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40. 달려라,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

Thomas Lee 2022. 7. 3. 02:49

한 동안은 피닉스에 한 달 먼저 가있던 K계장이 운전하는 차에 얹혀 해결했지만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한 집에 함께 살 교육생 네 명 가운데서 내가 가장 먼저 운전면허를 땄다. DMV(차량국) 운전면허시험장에 가서 필기시험을 보았는데 필기시험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사지선다형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정답 번호를 선택해 버튼을 누르면 “맞다”, “틀렸다.”가 바로 하면에 표시되었다. 25문항 가운데 20문항 이상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시험도중에 여섯 문제를 틀리면 거기에서 시험이 중단되고 불합격 처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첫 문제부터 다섯 문제를 내리 틀리고 또 한 문제를 더 틀려서 초장에 보기 좋게 낙방하였다. 창피하지만 이상하게시리 모르는 영어단어들이 계속 나와서 질문을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직원에게 가서 영어사전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전 사용하는 건 괜찮단다. 우이씨, 진작 말해 줬어야지.

 

다음날 영어사전을 들고 다시 DMV 운전면허시험장에 갔다. 이번에는 영어사전을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아는 단어만 나왔기 때문이다. 만점으로 통과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그 자리에서 실기시험을 신청했다. 나이가 좀 드신 어르신이 시험관으로 내 옆에 탔다. 큰 길로 나가서 좌로 가라, 우회전 해라, 두어 번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너 어디서 왔느냐, 한국에서 왔다고? 서울? 부산? 나 파러리(pottery 도자기) 좋아한다. 한국에 아름다운 파러리 많지.....” 나는 잠시 ‘파러리? 파러리라 뭐지?’ 싶었다가 곧 도자기 이야기를 하는구나, 깨달았다. 이 양반은 운전시험은 제쳐놓고 도자기 이야기만 계속 하였다. 초보자가 운전대 잡고 도자기 이야기 들으면서 묻는 말에 대답하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어르신 시험관은 다시 운전면허 시험장에 돌아와 내게 마지막으로 길가에 뒤로 주차하라고 시켜보고는 합격시켜 주었다. 그리고 DMV에서 임시면허증을 발급해 주었다. 그 날이 금요일인가 그랬다.

 

내가 운전면허를 받자 K계장이 당장 데스밸리(Death Valley)로 함께 가잔다. 넷이서 승용차를 타고 데스밸리를 향하여 출발했다. 피닉스에서 17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플래그스탭(Flagstaff)에서 다시 4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킹맨(Kingman)이라는 곳을 향하여 갈 때까지 두어 시간은 K계장이 운전하였다. 그러더니 고속도로 한편에 차를 세우더니 거기서 나더러 운전하라고 운전대를 넘겨주고는 뒷자리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운전면허를 갓 딴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생초보에게 운전대를 넘기고 태연히 잠을 자는 그 친구의 배포도 참 대단했다. 고속도로에서 처음으로 실전운전을 하려니 황당하였다.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똑바로 지켜 운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핸들조작이 서툴다 보니 시속 50마일도 안 되는 속도에서 차가 술 취한 것처럼 이리 저리 흔들렸다. 두 시간 넘게 그렇게 운전을 하고 나니 정신이 얼얼했다. 그 친구가 다시 일어나 운전대를 잡았다. 죽음의 계곡 남쪽입구의 쇼숀(Shoshone)인가 하는 동네에 전화로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 해 공중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우리 중에 영어를 젤 잘 하는 T가 맡았다.

 

그렇게 우리는 쇼숀의 허름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죽음의 계곡, 서부개척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갈증과 굶주림으로 죽었다는 그 데스밸리를 구경하였다. 겨울철이라 덥지는 않았다. 해발 마이너스 80미터인가 이백 몇 십 피트라던가, 해수면 보다 훨씬 낮다는 배드워터(Bad Water}에서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맛을 보았다. 너무 짜서 그런지 짠맛이라기보다는 쓴맛이 느껴졌다. 우리는 산꼭대기에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가 드넓은 데스밸리를 내려다보았다. 맞은편에는 높은 산들이 늘어섰고 드넓은 데스밸리 골짜기는 소금으로 허옇게 덮여 있었다. 데스밸리 북쪽으로 올라가 붉은 지붕의 집을 지어놓은 오아시스 같은 곳도 구경했다. 데스밸리 구경을 그렇게 마치고 오후 늦게 라스베가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행에서 남은 몇 푼 돈을 슬롯머신에다 기부하고 피닉스로 돌아왔다.

