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6. 짜깁기 설계

Thomas Lee 2022. 2. 22. 10:30

6. 짜깁기 설계

 

미사일에 맞아 269명의 목숨이 어두운 사할린 밤바다에 꽃잎처럼 흩날려 떨어진 KAL기 피격사건이 일어난 것은 1983년 9월 1일인가 그랬고, 그 날 나는 초급간부 교육을 마치고 연수원에서 나왔고, 이삿짐을 꾸려 가족을 데리고 머나먼 전라도 영광으로 내려가 9월 3일엔가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 기계과 기술계장으로 근무하도록 발령을 받았다.

내 나이 서른세 살, 아내는 서른 살, 아들은 일곱 살, 딸은 세 살 때였다.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 기계과 기술계장으로 일을 시작하고 며칠 지난 10월 9일 한글날이자 일요일, 아웅산 폭탄 테러가 터졌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영광 2호기 격납건물 공사도중 600톤 링거크레인이 부러지면서 돔철판이 떨어지는 대형사고가 났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의 험난한 삶.....

나는 1988년까지 5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했고 수많은 일을 겪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어쨌든 영광 건설현장 거기에서도 나는 한중에서 제작해온 물품과 한중에서 파견 나온 인원들을 대하였고 한중에서 저지른 제작결함과 문제들을 또 다루어야 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고 영광 1,2호기는 총공사비 2조 440억원으로 준공되었고, 30대 초반이던 나는 30대 후반이 되었고, 1988년 4월엔가 5월엔가 나는 다시 본사로 픽업되어 원자력건설처 기술1부로 발령 받았다. 바로 영광 3,4호기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 때 원자력건설처장은 허S 처장님이었고, PM은 박YT님이었고, 나의 직속상사인 기술1부 부장은 나중에 한수원 사장이 된 이JJ님이었다.

 

영광 3,4호기.......!

80년대 중반의 시대상황은 그랬다. 미국의 원자력산업은 79년 드리마일 아일랜드 사고, 86년 체르노빌 사고 후 강화된 안전기준과 이로 인한 건설비 폭증의 여파로 극도로 침체, 아니 중단되어 버렸고 세계원자력계를 주름잡던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엔지니어링, 백텔 같은 미국의 원자력관련 업체들은 경영난으로 빈사상태에 빠졌는데 한국은 과감하게 원자력건설을 계속하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기를 한국은 오히려 원자력기술자립의 기회로 삼았다.

 

정부의 원자력기술자립 의지도 있었지만 박정기 사장은 해외 원자력산업계가 일을 찾아 헤매는 지금이 한국이 유리한 계약조건을 관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영광 3,4호기를 국내업체들이 주계약자가 되고 해외업체들이 하도급계약자가 되도록 하는,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사상초유의 희한한 계약으로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그 동안 한국의 원자력건설을 주도해왔던 웨스팅하우스와 벡텔사를 기술이전에 소극적이라 하여 탈락시켰다.

기술도 경험도 없는 한국중공업이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의 주계약자가 되고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와 제너럴일렉트릭(GE)이 쪽팔리게도 한국중공업의 하도급 계약자가 되었다.

한국전력기술(주)가 발전소 전체설계를 맡는 플랜트종합설계 주계약자가 되고 벡텔을 탈락시키고 이름도 생소한 싸전트 앤 런디사(Sargent & Lundy)가 한국전력기술(주)의 플랜트종합설계를 돕는 하도급사가 되었다.

원자력계통설계의 기술전수를 위하여 한국에너지연구소(나중 한국원자력연구소로 개칭)가 원자로설비 계통설계 주계약자가 되었다. 한필순씨가 연구소 소장이었다.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도 설비의 설계와 성능보증, 핵심부품 등은 CE와 GE가 담당, 책임지도록 하고 한국중공업은 한국중공업이 제작가능한 부분을 CE와 GE의 기술지도하에 제작하도록 하였다.

