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37. 로스앤젤레스 사무소

Thomas Lee 2022. 6. 15. 10:10

1981년 11월초, 로스앤젤레스 인근 다우니에 자리잡은 벡텔사에서 교육이 시작되었다. 우리 교육생들에게는 두꺼운 교재가 한 아름씩 주어졌고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 벡텔사 직원들이 와서 강의를 했다. 바인더로 두껍게 만들어진 교육교재는 모두 열 권도 훨씬 넘었는데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 과정이 분야별, 과정별로 분류, 정리되어 있었다. 벡텔사 직원 강사들이 와서 열심히 강의하였지만 우리의 짧은 영어로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데다 시차 때문에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 해 조는 교육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벡텔사의 교재들은 발전소 건설 전체 과정을 경영, 재정에서부터 구매, 자재관리, 예산관리, 공정관리, 품질관리 뿐 아니라 토목, 건축, 기계, 전기, 계측제어 등 기술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교육하는, 대단히 잘 만들어진 역작들이었다. 복사를 하지 못 하도록 벡텔사 로고가 붉은 색으로 커다랗게 찍혀 있던 그 교재들이 너무 많고 두껍고 무거워 귀국할 때 챙겨오지 못 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한전 LA사무소는 벡텔 건물 안에 벡텔이 제공한 사무실을 하나 차지하여 꾸려가고 있었고 소장님과 과장님 두 분, 그리고 십여 명의 계장님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원래 한전에는 해외사무소라는 조직이 없었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다 보니 해외조직이 필요했다. 그런데 무엇을 하더라도 정부가 허가해주어야 하고 정부가 통제하는 예산 안에서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한전이 그런 조직을 제대로 만들어 주거나 해외사업소를 만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자력프로젝트 사업추진부서의 머리 좋은 분들이 벡텔사 같은 용역회사들의 코치를 받았는지 꾀(?)를 내었는지 모르지만 변칙적으로 해외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게 되었다. 바로 계약을 통하여 해외공급업체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한전은 원자로설비, 터빈발전기 등 주요기기를 공급하는 웨스팅하우스나 GE 같은 미국업체의 공장에 한전인원을 파견, 주재하면서 제작검사, 출하검사, 제작독려, 업무연락을 해야 하므로 한전이 이러한 인원을 미국에 파견하면 미국회사나 제작공장에서는 사무실도 제공하고 일체의 편의도 제공하고 인원의 생활에 필요한 생활비도 제공하도록 공급계약 조항에 집어넣어 놓은 것이었다. 물론 다소 계약금액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건설과 발전소 운전을 위한 전문인력을 훈련, 양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것도 공금계약이나 용역계약에 포함시켜 놓았다. 한전이 교육훈련생을 보내면 웨스팅하우스나 GE, 벡텔사, 에바스코 같은 회사들이 교육훈련을 시켜주고 편의도 제공하고 생활비도 주도록 계약조항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해서 한전이 웨스팅하우스 등 해외의 공급계약자들에 주재요원을 파견하고 또 교육훈련인원을 보내어 필요한 교육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종의 변칙인 셈이나 그 당시 원자력건설을 추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가 벡텔사에 가서 교육훈련을 받게 된 것도 이런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벡텔사는 한전이 고리 3,4호기와 영광 1,2호기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발전소설계, 기술제공, 자문과 전체적인 사업추진관리 용역을 맡았다. 또 벡텔사는 미국에서의 기자재구매업무도 한전을 대신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건설요원의 교육훈련도 맡았다. 실로 벡텔사는 한전의 대리자요, 지도자요,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글로벌시대가 되고 기업들도 다국적 기업이 되어 국적이 없어지다시피 되었지만 당시에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모든 기자재가 국가간 수출과 수입의 절차에 따라 도입되어야 했다. 거래나 계약이나 구매가 해당국가의 법률에 의하여 해당국가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한전은 미국의 법인이 아니고 따라서 미국내에서 법률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벡텔사가 한전을 대리하여 모든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수출입 절차에 따라 물품을 수입해오는 방식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벡텔사가 한전의 대행자가 되어(on Behalf of KEPCO) 미국에서 미국업체들과 공급계약을 맺고 관리, 감독, 검사를 하고 미국의 제작업체들은 물품을 미국의 수출항에 가져다 놓는(FOB) 것으로 납품을 하게 되고 한전이 거기에서 수출입절차에 따라 운송회사를 시켜 물품을 수입해오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전이 미국에서 수행되는 모든 업무를 벡텔사에게 맡겨놓고 한국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전도 사람을 보내어 벡텔사와 함께 뛰어야 공기에 맞추어 원자력발전소를 제대로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한전은 벡텔사 업무를 감독, 확인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제작공장도 방문하여 제작상황을 점검하고 납품독려도 해야 하는 것이다.

