

내가 방씨에게 임금을 얼마나 받느냐고 물어보았다. 시간당 25 달러를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외 작업을 하면 더 받는다고 했다. 한 시간에 25 달러면 하루 8 시간에 200 달러, 한주일이면 1,000 달러, 시간외 근무를 하면 한 주에 1,200달러, 1,300 달러.... 한 달이면 5천 달러...., 내 월급이 기껏 300 달러 수준이고 나중 내가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에 있을 때 잡부인부의 일당이 5천원(일당 5천원이면 시간당 1달러도 안 된다), 용접공의 일당이 1만원 정도였는데 그 스무 배나 받는다니......., 부러웠다.

 

나는 Paul의 주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2주마다 받는 급여가 1,300 달러 쯤 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 4주 한 달이면 2,600 달러쯤 되는 모양이었다. 다른 벡텔사 직원들의 급여는 잘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 하위직급 직원들의 급여를 월급으로 치면 3,000에서 4,000 달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Paul과 함께 격납건물 바닥에서 비좁은 공간의 사닥다리를 타고 원자로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무슨 일로 내려갔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원자로 아래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었다. Paul은 원자로 밑에다 매직잉크로 자기 이름을 썼다. “P Horn"

 

나는 혼자서 아직 콘크리트 타설이 되지 않은 격납건물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았다. 저만치 물을 저장하는 큰 저수지가 보였고 그 너머로 선인장이 듬성듬성 난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서편에는 메마른 바위산들이 앉아서 원전건설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