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41. 피닉스의 홀아비들

Thomas Lee 2022. 7. 3. 02:50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쌀을 씻어서 LA에서 사온 코끼리밥솥으로 밥을 지었다. 네 사람이 다 요리에는 젬병이라 채소와 고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썰어 넣고 된장이나 간장을 넣고 물을 부어 끓였다. 국인지 찌개인지 제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큰 문제없이 입에만 들어가 주면 되었다. 콩에다 간장과 물을 부어 끓이거나 햄이나 소시지에다 간장을 부어 조리거나 아무튼 짭쪼롬하게 만들어 김치와 함께 밥반찬을 삼았다. 그걸로 아침식사를 하고 또 도시락을 쌌다. 건설현장에는 점심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사먹을 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꼭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더러는 햄과 빵으로 도시락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역시 밥이 최고였다. 네 홀아비들이 함께 사는 10개월 동안 그런 식의 어설픈 요리와 식사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LA에 있을 때엔 밖에 나가 공중전화를 사용해야 했지만 피닉스의 아파트에서는 전화회사가 전화를 설치해 주었다. 가끔씩 한국으로 전화를 했지만 동전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 말고는 전화요금이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C씨가 가장 자주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서 아내의 위로를 받지 않고는 견디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우리는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장발족이 되어 있었다. 룸메이트끼리 신문지를 깔고 앉아 가위와 빗으로 서로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가족을 떠나 사내들만 넷이 한 집에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말을 하지 않고 표를 내지 않았지만 가슴에 쌓여가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삭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는 조그만 일에도 날카로운 신경전과 다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나는 악기점에서 독일제 하모니카를 사서 가끔씩 불었다. “해는 저어서 어두운데......”

 

각자 미국에서의 생활방향이나 생각에도 차이가 있었다. 당시기준으로 볼 때 한 달에 1,000 달러씩 나오는 Per Diem이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알뜰히 모은다고 아주 큰 몫돈이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아파트 렌트비로 250 달러, 식비 100에서 200 달러 달러 정도, 그리고 얼마간의 용돈과 부수비용을 제하고 마음먹기에 따라 한 달에 500 달러 가까이 모을 수 있고, 귀국할 때 적지 않은 돈과 카메라나 전기밥솥 같은 살림밑천과 선물을 마련하여 귀국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돈을 아끼는 알뜰파가 있는가 하면 언제 또 미국에 올 수 있겠는가, 이 기회에 많이 보고 즐기고 가자는 낭만파인지 낭비파도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나는 Paul과 함께 열심히 싸돌아다니고, Salt River에 가서 래프팅도 즐기고, 말경주장, 개경주장에도 숱하게 갔다. 덕분에 나는 돈을 거의 모으지 못 했고 귀국할 때 카메라와 전기밥솥, 허접한 망원경과 작은 고무보트, 라디오, 그리고 커피와 과자, 쵸컬릿 같은 거 말고는 거의 빈손으로 돌아왔다.

 

경마장은 피닉스 북부의 Turf Paradise라는 곳에 있었고 개경주장(Dog Race Track)은 좀 더 멀리 북쪽 Black Canyon이라는 곳에 있었다. 개경주장에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개들에게 배팅을 하고 달리는 개들을 응원하며 법석을 떨었다. 경주개들은 날씬한 그레이하운드종들이었는데 한 바퀴에 200미터 쯤 되는 트랙에 여덟 마리 정도의 사냥개들이 전기장치로 달려가는 가짜 토끼를 쫓아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개들은 도망가는 가짜 토끼를 잡으려고 미친 듯이 달렸다. 배팅은 1달러인가 2달러로 단식(우승견 한 마리 맞추기), 복식(두 마리 맞추기), 퀴날라(세 마리 맞추기) 견권(마권이 아니라 견권)을 사서 할 수가 있었는데 예상이 빗나가거나 달리던 개들이 엉겨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때는 대박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와 Paul은 그런 대박과는 거리가 멀었고 거의 언제나 몇 십 달러씩 돈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같이 사는 우리 네 사람에게 가급적 미국구경을 많이 하자는 데는 큰 이견이 없었던 것 같다. 또 쌓인 욕구불만을 해소할 기회도 필요했다. 우리는 가까운 Mall에 가서 윈도우쇼핑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실내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또 영화도 보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썬데이(Sundae)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먹었다. “Any day Sundae"라는 광고문구에 꽂혔기 때문이다. ”매일 선데이?“ 매일 일요일이면 얼마나 좋은가? 영화관에서 Raiders of the Lost Ark”를 보았다. 인디아나 죤스의 초기작품이었는데 우리는 그런 건 모르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보았는데 영화 앞부분에 보물을 찾아 동굴에 들어갔다가 굴러 내려오는 커다란 바위를 피해 도망하는 장면에서 혼이 빠졌다. 영화관에만 간 게 아니라 자동차를 탄 채로 관람하는 영화도 보러 갔다.

