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국해외훈련

36. 벡텔사 해외훈련

Thomas Lee 2022. 6. 14. 04:08

온 가족이 새벽부터 법석을 떨고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과 친척들로 구성된 환송단이 비좁은 13평 아파트를 덮치고 나는 그 환송단을 이끌고(?) 오후 1시인가 2시 쯤 잠실을 출발하여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거기에서 또 기다리고 찾고 부르는 어수선한 가운데 출국수속을 하고 짐을 부치고 난리법석을 떤 끝에 저녁 일곱 시쯤엔가 환송단의 전송을 받으며 나는 출국장을 지나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하루 종일 난리를 치른 것이다.

 

그렇게 비행기에 탑승하고서도 또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가 탄 KAL기는 활주로를 달리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비행기가 큰 원을 그리며 빙 도는가 싶더니 서울이 발 아래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깔린 서울은 보석 같은 불빛들로 한강물과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떠올랐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떠났다.

 

좀 있으니 기내식이 나왔다. 스튜어디스가 날라다 주는 기내식도 난생 처음 먹어보는 양식이었다. 비행기는 일본을 지나 태평양 상공을 나는 것 같았다. 밖을 내다보았지만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네 시간 가량 지나니 또 기내식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이 훤히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태양을 향하여 동편으로 날아가니 금방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또 기내식이 나왔다. 열 시간 남짓 날아가는 사이에 기내식에 세 번인가 나왔다. 좁은 의자에 묶어놓고 먹이는 사육을 당하는 것 같았다. 태양이 뜨는가 했더니 금방 높이 솟아올랐고 우리가 탄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였다. 창으로 내려다보니 비행기는 바다 위를 나르고 있었고 드디어 미국 땅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행시간은 열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 사이에 밤이 번개같이 지나고 태양이 솟아올랐다 기울어가는 초스피드 하루였는데 시간은 거꾸로 흘러 그곳 시각은 같은 날 오후 두 시 무렵이었다. 서울에서 저녁에 출발했는데 LA에서는 점심 조금 지난 시각이라니.

 

LA 공항에서 짐을 찾고 입국수속을 하는데 또 무척 긴 시간이 걸렸다. 짐을 찾아가지고 입국수속장에 기다란 줄을 서서 기다리자니 다리가 아파오고 주저앉고 싶어졌다. 입국심사관이 뭐라고 묻는지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냥 눈치로 고개를 끄떡이고 벡텔사에 교육생으로 훈련받으러 왔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렇게 곤죽이 된 우리 교육생들 삼십여 명이 짐을 찾고 입국수속을 거쳐 모인 것은 LA 시각으로 저녁 다섯 시 무렵 되었던 것 같다. 로스앤젤레스 사무소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계장님들 몇 분이 자동차를 몇 대나 동원하여 마중, 아니 신병인수 인솔차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을 나오면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높다란 대추야자나무들이었다. 그리고 새파란 잔디밭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들이었다. 그 이국적인 풍경은 아, 내가 드디어 다른 나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미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케 해 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는 한인타운으로 유명한 LA 남쪽 오렌지 카운티 가든 그로브에 있는 한인식당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우리 교육생들에게 환영식을 겸한 저녁식사대접을 한다고 했지만 소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담당계장님이 교육생들 교육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듯 했다. 이미 한전은 고리 1호기부터 월성 1호기, 고리 2호기, 고리 3,4호기까지 선행호기들을 건설하면서 웨스팅하우스나 벡텔, 에바스코 등에 여러 차례 교육훈련생들을 파견해 왔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가기 직전 LA에서 멀지 않은 원자력발전소에서 교육을 받던 노모(盧某)씨가 현지이탈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LA 사무소에서 근무하던 계장급 직원 한 사람도 3년의 근무기간이 끝나고 귀국발령을 받자 잠적하여 눌러앉는 사건도 있었다. 80년 무렵 그 때까지만 해도 가난한 한국에서 미국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미국에 눌러앉아 살겠다는 이탈자가 간혹 나오던 때였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우리는 보안서약서인지 뭔지에 도장을 찍었고 현지이탈시 회사에 손해배상을 하겠다는 서약서에다 재산보증인까지 세워 도장을 찍은 터였다. 회사는 이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네 사람씩 묶어 그 중 한 사람을 사호담당(?) 인솔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나도 계장이라고 하여 사호담당 인솔책임자가 되었다.

 

저녁식사가 대충 끝나자 교육훈련기간 중 회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회사에 누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절대로 이탈해서는 안 되고 이탈자, 잠적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할 것, 야간에 외출을 자제할 것, LA 시내 우범지역에 절대로 혼자 가지 말 것,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추었을 때 강도가 차문을 열 수 있으므로 반드시 자동차 문을 잠그고 유리창을 열지 말 것, 카메라 같은 귀중품을 가급적 갖고 다니지 말 것 등등 주의사항과 교육이 계속되었고 거기다 술까지 곁들여 지루하고도 긴 저녁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졸음을 참으며 감기는 눈꺼풀을 치켜뜨고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긴 저녁식사가 끝나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기거할 아파트로 안내되었다.

