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4. "사장 바꿔서 해 봐!"

Thomas Lee 2022. 2. 17. 02:43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은 크게 몇 분야로 나누어서 진행한다.

우선 주기기(主器機)는 원자로설비(NSSS)와 터빈발전기(T/G)이다.

둘째는 주기기를 제외한 기타 보조기기(輔助器機, Balance of Plant: BOP)들이다.

그 다음 건설현장 시공(Construction)이다.

그 다음은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플랜트종합설계와 기술관리(Architectural Engineering)다.

그리고 발전소 준공단계에서 한전이 시운전(試運轉)을 하면서 설비계통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설비를 인수해 나간다.

그 외에도 비파괴검사, 사업관리, 금융관리, 핵연료 조달, 주변설비 등 많은 분야들이 있다.

 

1987년 준공된 영광 1,2호기의 총공사비는 2조 440억원(2기 합하여)이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분야별공사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략 원자로설비가 4-5천억원, 터빈발전기가 2천억원, 보조기기들이 5천억원, 벡텔사 기술용역비가 1천억원, 현대건설시공에 6-7천억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기억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는 1972년 550억원으로 웨스팅하우스와 계약되었는데 물가상승으로 1978년 준공될 때의 최종공사비는 1,280억원이었던가 그랬다. 1,280억원은 그야말로 ‘거저 주웠다.’에 가까운 무척 값싼 공사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값싸게 ‘주운’ 고리 1호기는 준공되던 1978년 그 한 해, 복수기 해수누출로 인하여 서른 몇 번인가 비상정지를 하면서도 무려 300억원의 순이익을 한전에 안겨 주었는데 그 300억원은 그 해 한전이 올린 전체이익금의 절반이나 되었다.

 

고리 1호기는 주계약자인 웨스팅하우스사가 발전소 전체를 책임지고 설계, 제작, 시공, 설계 모두를 책임지고 완성한 다음 한전에 열쇠를 넘기는 턴키방식(Tur Key)이었다. 물론 웨스팅하우스도 자신들이 전부를 다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웨스팅하우스는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를 담당하고 설계회사를 고용하고 시공자도 고용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어서 착공된 월성1호기(캐나다 중수로)와 고리2호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당시의 한국이나 한전의 기술수준은 일천하였고 경험은 전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리 3,4호기부터 한전은 인원을 웨스팅하우스와 백텔사 등을 통하여 해외에 보내어 기술을 배우게 하고 발전소 건설업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국내업체들을 참여시켜 해외기술을 도입하고 국산화를 높여나가는 노력을 하게 된다.

 

한전은 보조기기 분야에 특히 국산화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을 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수 백 개의 분야 페키지로 분류된 보조기기들을 해외품목(Case III), 국내업체 일부참여품목(Case II), 국산화가능품목(Case I)으로 나누었고, Case III, Case II 해외품목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벡텔사가 구매하고, 국산화품목(Case I)들은 서울에서 한전이 구입하도록 하였다. 한전이 구매하는 국산화 품목은 처음에는 안전등급이 낮은 일반품목들을 위주로 하였는데, 벡텔사가 작성한 도면과 기술규격서를 국내업체들에 보내어 사용토록 하고 국내업체가 제출한 입찰기술서를 벡텔에 보내어 검토 받고 한전직원들이 국내업체를 방문, 점검을 하고 지도를 하는 등, 당시에는 기술규격이나 코드, 품질관리나 절차서 같은 개념조차 제대로 없었던 국내업체들을 한전이 이끌어가면서 기술을 이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앞서 잠깐 이야기한대로 나는 입사한 지 10년이 지난 1979년 치러진 초급간부임용고시에 응시조차 못 했다. 부산화력에서 일할 때 대학교를 다니면서 Lee S S 계장님한테 찍혀서 인사고과 점수가 나빴기 때문이다. 한전의 인사고과는 철저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이 인사고과에 목이 매여 한전사람들은 상사에게 꼼짝도 못 한다. 꼼짝 못 할 뿐 아니라 말도 못 할 아부와 눈치가 필요했고 연말이면 하다 못 해 케이크 상자라도 들고 상사의 집을 방문하는 전통이 아마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터이다.