LA 사무소는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벡텔사가 미국에서 행하는 설계나 기술업무, 그리고 미국업체들에 대한 벡텔사의 제작독려, 검사업무를 확인, 독려하고 한전본사나 건설현장과의 원활한 업무연락을 하기 위하여 한전이 벡텔사에 파견한 조직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텔렉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통신수단은 오직 우편, 다이얼 전화, 그리고 텔렉스 밖에 없었다. 나중에 나는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에서 5년 동안 일했는데 현장에서 긴급하게 필요한 기자재가 언제 제작완료되어 납품되는지,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제작업체가 어떤 조치를 하고 있는지 같은 수많은 일들로 LA 사무소 담당계장님들과 숱하게 전화통화를 해야 했는데 시차도 맞지 않고 통화음질도 좋지 않아 때로는 고래고래 악을 쓰는 등 참 애를 먹었다.

 

LA사무소에서 우리 교육생 관리를 주관하는 분은 김맹O 계장님이었는데 가끔씩 교육장을 찾아와 교육상황을 확인하고 또 교육생들에게 LA 시내로 나갈 때는 반드시 LA 사무소 계장들의 도움을 받을 것과 특히 강도를 주의하라는 것 같은 안전교육(?)을 하였다.

한국이 가난하던 그 시절엔 미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대단한 축복이요 특혜였기 때문에 LA사무소 계장님들은 우리 교육생들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차량을 태워주고, LA 다운타운 구경도 시켜주고 쇼핑도 시켜주고, 더러는 교육생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갈비와 김치로 풍성한 식탁으로 대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배려를 해 주었다. 그런데 교육생 인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술직과 사무직으로 나누어지고 직군과 전공을 따라 그룹이 나누어졌다. 사무직 훈련생들은 사무직 계장님의 안내로 X-rated 영화를 보고 왔다고 했다.

 

LA는 범죄가 많은 곳이라 했다. 우리 원자력건설부 기술직 교육생들이 한 계장님의 집에 갔을 때 보니 아파트는 요새처럼 살벌한 쇠창살로 둘러쳐져 있고 아파트 출입문은 차 안에 설치된 리모콘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LA다운타운 올림픽가에 있는 한인 선물가게에 갔더니 거기도 쇠창살이 이중으로 쳐져 있고 안에서 문을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도 가보았는데 어쩐지 살벌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졌다. 차는 신호등에 걸려 정지할 때에도 유리창을 꼭꼭 내리고 차문을 잠갔다. 어떤 분이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가다가 자동차가 고장 나 멈춰 섰고, 그래서 아내를 차 안에 둔 채 비상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아내가 총에 맞아 죽어있더라는 기가 막히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미국은 못 살던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다가 이탈을 한 직원 노모(盧某)씨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노모(盧某)씨를 붙잡기 위하여 LA사무소 계장님들이 그가 살던 집 앞에 가서 밤새도록 잠복근무를 하고 또 전화로 설득하려고 했지만 미국의 법 때문에 그 집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였다고 한다. 또 LA사무소에서 귀국하지 않고 이탈한 계장급 직원은 LA의 히스패닉 지역에서 그로서리 가게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삶이 좀 고달프기는 하지만 가난한 한국 보다는 훨씬 낫다면서 귀국할 생각이 없다 한다고 했다.

 

김맹o 계장님은 또 한전 교육훈련생과 미국 처자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도 해주었다. 한 미국 처자가 한 교육생을 깊이 사랑했단다. 그 교육생이 귀국할 때 한국으로 따라가겠다고 LA사무소에 찾아왔단다. 그 처자를 떼어 놓는데 김 계장님이 애를 먹었단다.

“너 TV로 매쉬(MASH) 봤지? 한국은 가난하고 제대로 된 집도 없다. 한국 가면 오두막에 살아야 한다. 너 뭐 먹고 살래? 한국에 가면 햄버거도 없다. 피자도 없다. 한국에서는 시어빠진 김치와 밥을 먹고 사는데 너 이런 거 먹고 살 수 있냐? 한국 가면 넌 죽는다. 죽어“

그 처자가 그래도 단념을 않더란다.

“초가집에 살아도, 오두막이나 텐트에 살아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그 사람만 있으면 돼요. 한국 갈 때 냉동 햄버거, 냉동피자 이런 거 많이 사서 싸들고 가면 되잖아요.”

“한국엔 냉장고 같은 거 없다. 그런 음식 사가면 어따 보관할래? 금방 다 상하고 썩어버릴 거다.”

뭐, 이런 회유로 그 처자를 간신히 단념시켰다는 무용담 같은 이야기였다.

당시 한국은 아무튼 미국에 비하면 참 못 사는 나라였던 건 틀림없다. 내 기억에 당시 한국의 자동차 대수가 2, 30만대에 불과했다. 자동차 100만대를 돌파한 것이 1988년 4월 무렵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