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38. 한국 촌놈들 미국구경

Thomas Lee 2022. 6. 21. 14:25

우리 교육생 거의 전부가 자동차를 운전해 본 적도 없었고 운전면허를 가지지도 못 했다. 따라서 미국에서 교육기간 동안 살아가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해야 했다. 나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운전면허를 따서 국제면허를 받으려고 청담동 운전면허교육장에서 연습도 하고 강남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시험도 쳤지만 오르막 눈물고개에서 시동을 꺼트리는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교육생 중에 이미 미국 운전면허를 가진 친구 하나가 있었다. 사무직 계장이었는데 이미 미국에 한 번 와서 교육을 받은 적 있고 그 때 미국 운전면허를 땄다고 했다. 그는 비오는 날 미국의 도로를 달리는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해외교육에 지원했단다. 그 친구는 미국에 오자마자 중고 승용차를 구입하여 운전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친구는 무슨 백으로 두 번씩이나 해외훈련을 올 수 있었을까?

 

김맹o 계장님이 우리 교육생들에게 LA 차량국에서 발행하는 안전운전 교육지침 책자를 가져다주고 한국인 운전교습소도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그 책자를 가지고 공부를 하고 또 운전교습 선생님에게서 운전교습을 받았다. LA차량국의 운전면허시험문제는 한국어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실기시험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도 필기시험은 통과하였지만 시험관이 옆에 타고 번잡한 도로로 끌고 나가는 실기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운전면허는 따지 못 했지만 우리는 주말이면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다. 로스앤젤레스 시내도 가보고 유명 영화배우들이 손바닥을 찍어놓은 할리우드 거리에도 가보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도 가보았다. 유명배우들의 밀랍인형들을 만들어놓고 관광객을 호객하는 곳에도 들어가 보았다. Knot Berry Farm인지 뭔지 하는 곳에 가서 아찔한 롤러코스트도 탔다. 거의 수직으로 치솟은 꼭대기로 올라갔다가 자유낙하 하듯 떨어지는 놀이기구 열차였는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디즈니랜드에도 가보았다. 세상에 무슨 이런 기가 막힌 동화 속 같은 놀이터가 다 있는지, 그 안에는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같은 TV에서 보던 온갖 캐릭터들과 고속열차, 자동차, 우주선 같은 온갖 타는 놀이기구, 신드바드 모험세계, 알프스와 정글세계 등이 작은 동화 속 같은 별천지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런 곳에 데리고 와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서울에 두고 온 아들 녀석 생각이 몹시 났다.

 

우리는 또 앰트랙(Amtrack) 기차를 타고 샌디에이고로 갔다. 시월드(Sea World)에서 ‘첨벙’ 거대한 물보라를 안기는 고래 쇼도 보고, 물개 쇼를 보고, 샌디에이고 동물원(San Diego Zoo)에 가서 작은 기차를 타고 빙 돌면서 코뿔소, 기린, 얼룩말, 임팔라, 원숭이, 악어, 이런 동물들 구경을 하고 무대에서 펼치는 코끼리 쇼도 구경했다.

버스를 타고 LA 해변으로도 갔다. 롱아일랜드에서 퀸엘리자베스호라던가 하는 무지 큰 배 구경도 했다. 엄청난 크기의 스크류와 샤프트, 그리고 엔진이 경이로웠다. 저렇게 거대한 쇳덩어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레돈도 비치라던가 하는 바닷가에도 가보았다. 레돈도 비치(Redondo Beach)는 고국이 그리운 동포들이 태평양 너머 고국을 향하여 목 놓아 울며 부르는 해변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온 우리 촌놈들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모든 것이 멋지게 보였다.

 

버스는 바둑판처럼 이루어진 도로망을 따라 사거리마다 정차했는데 시간표에 거의 일분도 틀리지 않게 운행되었다. 아직 동양인들이 많지 않던 때라 버스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한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너희들 어디서 왔니?”

“우리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이라고? 놀라워라. 한국 어때요? 미국은 언제 왔어요? 미국에 온 게 좋아요?”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직은 동양인이 많지 않던 그 시절,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 그 할머니도 그랬지만 가난한 한국에서 미국에 온 촌놈들 역시 언제 또 미국에 올 수 있을까, 이 기회에 미국을 한 곳이라도 더 가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파트 가까운 곳에 있는 맥주집에도 두어 번 가 보았다. 비키니 차림의 멋진 아가씨들이 맥주를 팔았는데 이 아가씨들이 가끔 좁은 카운터에 올라가 춤도 추었다. 홀에는 포켓볼 당구대도 있었다. 맥주는 콜라병 보다 약간 큰 정도였고 뚜껑을 손으로 비틀어 딸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한 병에 85센트인가를 받았다. 1불 내고 거스름돈은 받지 않았다. 그게 자동으로 팁을 준 셈이 되었다. 말보로, 켄트 같은 담배도 한 갑에 80센트 정도로 맥주 한 병 값과 비슷했다. 맥주집에서 춤추던 한 아가씨가 내가 웃는 모습을 보더니 보조개가 귀엽다고 또 웃으란다. 내가 지 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나를 어린동생 보듯이 하는 거 같았다. 나는 거기서 당구를 제일 잘 치는 한 젊은이와 당구시합을 했다. 처음 쳐보는 포켓볼 당구였지만 금방 적응이 되었다. 부산화력을 떠난 후 거의 치지 않았지만 나의 당구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몇 판을 내리 이겼다. 수구를 끌어당기거나 밀어서 다음 치기 좋은 곳에 갖다놓는 기술을 구사하는 나의 300점 당구실력을 그 친구가 당해낼 턱이 없었다. 그 친구가 웃으면서 항복선언을 했다. “야, 잘 치네. 네가 챔프다.”

 

밤길에 사거리를 건너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보행자 신호가 있었는데 도무지 파란불이 켜지지를 않았다. 언제 건너야 하나 한참 망설이다가 차가 안 올 때 이 때다 싶어 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나타나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놀라서 뛰었는데 그 차는 ‘쌔애앵’ 내 등 뒤를 스치듯 지나갔다. 하마터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될 뻔 했다. 그 차가 우리를 보았을 텐데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달려들다니, 미국이 이런 곳인가, 등골에서 땀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한국으로 전화를 걸기가 쉽지 않았다. 아파트 마당에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는데 한국에 전화를 한 번 하려면 1분 통화에 3달러, 4달러씩 되는 비싼 통화요금 때문에 25센트짜리 동전을 최소한 2, 30개는 준비해야 했다. 다이얼을 돌려 연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 자릿수 전화번호를 를리지 않고 돌리는 일도 여간일이 아니었다. 겨우 다이얼을 다 돌렸는데 통화중이 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잘못 걸리기도 했다. 간신히 연결되면 통화하는 동안 25센트 동전을 계속 ‘딸그락, 딸그락’ 부지런히 집어넣어야 했다.

“잘 있어요? 난 잘 있어요. 걱정 말아요. 애들은 괜찮아요?”

“밥은 어떻게 해 먹어요? 잠자는 건 괜찮아요? 빨래는 어떻게 해요?”

태평양을 넘어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