선생님들이 하도급사가 되고 학생들이 주계약자가 된 셈이다.

그리고 해외업체들의 국내업체로의 기술자료 이전과 인원의 교육훈련에 필요한 비용은 기술자립비라는 이름으로 계약에 넣어 한전이 따로 지불하도록 했다.

현장시공은 그대로 현대건설이 맡게 되었다.

 

각 계약의 계약서는 한글과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한글과 영문계약서의 뜻이 상충되거나 모호할 때는 한글계약서가 우선이라고 계약에 명시하여 넣었다. 계약내용에 관한 이견이 해결되지 않을 때는 한전의 해석에 따르고 그래도 이견이 해소되지 않을 때는 한국의 법원에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방적 계약은 당시 미국의 원자력업체들이 이렇게라도 일감을 구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원자력기술자립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향하여 국내업체들에게 어떻게 기술전수와 이전을 해주느냐가 또 계약에 포함되었다.

CE와 GE, 그리고 Sargent & Lundy사는 자신들이 가진 모든 관련기술을 모조리 국내업체들에게 이전, 전수해야 한다. 설계도면, 계산서, 기술자료, 전산코드까지 다 넘겨주도록 했다.

한국에너지연구소(한원연)라고 했다가 나중 한국원자력연구소(역시 한원연)로 이름을 바꾼 원자력연구소가 원자로설비 계통설계와 공동설계 주계약자가 되었다. 연구소가 사업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아무튼 CE는 원자력연구소에 관련도면을 넘겨준다, 원자력연구소는 이 도면을 가지고 다시 설계를 수행한다, 말하자면 복습하고 베끼면서 공부하는 식으로 설계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원자력연구소가 CE가 보내준 자료를 가지고 설계를 진행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방법, know-how, know-why 등이 있으면 이를 CE에 질의할 수 있고 CE는 이에 응답하여야 한다, CE눈 설계계산공식이나 전산코드도 넘겨주어야 한다, 원자력연구소가 설계를 마치면 이를 CE에 보내어 제대로 한 것인지 검토를 받는다, 최종설계에 대한 책임은 CE가 진다, 그런 다음 원자력연구소는 이를 한전에 제출하고 한중이나 관련업체에 주어서 제작에 들어가게 한다....., 이런 식이었다.

이건 그야말로 중간에 끼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받는 식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수십 명의 박사, 석사들과 설계연구요원을 선발하여 미국 커네티컷주 하트포드 북쪽 윈져(Windsor)라는 곳에 있는 CE 본사에 보내어 1년, 2년씩 공부를 하도록 했다.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은 거기에서 미국생활을 즐기고 Made in USA 미국시민권자 자녀들을 생산해서 데리고 귀국하기도 하였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수가 100여명을 넘었단다. 미국에서 의료비는 매우 비싸다. 출산비용도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의료보험에 가입해서 아이를 낳고는 얼마 후 귀국해버리니 의료보험회사들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 바람에 미국의 의료보험사들이 커넥티컷주 한국인들의 의료보험 가입을 기피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내려 온다.

 

한중의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도 비슷했다. 한중은 원자로설비 기기설계 제작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인원을 선발하여 CE와 GE에 파견하고 도면과 기술자료, 전산코드 등 기술을 도입, 전수 받도록 했다.

플랜트종합설계를 맡은 한국전력기술(KOPEC)도 마찬가지였다. Sargent & Lundy사가 가진 모든 기술자료와 전산코드 등을 도입하고 Sargent & Lundy 사가 검토, 지원을 하도록 했다.

 

기술 없는 국내업체들에게 과외선생들을 붙여서 기술을 가르쳐가면서 건설하는 원자력발전소, 이게 영광 3,4호기였다.

이에 따른 비용은 한국전력이 모두 부담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원자력연구소 계통설계 계약금액은 550억원인가 되었고 그 외에도 공동설계비(JSD)로 원자력연구소와 CE에 지불되는 돈이 또 있었고, 그리고 기술도입비로 300억원 넘는 금액이 추가로 지불되었던 것 같다.

