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39. 후버댐, 라스베가스, 그리고 아리조나

Thomas Lee 2022. 6. 21. 14:27

벡텔사에서 교육을 받은 지 한 달 좀 더 지난 12월 어느 날인가, 벡텔사는 교육생들에게 2박3일 일정으로인가 견학인지 투어를 간다고 알려왔다. 강의실에 앉아서 강의만 듣던 교육생들은 모처럼 신이 났다. 나도 백화점인지 마트인지에 가서 거금 300 달러나 투자하여 일제(日製)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 한 대를 사고, 코닥인지 후지인지 필름도 몇 통 샀다. 또 12월이라 날이 추울 것 같아서 노랑색 골덴 재킷 하나를 구입하여 입었다. 마트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 뒤쪽에 볼링장을 지나면 있었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었다. 규모가 꽤 큰 그 마트엔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다 미국제 아니면 일제였다. 일제 카메라, 일제 텔레비전, 일제 장난감, 일제 공구와 문방구.....,, 한국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낚싯대. 낚싯대가 내가 거기서 발견한 유일한 ‘Made in Korea’였다.

 

교육생들을 태운 버스는 LA 시내를 벗어나 동쪽으로 달렸다. 곧 작은 나무인지 풀인지로 뒤덮인 누런 색깔의 사막이 나타났다. 모래사막만 사막이라고 알고 있던 우리에게 작은 관목들과 풀로 뒤덮인 캘리포니아 사막은 신기한 풍경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달린 후 어느 한적한 소도시 휴게소에서 내려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시 여행을 계속하였다. 아리조나주 팔로버디 원자력발전소 건설현장으로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거기 갔었는지 못 갔었는지는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아무튼 버스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후버댐으로 향했다. 역시 가도 가도 황량한 사막이었다. 버스 안에서 우리를 인솔하던 벡텔사 직원이 계속 신나게 떠들어대었다. 처음엔 아리조나 사막 이야기, 서부개척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인디언을 욕해대기 시작하였다. “악하고, 믿을 수 없고, 게으르고, 야비하고, 더럽고.......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술이나 사 마시고 일도 않고 마약이나 하고...... 한심한 족속, 희망이 없는 족속....” 그런 식이었다.

 

후버댐은 콜로라도 강물을 막아선 거대한 콘크리트 벼랑이었다. 둥그렇게 휘어진 댐 상부에는 아리조나주와 네바다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나 있었다. 댐 상류쪽 미드호(Lake Mead)에는 푸른 물이 찰랑찰랑 담겨져 있었고 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마나 높은지 아찔하였다. 이 후버댐이 라스베가스는 물론, 캘리포니아주, LA에도 전력과 물을 공급한다고 했다. 우리는 후버댐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댐 안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거대한 수로관이 있었고 거대한 수차발전기들이 여러 대 돌아가고 있었다. 발전소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위로 올라온 우리에게 후버댐 건설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미국의 대공황 때인 1930년대에 건설된 후버댐은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타설 기록을 가지고 있는 대공사였다. 벡텔사는 후버댐을 벡텔사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기록물로 삼고 있다고 했다.

 

후버댐 견학을 마치고 나니 어두워졌고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라스베가스 시내로 들어갔다. 와, 불야성! 라스베가스의 야경은 휘황찬란 그 자체였다. 번쩍거리는 각양각색의 네온불빛과 광고판 불빛이 얼굴에 ‘화끈화끈’ 뜨겁게 느껴졌다. 우리가 묵은 호텔이 Stardust였던가, 어느 호텔이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호텔에서 뷔페식 저녁식사를 하였고 두 사람씩 한 방을 배정받아 투숙하였다. 아니 투숙한 게 아니라 밤잠을 거의 자지 못 했다. 교육생들은 카지노 안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포커판과 블랙잭판을 기웃거리고 슬롯머신을 돌리며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 다음날 벡텔사는 우리를 태워 다시 LA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 우리 교육생 아파트에는 신종놀이가 시작되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배워온 블랙잭 게임이었다.