 

가든그로브 브룩커스트 스트리트에 있는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밤 열한 시 무렵이었다. 그 밤늦은 시각에 우리 교육생 서른 여명이 한꺼번에 아파트에 들이닥쳐 커다란 가방과 이민백을 끌고 아파트마당의 돌 박힌 보도를 걸으니 ‘와르르, 와르르르르륵.....’ 가방 바퀴소리가 요란하게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아파트는 꽤 넓은 부지에 늘어선 이층짜리 건물들이었는데 파란 잔디밭에는 대추야자나무와 온갖 나무, 화초들이 가꾸어져 있었고 수영장과 스파에는 파란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산단 말이야?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아파트들은 거실과 주방을 가운데로 두고 양편으로 방이 두 개인 투베드룸이었는데 우리는 네 사람씩 한 아파트, 그러니까 방 하나에 두 사람 식으로 아파트를 배정받았다. 무너지듯 침애 위에 지친 몸을 누이니 그 날은 마흔 시간짜리 참으로 긴 하루였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눈을 뜨니 아침 여덟시쯤 되어 있었다. 나와 또 나의 룸메이트 장OO씨는 일어났는데 건넌방 두 사람은 아직 잠에 떨어져 있었다. 배가 고팠다. '아침을 어떻게 해결하지?' 주방시설은 갖추어져 있었지만 사다놓은 식재료가 아무것도 없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나와 장씨는 먹을 것 파는 데를 찾아 길거리로 나섰다. 쭈욱 뻗은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드문드문 달리고 길가에는 대추야자 가로수 아래로 좁다란 잔디밭이 가꾸어져 있었고 낮은 집들과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아, 여기가 미국이로구나.” 그런데 그 넓은 도로에 자동차들만 다닐 뿐 우리 두 사람 말고는 걷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보였다. 어디에선가 강도가 나타날 것 같이 으스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의 일이었지만 우리가 두 달 머무르는 동안 그 아파트에서도 살인사건이 한 번 일어났다. 아침에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이 살해당했다고 했다.

 

아파트에서 나와 한 블록 쯤 걸어가니 노란 토끼 귀처럼 생긴 커다란 조형물이 보였다. 그게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였다. 우리 두 사람은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엇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 그림에서 1번을 가리키며 저거 네 개 달라고 주문했다.

점원이 뭐라고 되묻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 캄보? 곰보가 아니고 깜보? 그게 뭔데?“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점원이 또 물었다.

“Here or to go?"

이 처음 들어보는 건 또 무슨 메뉴야?

이런 짤막하고 간단한 말도 못 알아들으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어떻게 주문을 끝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 햄버거 값이 1 달러 근방으로 무척 싸던 때였다. 햄버거 콤보 네 개 값으로 5, 6 달러 정도를 낸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코카콜라 컵을 담은 봉지 네 개를 받아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LA사무소 계장님 몇 분이 자동차를 몰고 왔다. 그리고 우리교육생들을 나누어 태워 가든그로브의 한국식품 가게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쌀과 반찬거리를 사서 돌아왔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이 되자 벡텔(Bechtel)에서 밴 두 대가 왔다. 밴은 우리를 싣고 5번 고속도로를 지나 벡텔사로 우리를 데려갔다. 아침 출근시각 드넓은 5번 고속도로는 달리는 차들이 가득 메워 흐르고 있었다. 진입로에는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파란 불이 켜질 때 한 대씩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벡텔사는 우리가 입주한 아파트에서 북쪽으로 2, 30분 올라가서 LA 시내 좀 못 미쳐 다우니(Downy)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저기 메뚜기 대가리를 닮은 석유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석유를 캐내고 있었다. 벡텔사에서는 교육생들을 위하여 아침마다 도넛과 커피를 가져다 놓았고 우리는 아침식사를 그 도넛으로 때우고 점심은 벡텔사 카페테리아에서 햄버거나 피자 같은 걸 사먹거나 더러는 LA사무소 계장님들이 태워주는 차로 밖으로 나가 중국식당에서 해결하였고 저녁은 아파트로 돌아와 해먹는 걸로 했다.

 

벡텔사에서는 우리 한전교육생들에게 전담직원 두 명인가를 붙여서 아파트 렌트 문제부터 교육생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 교육기간 중 우리의 생활비는 벡텔사에서 지불되었는데 ‘PER DIEM’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1,000 달러씩 수표로 발행해 주었고 그 수표를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아파트 가까이에 있는 은행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개인 은행계좌를 개설해 주었다. 한 달에 1,000불! 가난한 한국에서 한 달 25만원 가량 되는 봉급으로 살던 우리에게 1,000불은 무려 70만원, 석달 봉급 가까이 되는 거금이었다. 물론 그 돈은 벡텔사의 원자력 7,8호기 기술용역 계약금액에 포함되어 한전으로부터 지불되는 것이기 때문에 벡텔사가 우리에게 거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은행에서 개인수표책을 받았고 그걸로 현금을 찾거나 아파트 렌트비를 지불할 때 그 개인수표를 사용했다. 개인수표에 서명을 하고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미국의 은행시스템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도 수표를 지불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막상 수표를 꺼내 쓰려니까 점원이 ID를 보여 달라고 했다.

"ID? 그게 뭔데?“

우리는 그 ID라는 게 미국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인가 했다.

그래서 마트나 가게에서 개인수표를 사용하는 건 포기해버렸다. 까짓, 현금 찾아서 쓰면 되지 뭐.

 

우리가 입주한 아파트 렌트비는 한 달에 1,200 달러였고 우리는 한 사람당 300 달러씩 아파트 렌트비를 지불했다. 일인당 300 달러는 우리가 받는 생활비 Per Diem 1,000 달러의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한국에서 우리가 받는 한 달 봉급이었다.

아파트 방 한 칸에 한 달 봉급이라니, 1981년 그 때 미국의 아파트 월세는 이미 그만큼 비쌌다. 아니, 우리의 소득수준이 그만큼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