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3. 한국중공업의 탄생

Thomas Lee 2022. 2. 17. 02:41

 

69년 그 때 마산 바다 건너편에 보이던 창원시 귀곡동 골짜기...

마산화력발전소는 80년대에 철거되고 아파트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69년에 입사하여 마산화력에서 교육받고 나서 나는 영월화력 석탄미분기운전원, 부산화력 보일러 운전원을 하면서, 또 군대 3년을 갔다 오고,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그렇게 10년을 보냈고, 그 다음 원자력건설부서로 옮기고, 해외훈련을 다녀오고, 영광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에서 5년 동안 일하고, 그렇게 치열한 20여년을 보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나고 내 나이 마흔 무렵인 88-91년경 나는 본사 원자력건설처에서 영광 3,4호기 주기기(원자로설비, 터빈발전기) 기술업무를 담당하면서 몇 년 동안 서울로부터 그 귀곡동 골짜기로 수없이 출장을 다니게 된다.

 

창원시 귀곡동 555번지, 한국중공업 창원공장...

마산에서 마산만 바다 똑바로 건너편에 있는 157만평 드넓은 부지, 연건평 16만평, 주조공장, 단조공장, 중기계공장, 기계공장, 중제관공장, 제관공장 이렇게 거대한 6개의 공장건물이 들어서 있고 터빈발란싱머신, 시험연구실, 주사무실, 정성관 등 부속건물과 숙소가 또 있고 한켠으로는 사원아파트단지가 있다. 공장입구 왼편으로는 삼성에 매각한 중기공장이 있다.

현대양행이 세계최대의 종합기계공장 건설을 목표로 1976년 착공하여 1982년 6월 완공한 한중 창원공장은 마산만 건너편 무학산 자락에 펼쳐진 마산 시가지를 건너다보며 항만시설까지 갖춘 한중, 아니 지금의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은 그 규모면에서 가히 세계최대의 단일공장의 하나이며, 국내의 중기계산업계의 판도를 좌우할만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97년말 기준으로 총자산 3조 3800억원, 년간매출 3조원, 종업원수 7,861명, 이 한중, 두산중공업이 되기 전의 한국중공업(한중)에 대하여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승진운이 참 없었다. 영월과 부산 화력발전소에서 석탄가루, 아황산가스, 석면가루까지 마시면서 10년 세월을 보내며 군대를 다녀오고 주경야독, 아니 주독야경으로 대학을 졸업한 다음 원자력건설부로 전근한 나는 그 해 있었던 대규모 초급간부선발시험에도 응시하지 못 했다. 부산화력에서 학교 다닌다는 이유로 인사고과점수를 나쁘게 받아 응시자격조차 얻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들고 어려운 고리1호기 복수탈염설비 증설공사 사양서 작성과 발주를 마치고 나서 1980년말 뒤늦게야 계장시험에 응시, 원자력 직군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나는 원자력 7,8호기(영광 1,2호기) 해외훈련요원으로 지원하여 1981년 말부터 10개월간 벡텔사가 건설중이던 미국 아리조나주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에서 원자력 7,8호기 건설기술훈련을 받았고 돌아와서 본사 원자력건설처에서 보조기기 구매기술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한중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83년 9월에 영광건설현장으로 발령받아 88년까지 5년간 영광 1,2호기 건설 기계기술과장으로 기계분야의 건설업무를 하면서 거기에서도 줄곧 한중의 기자재와 공급계약서와 한중사람들과 부닥쳐야 했다. 그리고 1988년 올림픽 하던 해 영광을 떠나 본사 원자력건설처 기술부에서 영광 3,4호기 주기기, 보조기기 기술업무를 담당하면서 또다시 한중과 씨름을 하게 되었고,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 제작상황 확인과 독려를 위하여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중공업 창원공장을 오르내렸다. 바로 이때 있었던 정부지시로 추진하던 한중경영진단과 민영화추진과 관련한 업무에도 나는 또 관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계속해서 울진 3,4호기 주기기(원자로 및 터빈발전기)업무, 그리고 1998년 한시퇴직으로 퇴직할 때까지도 나는 한중의 영향권과 그들의 사정권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다.

비단 나뿐이겠는가? 발전소 건설과 발전설비와 관련하여 한전사람 치고 한중과 상관없이 일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니, 내가 어찌 한중 이야기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의 나의 이야기는 거의 나의 기억에 의존한 것, 주워들은 기억 등에 의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한중의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서 약간의 자료와 수치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본사 어디엔가 아직도 처박혀 있을지 모르는 한중과 관련된 많은 서류와 자료들을 들쳐보면서 이 글을 쓴다면 보다 정확히 쓸 수 있겠지만 나의 기억력에 의존하다 보면 혹 착오나 잘못도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지 않은가?

 

한국중공업은 현대양행으로 1962년에 출발하였다.