 

내가 운전면허를 땄으니 이제 자동차를 살 차례였다. 마트에서 신문을 주워와 광고를 뒤졌다. 수많은 중고 자동차들이 나와 있었다. 휘발유를 적게 먹는 작은 일제 자동차는 중고라도 몇 천 달러씩 했고 휘발유를 많이 먹는 커다란 미제 중고차는 비교적 값이 쌌다. 우리가 가진 돈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가장 값싼 차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른 차가 1,000 달러에 나와 있는 크라이슬러 뉴포트(Chrysler New Port) 72년형이었다. 72년형이니 차령(車齡)이 딱 10년 된 고물자동차였던 셈이다. 우리는 차주(車主)를 만나 잠시 시운전을 해 본 다음 1,000 달러를 주고 함께 공증사무소에 가서 매매계약서의 공증을 받았다.

 

약간 옅은 노란 색으로 도색된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는 엄청나게 큰 8기통 세단이었다. 시트는 연한 갈색인지 베이지색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운전석과 조수석이 통째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조수석은 두 사람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고 뒷자리에는 네 사람도 넉넉히 앉을 수 있었다. 가속페달을 밟으면 ‘부르릉’ 우렁찬 엔진소리를 내며 내닫는 것이 흡사 탱크를 모는 것 같았다. 개스마일리지가 갤런당 8마일 정도였으니 기름 먹는 하마였다. 그 때 휘발유값이 1갤런에 90센트, 95센트 가량이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기름을 많이 먹는 차를 몰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차에는 에어컨도 없었다. 에어컨도 없고 기름도 많이 먹는 그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 8기통 차는 그러나 8개월 동안 우리 네 사람의 자가용이 되었다. 우리에게 비싼 차를 살 돈이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사람이 자동차 구입비를 분담하긴 했지만 그 차의 핸들을 주로 잡은 건 차량등록증에 차주로 등록된 나였다.

 

같은 동 다른 아파트에 살던 K는 1,500 달러인가를 주고 커다란 8기통 짜리 흰 색 캐딜락을 샀고 강 계장도 그 정도 돈을 주고 캐딜락 보다는 약간 작은 뷰익(Buick)을 샀다. 우리가 제일 싼 자동차를 산 셈이었다. 나중에 K는 우리보다 두 달인가 먼저 교육기간이 끝나 먼저 귀국했는데 귀국하면서 그 캐딜락 자동차를 우리에게 맡기지 않고 옆집에 사는 백인부부에게 맡겨서 좀 팔아서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 되었다.

 

지금은 자동차 부품이나 튜브들의 내구성이 좋아졌지만 당시에는 아직도 연료튜브나 윤활유 튜브의 고무 재질이 좋지 못 해 10년 된 고물차는 여기 저기, 곳곳에서 기름이 샜다. 윤활유를 수시로 보충해 주어야 했고 가끔씩 플러그를 뽑아서 닦아 주어야 했고 정비공장에 가서 튜닝도 해 주어야 했다. 네 사람이 그 차를 타고 함께 한인마트에 가서 식품을 구입하였고 피닉스 시내를 돌아다녔고 아침에 통근차를 놓치면 그 차를 몰고 출근하였고 주말에는 피닉스 근방 여러 곳을 구경 다녔다. 나는 그 차를 몰고나가 아리조나 사막을 카우보이처럼 달렸고 Paul과 함께 피닉스 근방 여기저기를 싸돌아 다녔고 밤늦도록 Paul과 함께 놀다가 취한 건 아니지만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기도 했다.

 

한여름이 되자 피닉스의 기온은 예사로 화씨 100도, 110도(섭씨 35도, 40도)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더위에도 굴하지 않고 그 에어컨도 없는 차를 애용(?)하였다. 우리가 애용할 때마다 그 차는 따끈따끈한 건식사우나가 되어 주었다. 다행인 것은 피닉스의 공기가 건조해서 그 더위도 견딜 만 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선인장 뒤덮인 골짜기 저수지로 가서 수영도 하고 낚시도 했다. 피닉스 북동쪽에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들이 있고 또 저수지들이 여럿 있었다. 아리조나 사막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지만 이따금 폭우가 쏟아지는 때가 있었다. 피닉스 동북쪽의 저수지들은 그 물을 받아서 사막에 건설된 도시인 피닉스로 식수와 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었다. 저수지에서부터 피닉스의 취수구까지 솔트리버(Salt River)라는 급류가 흐르는 강이 십 마일 넘게 흐르고 있어서 많은 젊은이들이 래프팅을 즐기기도 했다. 피닉스 근방, 특히 서쪽에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농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관개수로가 바둑판처럼 나 있었는데 물이 흐르는 콘크리트 도랑들이 좀 높게 만들어져 있어서 호스를 걸쳐놓기만 하면 물이 싸이폰 현상으로 흘러나와 평평한 밭고랑을 타고 밭의 끝까지 흘러들어가 땅을 적셔주고 있었다.

