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9. 잘못 불출된 자재 때문에

Thomas Lee 2022. 3. 4. 07:35

9. 잘못 불출된 자재 때문에

 

한중이 한전의 원자력설비 기자재만 수주한 게 아니었다. 88 올림픽 후 90년 무렵부터 한국의 생활수준 향상과 함께 전력수요가 급성장하는 바람에 한전은 급하게 많은 화력발전소들을 건설해야 했고 한중은 원자력발전설비 보다 오히려 훨씬 많은 화력발전소 기자재를 수주하여 납품했다.

 

원자력을 담당하던 나와 직접적 관계는 없었지만 한중은 기력발전소의 기자재도 애를 먹인 때가 많았다.

한전의 50만㎾급 화력발전소의 보일러는 슐쳐형 관류보일러이다.

아, 관류(灌流)보일러가 뭐냐고?

예전의 발전소들은 보일러 내부에 수많은 튜브들을 배치하고 그 튜브 안으로 물이 흐르면서 가열된 다음 증기드럼에서 증발이 되게 하고, 그 증발된 증기를 다시 다른 튜브들을 통하여 흐르게 하면서 계속 가열하여 과열증기로 만들어 터빈으로 보내 터빈을 돌리도록 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물이란 압력이 높아지면 증발하는 온도가 올라가게 된다. 산위에서 밥을 지으면 물이 100도 아래에서 끓는 바람에 밥이 설익고 반대로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으면 높은 압력으로 더 높은 온도로 밥을 지을 수 있게 된다.

물의 압력을 계속 올리면 어떻게 될까? 225 기압까지 올리면 끓는점이 372도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225 기압에서는 물이나 증기나 부피의 변화가 없게 된다. 즉 물이 증발해도 부피가 늘어나지 않은 채 증기가 되는 것이다. 이 특이점을 물의 임계점이라고 부른다. 물이 증발하여도 부피가 증가하지 않으므로 증기드럼이 필요 없게 된다. 그리고 아주 높은 온도와 높은 압력의 고온고압증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증기드럼 없이 튜브만으로 이루어진 보일러, 증기드럼 없이 튜브만 통과시키면서 가열과 증발과 과열이 모두 일어나게 하는 보일러가 관류형(One Thru Type) 보일러다.

내가 69년에 입사하여 처음 일했던 영월화력발전소는 5만 킬로와트급으로 일반형 보일러였고 70년에 전근하여 9년 가까이 근무했던 부산화력 3,4호기는 10만 5천 킬로와트급으로 벤슨형(Benson Type) 관류보일러였는데 보일러튜브 내벽, 특히 증발이 일어나는 지점의 보일러튜브 안에서 찌끼, 스케일이 많이 쌓여 달라붙어 열전달을 나쁘게 하고 결국 주로 이 부분이 찢어지고 터져서 새는 경우가 많았다.

벤슨타입 관류형 보일러가 출력에 비하여 보일러 크기가 작은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튜브가 쉽게 파손되어 물이 샌다는 점이 노내공기압력이 높아 연소개스가 밖으로 많이 새어나온다는 점과 함께 벤슨 관류형보일러의 큰 약점이기도 했다.

(아, 이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그 때 보일러 운전원 하면서 그 독한 아황산개스를 얼마나 많이 마셨던지, 그 생각하니 지금도 기침이 나오네.)

시간당 400여 톤의 보일러급수 중에서 심하면 5톤 10톤씩 새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전력이 모자라는 판에 발전소를 당장 세울 수도 없고 그냥 ‘못 먹어도 고’ 계속 운전을 해야 한다. 겨울철 보일러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가 유난히 희고 크게 뭉실뭉실 뿜어져 퍼져나가는 게 보이는데 그게 보일러에서 새는 물 때문이었다. 그래도 화력발전소 보일러는 웬만큼 새도 발전효율은 떨어지지만 운전하는 데 우선은 괜찮다. 급전사령실에 보고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에 발전소를 세우고 튜브를 교체하고 수리하면 된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원자력발전소 증기발생기 튜브는 조금이라도 누설하여 터빈발전기로 가는 증기에서 방사능이 검출되면 바로 경보가 울리고 발전소가 즉시 비상정지 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원자력발전소가 이런 문제없이 1년주기 무정지운전(One Cycle Trouble Free: OCTF)에 성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화력발전소들이 덩달아 자기들도 1년주기 무정지운전(OCTF)에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건 좀 아니다 싶다.