 

피닉스 도심을 지나 Scottsdale인지 Tempe라는 곳인지에 가서 서부영화의 세트장도 구경하고 토크쇼도 구경했고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스테이크도 사먹어 보았다. 토크쇼는 나의 짧은 영어로 잘 알아듣지를 못 해 청중들이 까르르 웃을 때 멋쩍게 따라 웃는 척 하기도 해야 했지만 연사가 여름철에는 시원한 북쪽으로 올라가 살다가 겨울철에는 따뜻한 피닉스로 내려와 사는 철새족을 빗대어 'Snow Birds‘라고 부르며 사람들을 웃기던 기억은 난다.

 

피닉스에는 한국식당은 하나도 없었고 중국식당은 있었다. LA에서 벡텔사 직원들이 왔을 때 함께 피닉스 시내에 있는 중국식당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중국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말을 잘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천에서인가 중국식당을 하면서 살았는데 반화교 정책과 반화교 정서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결국 미국으로 왔단다.

 

피닉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멕시코 국경 가까운 곳에 있는 투상(Tucson)이라는 도시에도 갔다. 거기 드넓은 선인장 사막에는 옛날 서부영화 세트장들이 있었고 기념품 가게 앞에는 카우보이 건맨과 인디언 실물크기 인형들이 놓여 있기도 하고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사진을 찍도록 만들어놓은 것도 있었고 관광객들에게 서부영화 건맨쇼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도시이름 'Tucson'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Tucson이면 턱슨으로 읽어야지 어째서 투상이냐?”

우리가 그 발음이 스패니쉬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LA에서 못 보고 온 X-rated 성인물 영화를 보러도 갔다. 그야말로 성기를 완전히 노출하고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도색영화들이었다. 도색영화만 본 게 아니었다. 유리박스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붉은 조명빨이었겠지만, 인형같이 어여쁜 처자들이 나체춤을 추는 곳에도 가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미국에서 그런 섹스산업이 번성했던 것 같다.

 

한 번은 LA에서 교육받던 교육생들 일곱, 여덟 명이 피닉스로 놀러왔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Salt River에 래프팅을 하러 갔다. 열 명도 넘는 우리 교육생들이 래프팅 회사에 돈을 지불하고 자동차 튜브를 한 개씩 받아가지고 트럭을 타고 7~8 마일 정도 상류로 올라가 댐 바로 아래에서 출발하였다. 강물은 격렬하게 흐르다 잔잔하게 흐르다를 반복하면서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강물이 벼랑 아래를 지날 때는 미국 젊은이들이 벼랑 위에서 다이빙을 하기도 하였고 미친(?) 녀석들이 완전히 홀딱 벗고서 소리를 치고는 뛰어내리기도 했다. 격류지점에서 튜브가 뒤집어지고 물에 빠지고 난리가 났다. 모두들 신이 났다. 웃고 떠들며 서너 시간을 떠내려갔는데 몇 교육생들이 신발을 잃어버리고 안경을 잃어버렸다. 신발을 단단히 묶고 안경도 줄을 묶어 목에 걸어두어야 한다는 예비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처럼 신나는 경험을 했다고 좋아들 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교육받고 있는 교육생들에게 놀러가기도 했다. 우리 세 사람인가 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벡텔본사에서 교육받고 있는 교육생에게로 갔다. 피닉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비행시간이 두 시간 쯤 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김 계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샌프란시스코를 안내해 주었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출입구는 이중 쇠창살로 되어 있고 입구에 경비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살벌했다.

우리는 사진으로만 보던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위를 걸어보았다. 다리를 매달고 있는 와이어로프들이 팔뚝만큼 굵었다. 우리는 그 옆의 공원에서 사진을 찍었고 유명한 구불구불한 비탈 꽃길도 보고 전차도 타보았고 부두에서 게를 사먹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금문교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감옥섬도 멀리에서이긴 했지만 구경하였다. 갈매기들이 우리 머리 위를 날더니 한 놈이 내 머리에 정통으로 똥을 갈겼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우리에게 그랬다. “야, 너희들 참 많이 다니는구나. 미국에는 한 주(州)에서 태어나 일평생 주 경계를 벗어나지 못 해보고 그 주 안에서 죽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피닉스의 한국인 홀아비들은 외로움과 욕구불만을 달래며 살았다. 우리는 미국에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미국을 구경해야 했다. 우리가 언제 다시 또 미국에 올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