 

그러는 사이 2개월이 지나갔다. 1981년 1월이 되었다. 교육생들은 다음 일정계획에 따라 현장교육(On the Job Training: OJT)으로 흩어져 떠나갔다. 교육생들의 교육기간이 6개월, 8개월, 10개월, 12개월 식으로 달랐고 벡텔사 교육과 현장교육기간도 서로 달랐으므로 벡텔사에 남게 된 교육생도 있었고, 샌프란시스코 벡텔 본사에 가게 된 인원도 있었고 건설현장으로 가는 인원도 있었다. 떠난 시기도 서로 달랐다. 가장 많은 인원이 가게 된 곳은 아리조나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이었고 나를 포함하여 열 두 명 쯤이 그리로 가게 됐다.

 

벡텔사는 아리조나 피닉스(Phoenix, Arizona)에 우리가 살 아파트를 미리 예약해 놓았다. 겨울이라 한여름에는 화씨 100도를 예사로 넘는다는 피닉스의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입주할 아파트는 방 두 개에 거실과 부엌이 있는 투베드룸이었는데 LA의 아파트에 비하면 훨씬 허름하였는데도 렌트비가 한 달에 1,000 달러인가 그랬다. LA아파트에서 살던 그대로 우리는 네 명씩 한 아파트에 들어가 두 명이 한 방을 나누어 쓰게 되었다. 나의 룸메이트도 그대로 장oo씨가 되었다. 아파트 한 가운데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아파트를 빙 둘러친 담벼락 안쪽에 캐노피를 얹은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겨울에는 몰랐는데 봄이 오고 여름이 오자 아파트에 바퀴벌레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부엌이며 냉장고며 침실이며 욕실을 가리지 않고 바퀴벌레들이 출몰하였다.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분무식으로 뿌리는 약과 연막탄 같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바퀴벌레 약을 치면 죽은 바퀴벌레들이 쓰레기통을 반쯤 채울 정도로 나왔지만 이틀도 지나지 않아 또 바퀴벌레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할 수 없이 바퀴벌레들과 동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바퀴벌레들은 우리가 귀국할 때도 짐에 묻어서 따라왔다.

 

세월이 흐른 다음 내가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때, 97년도엔가 나는 팔로버디 원자력발전소를 다시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한 인디언 신사를 만났는데 그 분이 내게 내민 명함을 보니 라스트네임(姓)이 Sixkiller였다. 자기의 증조할아버지인가 고조할아버지가 미군 여섯 명을 죽인 인디언 용사였고 그래서 성이 “여섯 죽인 사나이”, Sixkiller가 되었단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도 가 보았다. 아파트는 변함이 없었는데 어쩐지 더 낡고 허름해 보였다. 그리고 정문 앞에는 “빈 아파트 있음. 한 달 렌트비 475 달러”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렌트비가 절반으로 떨어지다니, 15년 넘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이렇게 허접해져 버렸구나, 싶었다.

이제 다시 25년이 지난 2022년, 이 글을 쓰면서 구글맵으로 이 아파트를 다시 찾아보니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때의 바퀴벌레 나오는 허름한 아파트를 헐고 깨끗하게 다시 지은 모양이다.

 

팔로버디(Palo Verde) 원자력발전소 건설현장은 피닉스에서 서쪽으로 LA,방향으로 10번 고속도로를 타고 50 마일 가량 떨어진 사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큰 키의 선인장들이 가득한 사막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피닉스 시내에서 팔로버디 원자력건설현장으로 아침마다 수 십 대의 출근버스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아침 여섯 시 쯤 가까운 Mall 주차장으로 걸어가 거기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사막 한 가운데 팔로버디 원자력건설현장은 철조망 울타리로 빙 둘러쳐져 있었고 철조망 밖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 1호기는 건설을 마치고 시운전중이었고 2, 3호기는 건설중이었는데 각각 130만 킬로와트짜리의 거대한 원자력발전소였다.