한중 원자로설비와 한중 터빈발전기도 기술도입과 인력의 해외훈련을 위하여 300억원과 100억원이 넘는 기술도입비가 각각 책정되어 계약에 포함되었고, 한기 플랜트종합설계에도 싸전트 앤드 런디로부터의 기술도입을 위하여도 별도로 300억원 가량이 지불되었으니 한전이 부담한 기술도입비는 모두 1,000억원을 넘었다.

나는 한중 주기기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한중의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 기술도입비를 집행했다.

기술도입비는 한중이나 원자력연구소, 한기가 인원을 선발하여 미국에 훈련 받으러 가면 한전이 비용을 주고, 설계, 기술자료와 전산코드를 받아왔다고 보고해오면 또 기성고 형식으로 돈을 주는 식이었다. 한중 본관 옆 식당건물 지하층은 한중이 CE와 GE로부터 받아온 기술자료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정작 한전인력은 예전에 가던 해외훈련도 못 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기술도입비 지불은 명백히 위법이었다. 도입된 기술이 한전에 납품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의 보유자산이 된다는 점에서 예산회계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즉 기술자립도 좋지만 그건 국내업체들이 스스로 해야지 한전이 이러한 비용까지 지불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상 문제는 원자력기술자립이라는 국가적 목표 앞에 덮이고 만다.

“법률위반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기술을 도입한 국내업체들이 기술자립목표를 달성하고 보다 저렴해진 공급금액으로 그 이익을 한전에 되갚아주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므로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우리나라는 원자력기술자립 못 합니다.” 산업자원부 차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또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력발전소의 설계를 할 때는 맨땅에 헤딩하듯 백지상태에서 수행하는 게 아니라 앞서 건설된 참조발전소의 설계를 가져와서 참고하기도 하고 적용하기도 하는 방법으로 한다. 백지상태에서 발전소 설계를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기존발전소의 설계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기준으로 하거나 참조해서 영광 3,4호기를 설계하느냐 하는 문제는 발전소설계와 주기기 제작, 건설 등을 맡는 업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발전소의 용량과 성능, 안전성을 좌우하는 핵심조건이 되므로 계약에 이를 미리 정한다.

영광 3,4호기의 설계는 해외업체들의 요청에 따라 이렇게 결정되어 진행되었다.

- 원자로설비의 구조와 발전소 구성의 설계는 미국의 팔로버디 Verde 발전소를 참조한다.

- CE 원자로 노심 설계는 브레이드우드 발전소를 참조한다.

- GE 터빈발전기는 카토바 발전소,

- 재열기(MSR)는 라살레 발전소를 참조한다.....등.

그런데 이러한 참조발전소를 기준으로 하는 설계는 국회에서 “짜집기 설계”라는 공격과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다. 거 참, 짜집기가 어때서? 원래 원전설계는 다 짜깁기로 하는 건데.....

 

이러한 영광 3,4호기의 “짜집기 설계”는 훗날 한국형 원자로(신고리 1, 2, 3, 4, 신한울 1, 2 등) 및 아랍에미레이트에 수출된 APR 1400 원전설계의 모태가 된다.

그것은 영광 3,4호기의 ‘짜집기 설계“가 1300 MW의 팔로버디 원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형 원전은 바탕설계가 팔로버디와 같은 1300MW였고 출력은 1000 MW급인 브레이드우드, 카토바, 라살레 같은 발전소들의 설계를 따왔기 때문에 기본설계에 많은 여유가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원자로와 터빈발전기만 좀 더 큰 걸로 바꾸어주면 1300 MW급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나아가서 미국의 설계가 원래 워낙 넉넉한 여유를 주는데다 그간의 기술발전으로 효율이 증가하여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출력과 용량을 약간 더 늘려 1400 MW급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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