나는 이러한 하향일방인사고과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공정한 인사고과는 상사 뿐 아니라 동료와 부하직원들로부터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초급간부고시는 평직원으로부터 간부직원으로 승진하는 첫 관문으로 제한된 인원만 선발되는 시험이라 합격이 쉽지는 않았다. 부산화력이 있을 때 나는 수많은 선배직원들이 초급간부임용고시에 울고 웃는 모습을 보았었다. 아무튼 나는 79년 초급간부고시에 응시도 못 한 고참 직원으로 고리1호기 복수탈염설비 증설공사를 담당하였고, 80년에는 5.18 광주사태가 있었고, 그 해 말에야 오랜만에 치러진 초급간부임용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원자력직군에서 수석합격을 하여 계장이 될 수 있었다. 수석합격 해봐야 별 소용은 없었다. 모든 승진에서 앞 기수를 추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한전의 철저한 연공서열 제도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뒤늦은 계장이 된 나는 1980년 11월인가 12월에 영광 1,2호기 건설을 담당하는 본사 원자력건설부 공사3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전남 영광군 홍농면 계마리 517번지에서 영광 1,2호기가 원자력 7,8호기라는 이름으로 착공되었고 나는 군대에서 배운 챠트병 솜씨를 발휘하여 기공식 현장에서 한전 사장이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때 사용할 현황설명판 몇 장을 만들어서 건설현장으로 보냈다(이 땐 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거 없었다. 전부 손으로 쓰고 그렸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신군부가 현대 정주영 회장과 대우 김우중 회장을 불러놓고 현대양행을 누가 맡을 것이냐, 누가 자동차를 하고 누가 발전설비를 할 텐가 하는 빅딜이 있었고 건설현장에서 중장비를 끌고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일이 몇 번 있은 후에 대우 김우중 회장이 정부에 2,000어원 지원을 요청하자 ‘에라, 그럴 바엔 정부가 맡아 공기업으로 할란다.’, 해서 한국중공업이 탄생하게 된다.

 

아, 중요한 사건이 또 있었다. 신군부 정권이 한전에 대하여 처음 한 일은 한전을 공사화 하고 한전의 퇴직금을 줄이는 일이었다. 한전 뿐 아니라 석탄공사, 석유공사, 주택공사, 도로공사, 국책은행 등 모든 국영기업들이 퇴직금과 급여를 줄이는 대상 공기업들이었다. 그런데 다른 공기업 노조위원장들은 모두 피신, 잠적하였는데 한전 노조위원장만 등신같이 붙잡혀가서 퇴직금 적치개월수를 3분의 1 수준으로 줄이는데 합의하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풀려나왔다는 소문이었다. 그 바람에 퇴직금 많다고 소문났던 한전의 퇴직금은 그야말로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신군부정권은 한전의 주식 100%를 전부 매입하여 1981년 1월 1일부로 한국전력주식회사를 한국전력공사로 재출발시킨다.

 

나는 공사3과에서 1년 가까이 근무하였는데 이 때 원자력 7.8호기 건설요원 해외훈련에 지원하였다. 기계, 전기, 토목, 건축, 자재, 공사관리, 사무관리 등 분야별로 모두 25명 가량의 교육요원을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에 끼어 미국으로 가서 LA 다우니에 있는 벡텔사에서 2개월, 그리고 아리조나 피닉스 서쪽에 있는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에서 8개월, 도합 10개월간의 해외훈련을 받고 82년 9월에 귀국하여 이번에는 기전공사2과에 배치받게 되었다. 기전공사2과는 바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보조기기, 즉 Case I BOP를 구매하는 기술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 무렵 한전의 발전설비 건설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한국중공업이 한전으로부터 수주 받는 물량도 많지 않았다. 한전이 발주하는 물량은 한국중공업이 보유한 어마어마한 주단조설비를 가동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세계최대규모로 알려진 거대한 주, 단조설비는 그까짓 얼마 안 되는 한전물량을 ‘뚝딱’ 금방 찍어내고는 할 일이 없어져서 하품을 하고 다시 늘어졌다.

한중은 일감을 찾아 동남아로, 중동으로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아씨르 시멘트공장 건설을 수주했다.

아랍에미레이트에 가서 제벨알리 담수화력설비를 1억 달러에 수주해 왔다.

 

전두환 정부는 한중사장으로 박정기 사장을 임명하였다. 박정기 사장은 전두환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선후배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박정기 사장은 한중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한중의 경영정상화를 위하여 한전의 건설분야를 한중으로 넘겨달라고 청와대를 통하여 요구해 왔다.

그게 성사되었더라면 원자력건설처에 근무하던 나도 졸지에 한중으로 끌려갈 뻔 했다.

한전에서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한중의 요구에 대하여 한중에 한전의 건설파트가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조목조목 반박하여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그걸 다시 한중에 보냈고 한중에서는 한전의 건설파트가 반드시 한중에 필요하다는 주장을 재차 하여 왔다.

이렇게 몇 차례 지면으로 하는 핑퐁 논쟁이 계속되었다.

나는 또 군대 챠트병 때의 솜씨로 글씨를 예쁘게 잘 쓴다는 이유로 반박서면을 작성하는데 동원되었다.

몇 차례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한중의 이 요구는 무산되고 전두환 대통령의 기가 막힌 해결책이 나왔다.

“야, 너희들 싸우지 말고 사장이 자리 바꿔서 함 해 봐.”

졸지에 한국전력 성낙정 사장과 한중 박정기 사장이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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