설립자는 정인영씨, 바로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의 동생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몇 차니 몇 차니 하며 횟수를 거듭하면서 추진되고, 70년 여름, 경부고속도로 428㎞가 450억원의 공사비로 2년 반 만에 완공되고, 72년에는 고리에 원자력 1호기가 예정공사비 550억원(1978년 4월에 준공되었을 때 실제 공사비는 1,280억원이 되었다.)으로 “고리원자력, 공사비 550억원, 단군이래 최대공사, 수풍수력과 맞먹어”, 이런 신문기사와 함께 착공되고, 이어서 월성 2호기, 고리 2호기가 추진되고, 수출이 10억불을 넘어 100억불을 목표로, 그리고 백불 단위에 불과하던 국민소득 또한 1,000불 고지를 향하여 숨 가쁘게 줄달음치던 그 70년대에, 정인영씨는 현대양행 창원기계공단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청와대에 내민다.

 

그리고 이 야심의 계획은 당시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군무기현대화를 위한 방위산업과 중공업을 육성하려던 박대통령의 뜻과 맞아떨어져서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업고 시작되었다. 목표는 세계적 중공업단지 건설, 그러나 또 다른 목표가 있었으니 바로 방위산업으로서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본은 IBRD차관과 국내자본을 동원키로 하였고 정부의 차관도입 보증과 승인을 거쳐 IBRD로부터 8,500만불의 차관이 들어오게 되어 현대양행 창원공장의 대역사는 막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귀곡(鬼哭)의 시작이었을까?

 

내 기억으로 77년도엔가 우리나라는 드디어 100억불 수출과 1,000불 국민소득이라는 빛나는 목표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79년도엔가, 우리나라는 40기의 원자력발전소를 2,000년까지 건설한다는 실로 엄청난 계획을 발표하였다. 2,000년까지 40기라면 매년 4기씩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나간다는 뜻이니, 실로 입을 다물어지지 않는거대한 전원개발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야심찬 계획에 현대, 삼성, 대우 또한 조선소 건설로 뛰어들었다. 조선소는 왜? 조선소는 선박뿐만 아니라 바로 발전설비를 겨냥한 것이었고, 실제로 삼성중공업과 현대건설은 고리발전소의 크레인, 격납건물철판, 열교환기, 보조보일러 등의 기자재 공급에 뛰어들었으며, 김우중씨의 대우는 대우엔지니어링을 설립, 고리1호기 복수탈염설비 증설에, 그리고 동흥전기를 공기조화기 공급에 투입, 원자력산업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아, 그리고 내가 추진했던 고리1호기 복수탈염설비는 19억 5천9백 5십4만 4천원에 대우엔지니어링이 맡았었다. 이러한 재벌기업들의 경쟁은 곧바로 엄청난 과잉설비투자로 나타난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총성으로 박대통령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12. 12사태로 새로운 군부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듬해인 80년, 창원기계공단을 건설해오던 현대양행이 자금난을 이기지 못 하고 결국 부도를 내고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현대양행 창원공장 구성계획은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와의 협력관계로 기획되었다.

세계최대의 터빈 발전기 제작업체인 GE는 또한 터빈과 발전기의 회전자축을 주조, 단조로 생산, 공급해줄 파트너(좋게 말해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즉, GE는 정밀기계가공과 고난도 공정을 맡고, 공해물질을 배출하는 용광로나 용해로, 그리고 열처리, 황삭가공 등 3D(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단계를 맡아줄 해외의 소재공급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조와 단조 같은 분야는 또 GE의 전공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중은 이태리의 테르니社인가 스웨덴의 어떤 회사인가와 기술제휴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양행의 공장설비는 주조설비, 용해로, 전기로, 단조 프레스, 황삭선반, 수직 및 수평 보링머신 같은 거대한 공작기계들로 구성되게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철강산업, 중공업, 기계공업은 방위산업, 무기생산능력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철강재를 생산하는 주조설비와 단조설비, 특히 대용량의 단조설비는 대포나 탱크 같은 철강재류 무기의 소재를 찍어내는데도 매우 긴요한 설비인 것이다.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킬 때, 독일이 보유했던 단조 프레스가 7,500톤급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대양행의 창원기계공단 건설에 대단한 관심과 기대를 걸었음은 물론, 설비와 기계의 선정에까지 깊이 간여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북쪽 애들이 가지고 있는 프레스는 몇 톤 짜리래?”

“네, 5천톤 짜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하.”

“그래? 그럼 우리는 만 톤으로 하지 그래.”,

뭐, 이랬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창원공장은 지금 만 톤 짜리,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단조프레스와 또 4,200톤 짜리, 그리고 천 몇백톤짜린가 되는 단조용 프레스들을 들여오게 되었던 것이다. 시설규모가 당초계획보다 커진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주조 단조 열처리설비와, 그리고 거대한 선반, 플라노밀러, HBM(수평형보링머신), VBM(수직형보링머신)같은 소재제작용설비들이 창원공장에 설치되게 되었던 것인데...,

 

문제는 신군부의 등장 후, 80년 5.18 사태가 있은 다음 여름쯤, 현대양행의 부도와 함께 IBRD쪽에서 터져 나왔다.