 

아파트 다른 동에 사는, 만화도 잘 그리고 요리도 잘 하고 낚시도 좋아하는 홍계장을 따라 나는 여러 번 저수지에 낚시를 갔다. 울퉁불퉁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 산속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저수지 주변은 온통 선인장과 관목들로 살벌하게 뒤덮여 있었다. 한낮이 되자 태양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내리쬐었다. 낚시는 무슨 낚시, 얼마나 뜨겁고 더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텐트를 쳐놓았지만 너무 더워 들어갈 수가 없었고 작은 나무나 선인장은 그늘이 되어주지를 못 했다. 거기에다 여기 저기 방울뱀이 ‘짜르르....“ 꼬리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물가 귀퉁이에 작은 그늘을 찾아 앉아서 발을 물에 담그고 수건에 물을 적셔 머리와 어깨 위에 두르고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저수지 저 편으로 해가 지고 건너편에 저녁 불빛이 켜졌다. 우리는 그제야 다시 낚시를 시작하였다. 한 밤중이 되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아무래도 이 저수지에는 고기가 없나보다 하는데 낚싯대가 휘청 당겨졌다. 꽤 큰 놈이 물었다. 한참을 승강이하다가 끌어올려보니 길이가 50 센티미터가 넘는 커다란 메기였다. 한밤중에 잡아 올린 시꺼먼 메기가 괴물처럼 무섭게 보였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더워지기 전에 가자면서 돌아왔다. 아파트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를 잤는지 일어나보니 세 친구가 그 메기를 요리해서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나를 위해 한 조각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 고물 크라이슬러 뉴포트를 타고 우리 룸메이트 네 사람은 그랜드캐년과 멀리 자이언캐년, 브라이스캐년까지 다녀왔다. 웅장한 자이언 캐년의 캠핑장에 가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아기자기한 브라이스 캐년으로 가서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페이지(Page)라는 작은 도시의 주유소에 들러서 주유를 했는데 주유소 직원이 굳이 차 점검을 해주겠단다. 그러더니 쇽업소버(Shock Absorber)에서 기름이 새어나와 차가 위험하단다. 이대로 달리면 언제 바퀴가 빠지고 내려앉아 차가 뒤집히는 대형사고를 당할지 모른단다. 자기네가 싸게 해서 400 달러만 주면 부품을 갈고 손을 봐 주겠단다. 그 소리를 들은 C씨가 피닉스까지 300 마일 가까이나 더 가야 하는데 사고가 나면 어떡하느냐고 사색이 되었다.

 

우리 네 사람의 주머니를 탈탈 털면 400 달러는 될 것 같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무래도 쇽업소버 때문에 차 바퀴가 빠지고 차가 뒤집어질 수 있다는 그 친구의 말이 차를 잘 모르는 우리 동양인들을 사기 쳐 먹으려는 수작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차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나도 기계 전공 엔지니어인데 쇽업소버의 기름이 빠지면 스프링이 덜컹거리긴 하겠지만 차 바퀴가 빠지고 주저앉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공갈 같았기 때문이다. 400 달러나 주고 쇽업소버 수리할 필요는 없다고 우기고 나서 내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 때부터 피닉스에 도착하는 너댓 시간은 공포와 전율의 시간이었다. 내가 보기엔 문제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뒷자리에 앉은 C씨는 차가 조금만 흔들려도 기겁을 하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차가 뒤집어지는 거 아니냐는 듯이 난리를 했다.

 

그렇게 피닉스에서 8개월 가까이 우리가 타고 다니던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와도 작별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차 유리창에 "For Sale" 종이를 붙여달고 다녔지만 아무도 우리 차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차를 몰고 LA까지 왔다. 그리고 그 차를 LA사무소 문계장님에게 맡기고 귀국했다. 우리 대신 그 고물차를 파느라고 문계장님이 꽤 애를 먹었지 싶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우리의 듬직한 72년형 크라이슬러 뉴포트 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