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2. 마산화력 수습직원 훈련생

Thomas Lee 2022. 2. 17. 02:40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그 유명한 가곡 “가고파”의 고향 마산,

내가 69년 2월 입사하여 4주간 쌍문동 연수원에서 초등반 교육을 받고 빨간 색깔로 인쇄된 A4 반 장 크기의 수습사원 발령장을 받아들고 처음 간 곳이 마산화력발전소였다. 나는 중앙선 열차를 타고 고향 안동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마산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안동에서 중앙선 타고 영천으로, 다시 대구선 타고 대구로, 다시 경부선 타고 삼랑진으로, 삼랑진에서 다시 남해선으로 갈아타고 마산에 도착하니 하루가 저물었다.

 

마산화력....,

2만5천㎾ 짜리 석탄발전소 2기, 마산화력발전소는 잔잔한 마산 앞바다 한 켠 해운동이라고 부르는 동네 바닷가에 서 있었다. 마산만은 깊숙이 들어온 내해(內海)라 파도가 잔잔하였다. 무학산 산자락은 여인의 치마폭처럼 흘러내려 마산시가지를 담아 안고 있었고, 큰 호수처럼 생긴 마산만 가운데에는 돼지섬인가 하는 섬이 하나 동그마니 떠 있었다. 발전소 높다란 굴뚝 두 개에서 나오는 연기, 마산만 접안항에서 내린 석탄을 싣고 발전소 윗층으로 높이 올라가는 석탄 벨트컨베이어...., 발전소 정문 바로 맞은편에는 ‘무슨 Fly Ash’라고 간판을 단 조그만 시멘트공장이 있었고, 발전소 담벼락에는 “우리회사는 절대로 임금체불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하긴, 한전이 임금체불한다면 말이 되나? 발전소 뒤편 월영동에는 무슨 군부대가 있었고, 그 옆 산허리 고성으로 넘어가는 신작로에는 버스가 먼지를 날리며 힘겹게 넘고 있었다. 반대방향으로 발전소에서 거제도 방향으로 가면 바다 쪽 나지막한 산너머에 극동철강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어떤 작업원이 추락하는 철판에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나서 죽었다고 하숙집 아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하체는 저편에서 버둥거리고 상체는 이편에서 아우성쳤다는 끔찍한 이야기.... 극동철강을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결핵요양소가 있었고 그 옆에 가포 해수욕장이 있었다.

 

우리 수십 명의 수습사원들은 발전요원 교육을 받았다. 강의실은 매점, 오락실, 그리고 이발소가 붙어 있는 정문 옆 건물이었고 정문 반대편에는 독신자 숙소가 두 동 있었고 그 옆으로는 거대한 중유 저장 탱크 두 개가 있었고 저유탱크 옆 풀밭에는 클로버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가끔 거기 앉아서 네 잎 클로버 잎을 찾곤 했다. 담당 교육계장님은 키가 아주 크신 분이었다. 우리는 교재와 청사진 도면철을 받았고 강의를 듣고 나서 발전소 안으로 들어가 도면을 들고 배관을 따라 기기를 찾아 발전소 안을 돌아다녔다. 보일러, 터빈, 발전기, 석탄미분기, 집진기, 급수펌프, 보일러 드럼, 배전반, 공기에젝터, 급수예열기, 디어레이터..... 발전소 안의 통로와 계단들은 아래 위가 훤히 보이는 그레이팅이라 무서웠고 계단 핸드레일만 잡아도 전기가 찌릿찌릿 통할 것 같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발전소 안은 석탄먼지와 가스, 냄새, 소음, 그리고 후끈거리는 열기와 단 쇠붙이 냄새로 가득했다. 휴식시간에 신입사원들은 휴게실, 오락실에서 바둑을 두기도 하고 당구를 치기도 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바둑과 당구라는 놀이를 알게 되었다. 강의실 옆 휴게실에서는 “파란 물이 잔잔한 호숫가의 어느 날 사랑이 싹 트면서 꿈이 시작되던 날.....” 정훈희의 노래가 흘러나와 열아홉 살 우리 가슴을 아련한 설레임처럼 흔들어 주었다.