현대양행이 부도를 내고 넘어지자 IBRD에서 한국정부로 강력한 이의제기를 해온 것이었다. 현대양행이 IBRD에 낸 사업계획서와 차관도입계약서에는 현대양행이 한국의 발전설비를 독점하는 조건으로 되어 있는데, 왜 삼성, 현대, 대우 등 다른 대기업이 모두 발전설비에 참여하고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정부와 현대양행이 차관도입 사기를 쳤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시정하지 않으면 8,500만불 중 미인출된 2,000만불의 차관공여 취소는 물론, 앞으로 한국에는 절대로 차관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신군부 정권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물론이다.

 

박정희 정권이 왜 독점이라는 조건을 걸고까지 현대양행의 IBRD차관을 들여오도록 허용하였을까? 방위산업의 이유에서였을까? 그런 현대양행이 그런 차관도입조건을 걸었다는 것을 몰라서였을까? 무심하게 넘겼을까? 현대양행이 속이거나 숨겼을까? 정치자금과 관련이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다만 그 뒤 신문에서 그런 추측기사들을 읽었을 뿐이다.

정인영씨는 붙잡혀 은팔찌를 차고 큰집에 들어갔었는데, 한 20일쯤 지난 뒤 그 동안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봐서 한 번만 용서한다고 풀어 주어서 나왔다. 아마도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 않나 추측된다. 정인영씨는 그 뒤 오랜 세월 동안의 투병과 와신상담 끝에 휠체어를 탄 채 컴백하여 90년경, 전남 해남에 한라 개스터빈공장 건설을 추진, 그의 발전설비에 대한 끈질긴 집념을 이루어보려고 하였는데.....,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 정부는 통폐합과 일원화로 설비투자의 중복과 투자낭비를 막고 산업합리화를 기한다는 목표로 강력한 구조조정 작업에 들어갔다. 중공업, 화학설비, 디젤엔진, 중전기기, 버스, 트럭 등 산업분야는 물론, 신문, 방송 등 언론까지 통폐합되고 구조조정 되었던 것은 우리 모두 기억하고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현대양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짓다 만 창원공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IBRD의 차관문제와 결부된 국가의 중대한 사안이 되었다.

현대양행이 벌려 놓은 건 창원공장만이 아니었다. 현대양행은 경기도 군포에도 공기조화설비와 열교환기 공장, 그리고 창원에 기계공장 말고도 건설중장비 공장을 옆에다가 또 짓고 있었다, 마치 대한민국 중공업과 발전설비를 독점, 석권하려는 듯이.

 

전두환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 통폐합이었다.

재벌기업들이 제각각 설비투자를 하였기 때문에 설비투자가 중복되어 효율적이지 못 하고 불필요한 손실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산업합리화 기준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승용차, 버스, 트럭, 건설용 중기계, 디젤엔진, 변압기 등 중전기 등, 각 산업분야의 통폐합조치가 진행되었다. 언론사들도 통폐합하였다. 동아가 버스를 하고 쌍용이 디젤자동차를 하고 효성중전기가 변압기를 하고 무슨 중공업이 디젤엔진을 하고.... 이런 식으로 교통정리를 하였다.

그리고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불러놓고 소위 빅딜을 요구하였다. “너희 둘이 결정해라, 발전설비를 할 테냐? 자동차를 할 테냐?”

자동차(승용차) 부분도 탐나는 분야였지만 당시 화력발전소들과 함께 2000년까지 원자력발전소 40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나온 만큼 발전설비를 독점한다는 것도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엇다.

현대와 대우는 자동차를 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이를 번복하고 발전설비를 맡겠다는 둥, 몇 차례나 오락가락 했다. 대우에서 자동차공장 인수팀을 만들어 현대자동차공장에 가는가 하면, 현대인수팀이 대우공장의 인수를 위하여 쳐들어갔다가 회장님의 결심이 바뀌면 또 그 반대편으로 우루루 몰려가곤 하였고, 이미 쓸 만한 기계나 값나가는 설비는 빼돌렸다는 둥, 별별 이야기가 다 흘러나왔다.

주인 잃은 현대양행 직원들도 우왕좌왕 했는데, 현대가 흡수한다 하여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에 갔다가 몇 달 동안 죽도록 고생하고 서러움 당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지금도 있다.

또한 당시 영광 1,2호기(원자력 7,8호기)의 건설현장에도 아직 기공식은 하기 전이었지만 현대와 대우가 건설중장비를 끌고 번갈아 들락거렸다.

“정주영 회장, 당신 동생이 하던 거니까 당신이 맡으시오.”

“싫소, 동생이면 동생이지 내가 무슨 책임 있다고 내가 해요?”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현대가 자동차를, 대우가 발전설비를 맡기로 결정한 것은 80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은 결정이 난 듯 했는데, 이번에는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창원 기계공장을 완공시키고 정상화하려면 최소한 2,000억원이 필요하니 정부가 이 돈을 지원해 주어야겠다고 또 들고 나왔다. ‘뭐야? 2,000억원이나 지원해 달라고?’ 정부는 이때 현대양행을 국영화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얌마, 2,000억원 대주고, 일원화해주고, 미쳤냐? 너 줄 바에야 정부가 직접 할란다.”

이렇게 하여 한국중공업은 탄생하게 된다.

1980년 가을인가 초겨울 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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