오너인 전력회사는 APS(Arizona Public Service)이고 벡텔사는 설계와 시공, 그러니까 벡텔사가 사실상 건설공사 전체를 맡고 있다고 하였다. 공사비는 호기당 10억 달러인가로 계획했었는데 공사비가 예상 밖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공사비용은 한국식 일괄도급계약이 아니라 실비정산으로 되어 있고 벡텔사가 매달 금액을 청구하면 APS가 지불한다고 했다. APS가 벡텔사를 믿고 벡텔사가 APS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거 참 신용사회라 다르구나 싶었다.

 

발전소는 각각 거대한 원자로격납건물 돔과 터빈빌딩, 보조빌딩들과 함께 잠실야구경기장을 닮은 거대한 냉각탑 세 개씩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다른 발전소들은 둥글고 높은 콘크리트 냉각탑을 사용하는데 이곳의 냉각탑은 모양이 전혀 달랐다. 물이 없는 사막 한 복판이라 발전소에 필요한 물은 50마일이나 떨어진 피닉스로부터 하수를 지하 관로로 끌어와 정수처리해서 쓴다고 했다. 세 개의 냉각탑 꼭대기에는 거대한 냉각팬이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발전소 복수기에서 배출되는 물을 냉각탑 상부로 끌어올렸다가 아래로 쏟아 흘려 내리면서 상부의 팬을 돌리면 바깥공기가 냉각탑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쏟아져 내리는 물을 냉각시키는 그런 구조였다. 또 발전소 가까이에는 비상시에 사용할 물을 거대한 축구장 열 개도 넘을 면적의 넓은 저수지를 만들어서 담아놓고 있었다.

 

팔로버디 건설현장에서 우리 교육생들은 기계, 전기, 품질, 자재 등 여러 부서로 나누어 배치되었다. 나는 3호기 기계부서에 배치되었다. 우리 직책으로 과장에 해당된다고 할 Chief Engineer는 핸섬하면서 점잖게 생긴 분이었는데 이름은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선임엔지니어는 콧수염을 기른 중년 아저씨로 이름이 Harry Seckinger, 그리고 나를 지도할 담당 엔지니어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키도 좀 작은 인도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Kumbla Rao였다. 그리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호리호리한 백인 친구 이름은 Paul Horn이었다. 거기 있는 8개월 동안 나는 Paul과 참 많이 싸돌아다녔다.

 

벡텔사 로고가 그려진 흰 색 안전모는 지급되었는데 안전화는 각자 사서 신으라고 했다. 안전화는 발 앞부분에 강철판이 들어있는, 무거운 물건이 발에 떨어질 때 발가락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아파트 가까운 K-mart에 가서 40 달러인가를 주고 안전화를 구입했다. K-mart에서는 식품도 팔았는데 비닐봉지에 담긴 식빵 값이 30센트 쯤 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비싼 꿀이 여기에선 플라스틱 병에 담겨져서 몇 달러씩에 팔리고 있었다. 나는 곰 인형 닮은 병에 담긴 선인장 꿀을 사와서 수시로 물에 타서 먹었다. 길쭉한 수박은 한 통에 80센트 정도였다. 식품값이 싸니 미국에서는 굶어죽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K-mart 바로 옆에는 은행이 있었고, 우리는 매달 Per Diem이 나오면 그걸 들고 은행으로 가서 입금하고 또 현금을 찾아서 썼다. 한국식품가게는 아파트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하나 있었다. 아직 한국인도 별로 없던 피닉스에 한극식품가게가 있다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우리는 그 한국식품가게에 가서 쌀과 고기, 김치와 된장, 고추장, 간장, 마늘과 채소 같은 것을 사와서 밥을 해먹었다. 컵라면도 있었는데 모두 일제였고 맛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식품 말고도 소소한 가정용품들도 팔았는데 거의 일본제품이었다. 그렇게 우리 교육생 홀아비들은 피닉스에서 함께 여덟 달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