 

어쨌든 나중 80년대 들어 개량된 슐츠형(Shultz Type) 보일러가 개발되어 한전의 50만 킬로와트급 대형 신규화력발전소들에 채용되었다. 벤슨형(Benson Type) 관류보일러의 보일러 튜브 누설문제를 슐츠형 보일러는 증발부분에다 작은 드럼 같은 헤드를 집어넣어 튜브 안에서 일어나던 증발이 여기 작은 헤드 안에서 일어나도록 만들어 놓음으로써 스케일 때문에 튜브가 찢어지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참 좋은 아이디어다.

 

발전소 열효율은 카르노싸이클(Carnot Cycle) 이론에 의하면 고열원이 높을수록, 즉 주증기 온도와 압력이 높을수록 높아진다. 화력발전소에서는 금속재질만 따라준다면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압력과 온도를 높일 수 있고 열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물로 물을 데워야 하는 원자력발전소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원자로계통(1차계통)과 터빈계통(2차계통)을 완전히 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까 말한 대로 물은 225 기압까지 압력을 올리면 372도 이하에서는 증발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우라늄 핵분열을 일으키는 원자로 안으로 흐르는 원자로계통(1차계통)의 물은 증발하면 안 된다. 그래서 225 기압 이상 매우 높은 압력으로 가압하고 온도는 372도 이하(실제로는 340도 정도?)로 유지하여 증발되지 않은 액체상태로 순환시키면서 원자로에서 가열되어 증기발생기로 간 다음 튜브 안쪽으로 흐르게 한다,

그러면 튜브 바깥쪽으로는 2차계통(터빈계통)의 급수가 들어와 열교환이 이루어지고 증발이 일어난다. 물로 물을 가열하여 증발시키는 셈이다. 터빈급수가 증발되는 것은 2차계통(터빈계통)의 압력이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기발생기에서 발생하는 증기는 과열증기가 아닌 압력 70~80 기압, 온도 300도 미만의 포화증기이다. 그러나 워낙 원자로의 열발생이 크고 물과 증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그 거대한 터빈을 돌려 100만 킬로와트에 달하는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뭐, 다 아는 상식이지만 설명을 좀 해 보았다.

 

아무튼 신규 슐츠형 관류보일러를 채용한 화력발전소의 주증기 온도는 약 550도에 달하고 압력은 150~200기압을 넘는다. 원자력에 비하여 엄청난 고압고온이다. 보일러 노(Furnace) 안의 화염온도는 1,300여도나 올라간다. 그래서 보일러튜브는 600도, 700도를 넘나드는 고온에서 200기압이 넘는 높은 압력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일러 튜브는 고온 크리이프(High Temperature Creep: 철강재가 고온에서 갑자기 늘어져 파괴되는 현상)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고온 고압에 견디는 값비싼 크롬, 니켈 특수합금강을 쓰게 된다. 그런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보일러 튜브 중에서 온도가 비교적 낮은 부분은 좀 덜 비싼 재질을 쓰고 온도가 높은 부분은 값비싼 견고한 재질의 튜브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중 창원의 제관공장(보일러공장이라고도 부른다)에서는 보일러튜브를 벽체에 붙인 수냉벽 부분과 증발헤드와 튜브들을 조합한 부분 등으로 나누어 조립해서 발전소 건설현장으로 운반하고 건설현장에서는 이를 합쳐 용접하여 보일러를 조립하게 되는데, 한번은 보령화력이던가, 한중공장에서 용접해온 튜브들의 용접부위가 자꾸만 갈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한중의 용접사들이 가서 용접보수를 했는데도 또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그래서 한전과 한중 모두 원인을 밝혀내느라 법석을 떨었는데 나중에 밝혀진 것은 한중공장 자재창고에서 튜브를 불출할 때 담당직원이 재질이 다른 엉뚱한 튜브, 즉 저온용 튜브를 고온용 튜브로 잘못 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튜브 재질이 용접봉의 재질과 안 맞으니 용접해 놓은 부위가 자꾸만 갈라진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수많은 시행착오와 문제와 고난과 위기와 역경을 넘으며 한국중공업은 조금씩 조금씩 경험을 쌓으며 기술자립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너무 많은 희생과 지불의 대가였다.

.

'1. 한국중공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한국중공업 매각  (0) 2022.03.04
8. 쪼개진 터빈 샤프트  (0) 2022.02.22
7. 현가화지수  (0) 2022.02.22
6. 짜깁기 설계  (0) 2022.02.22
5. 빨간 실타래 로고  (0) 202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