 

우리 신입사원들은 인근동네에 흩어져 하숙생활을 하였고 나는 월영동 군부대 입구 마을에 하숙집을 구해 성호와 함께 하숙생활을 했다. 명호와 규성이, 래헌이, 종현이는 발전소에서 좀 더 가까운 길가 집에 하숙을 정했다. 명호는 하숙집 할머니의 화투놀이 상대가 되었다. 육백(600)이라는 화투놀이였다.

"나 비조리 했다, 200."

"할매, 난 시까했다, 300..."

성호와 내가 하숙하던 집에는 나이 지긋하신 부부와 딸, 그리고 아들 하나가 있었다.

마산지역의 사투리가 심했다.

"그라모예, 하모예..."

우리는 하숙집 딸의 사투리를 흉내냈다, "그라모! 하모!"

갑자기 이 동네에 신입사원들이 많이 들어오다 보니 참 별 일이 다 있었다. 한 번은 어느 하숙집에서 야매 문화영화를 상영한다고 해서 호기심에 가보았다. 무성 흑백 도색영화였다.

 

4월 5일 식목일에 난데없이 눈이 내렸다. 우리는 일요일에 버스를 타고 진해 벚꽃구경을 다녀왔다. 얼마 후 안동에서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하숙집 아저씨를 모시고 마산시장 횟집으로 가서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식사대접을 하셨다. 나도 따라갔는데 거기에서 난생 처음 멍게의 쓴 맛을 보고 코처럼 흐물흐물한 굴을 먹어보았다. 아버지는 전의 이가라고 당신을 소개하셨고 하숙집 주인 아저씨는 함안 조씨로 생육신 중 한 분(조려 선생)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소위 뼈대 있는 양반가문이 만났다고 두 분은 집안내력 이야기에 신이 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는 열아홉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큰아들이 안쓰러우셨던지 머나먼 천리길 마산에 아들을 두고 발걸음이 안 떨어지셨는지 아끼시던 시계를 벗어 내 손목에 채워주시고 고향으로 올라가셨다.

 

수습기간 3개월 동안 우리는 일당 300원씩을 받았다. 한 달 6.900원, 7,200원, 그걸로 하숙비 4,500원 내고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3개월 수습기간이 끝나자 월급이 갑자기 2만원이 넘었다. 2만원! 굉장한 돈이었다. 마산시내의 웬만한 양복점, 시계방, 당구장, 구두방, 양품점 주인들은 모두 와서 우리 신입사원들에게 굽신굽신 인사를 하였다, 부디 이용해 주시라고, 잘 부탁한다면서 명함들과 안내장을 내밀었다. 한전직원의 위력은 그 때 그렇게 대단했었다. 나는 당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발전소 앞 당구장이 나랑 명호랑 규성이와 용석이,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몇 친구들의 단골당구장이 되었다. 7월이 되어 회사가 가포해수욕장에 체력단련장을 개설하자 나는 해수욕장에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여자처럼 피부가 하얗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좀 태워보려고.... 그 때 마산은 길이 참 좁았다. 마산의 그 해 시정목표는 ‘길 닦는 해’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아폴로 우주선이 지구에서 38만㎞ 떨어진 달에 착륙하였고 암스트롱은 인간의 발자국을 거기에다 남겼다. 나는 그 역사적 사건을 발전소인근 다방에서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지지직거리고 흔들리는 TV화면으로 지켜보았다.

 

발전소에서 시내를 지나 마산 북쪽 끝에 가면 바다쪽으로 간척지 너른 공터가 있었고 진영 방향으로는 한일합섬 공장이 있었다. 여러 동의 커다란 공장 건물에는 수많은 여공들이 일하고 있었고 하숙집 큰딸도 거기에서 일한다고 했다. 마산시내에서 마산만 건너편을 바라보면 창원시 귀곡동 골짜기가 보였다. 내가 그 때 그곳이 어디인지 알 턱도 없었고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 때는 그게 어디인지 알지 못 했지만 거기가 경남 창원시 귀곡동 555번지, 뒷날 현대양행 창원공장 거대한 한국중공업, 지금의 두산중공업 공장이 들어설 곳이었다. 왜 그 골짜기 동네 이름이 귀곡동(鬼哭洞)일까? 귀신(鬼神)이 울었다는 걸까, 귀신이 곡(哭)할 노릇이 벌어졌(진)다는 걸까? 그 동네는 한국전력으로서는 정말 귀신 곡할만한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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