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중공업 이야기

5. 빨간 실타래 로고

Thomas Lee 2022. 2. 17. 02:47

 

성낙정 사장은 한전출신으로 한전 사장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성낙정 사장 후 유일한 한전출신 한전사장은 이종훈 사장이다.)

그 성낙정 사장이 한전사장 얼마 하지도 못 하고 졸지에 한중 사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성낙정 사장은 한중 사장으로 옮겨가서 한중의 방대한 공장설비를 매각, 정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경기도 군포의 공기조화기, 열교환기 제작공장을 금성전선인가 대우인가 경원세기엔가(기억이 가물가물한다)에 매각하고 창원공장의 건설중장비 공장을 삼성에 매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자구노력에도 한중의 경영은 험난한 태산준령의 연속이었다.

 

한 편 박정기 사장은 한중을 떠나면서 “나는 한중을 떠나지만 관중석에서 여러분을 계속 응원하고 지원할 것입니다.”라고 이임사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한전에 와서 한중 사장을 하겠다는 건가?”

막상 한전사장으로 온 박정기 사장은 한중에 비할 수 없이 방대한 규모와 진취적인 기업문화를 갖춘 한전에 반하였다.

박정기 사장은 한전 직원들의 기를 살리고 자긍심을 고취하여 활기찬 회사 분위기를 만드는데 노력하였다.

“세계로 나아가는 초일류 기업 한전”.

“걷지 말고 뛰자.”

“살 맛 나는 한전을 만들자”

“일과 시작 전 5분간 명상”.......

우리에게는 박정기 사장의 그러한 캐치프레이즈와 행동강령이 영 거북하고 어색했다.

“걷지 말고 뛰자고? 여기가 군대인가?”

“살 맛 나는 한전? 고기 맛 나는 한전이 아니고? 이러다 피 맛 나는 건 아닐까? ”

날마다 아침 일과시간이 시작되기 5분 전에 스피커에서는 절간에서나 어울릴 명상곡이 흘러나왔고 전 직원들은 눈을 감고 억지로라도 5분간 명상을 해야 했다.

 

어두침침하고 짙은 초록색 빛깔의 통근버스 색깔이 밝은 연분홍바탕에다 빨간색 노랑색으로 예쁘게 바뀌었다.

짙은 곤색이던 작업복도 사막지대 군인이 입는 황갈색 군복 비슷한 걸로 바뀌었다. 상의를 하의 안에 넣고 바지 호주머니도 없애서 손을 아예 호주머니에 넣지 못 하게 만들었다. 호주머니에 손 넣고 빈들빈들 걷지 말고 뛰어다니라는 거였다.

회사의 로고도 바뀌었다. 원래 한전의 로고는 번개 치는 세 줄 모양에 원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걸 바꾸어서 핵분열을 의미하는 빨간 동그라미가 둘로 나누어지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미래를 지향하는 진취적 로고라고 했다. 붉은 색 KEPCO라는 글자도 새로 디자인 됐다. 회사의 이미지 쇄신인가 의식쇄신인가 뭐라나, CIP인가 뭐라나 했다.

바뀐 로고를 보고 어떤 직원은 로고가 어째 빨강색 뜨개실 뭉치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떤 직원은 회사가 쪼개지는 것 같아 어쩐지 불길하다고 했다.

아무튼 이 새 로고는 지금도 한전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언젠가 인터넷으로 보니 옛날 한전 로고는 어느 다른 회사가 주워다 자기네 회사 로고로 쓰는 것 같았다.

 

직원들의 직위명칭도 바꿨다. 십년, 이십년 승진이 안 되는 인사적체 속에서 직위명칭이라도 높이자는 것이었다. 계장이던 나는 졸지에 과장이 되었고, 우리 과장님은 부장님이 되셨다. 본사의 차장님들은 부처장님들이 되고, 높은 부장님들은 처장님이 되셨고, 집행간부님들은 전무님들이 되셨다. 봉급도 안 올려주면서 직위 이름만 올려준 것이었다.

어제까지 과장님이라고 부르다가 부장님이라고 부르려니 참 어색했다. 어제까지 계장이었던 나를 직원들이 과장님이라고 부르니 계면쩍었다. 부처장이라고? 천사장은 없고?

 

또 박정기 사장은 국가대표공기업인 한전이 사옥이 없어 셋방살이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삼성동 167번지 일대의 넓은 부지를 매입하여 본사 사옥건설츨 추진하였다.

원래 한전본사 건물은 을지로입구에 왜정 때 지은 튼튼한 6층 빌딩이었다. 그러나 조그만 6층짜리 빌딩 하나로 한전의 본사 조직과 인원을 전부 수용할 수가 없었다. 1961년 7월 1일에 삼사통합으로 발족한 한국전력주식회사는 인원과 조직이 늘어나자 바로 옆에 또 6층 건물을 신축하여 각 층마다 통로를 만들어 구관, 신관 두 건물을 연결하여 사용하였다. 내가 입사하던 69년 2월에도 우리는 그 신관 6층에 있는 강당에서 입사식을 거행하였다. 쌍문동 연수원에서 회사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100명이 넘는 신입사원들이 신관 6층 강당에 모여 대기하였는데 정작 정래혁 사장님은 불참하시고 이사님이 대신 입사식을 주재하였다.

 

70년대 들어 본사의 인원과 조직이 계속 늘어나자 회사는 시청 맞은편에 있는 플라자빌딩의 몇 층을 빌려서 화력발전분야 부서들을 입주시켰다. 또 원자력부서가 신설되고 인원과 조직이 늘어나자 퇴계로의 한 빌딩을 통째로 빌려서 원자력부서들을 거기에 입주시켰다. 79년에 내가 부산화력에서 본사 원자력건설부로 전입해왔을 때 원자력부서들은 퇴계로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는 식권을 들고 퇴계로 지하도를 건너고 명동거리를 지나 을지로입구 본사건물 지하층 식당까지 걸어가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로, 을지로 구석진 골목 안에 있는 가정집 같은 건물을 빌려서 거기에다 자료실이나 특수부서들을 입주시키기도 했다. 한전본사가 그야말로 이곳저곳 셋방살이를 하는 꼴이었다.

 

그러다가 79년 가을 한전은 을지로건물을 수화력부서, 중앙급전사령실과 배전사업부서, 구매부서 등에 넘겨주고 여의도로 이사를 했다. 내가 살던 곳은 잠실 주공1단지 13평 연탄아파트였는데 매일 아침 통근버스가 우리를 실어 여의도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차, 통근버스를 놓치는 날이면 택시를 타고 출근해야 했는데 택시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통근버스가 한강을 끼고 올림픽대로를 달릴 때 차창 밖으로 보던 한강은 공해와 오염이 얼마나 심했던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한겨울에도 쉽사리 얼지 않았다. 퇴근 때도 통근버스가 다녔지만 그건 일찍 퇴근하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거고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우리 원자력부서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밤늦게 퇴근하여 여의도에서 영등포로 건너온 다음 잠실까지 버스를 타고 퇴근하곤 했다. 어쩌다 더러 퇴근버스를 타고 퇴근하기도 하였는데 어느날 내가 탄 퇴근버스는 한강북쪽 강변북로를 타고 성수대교를 지나 강남에 직원들을 내려주고 잠실을 지나 천호동까지인가 갔는데, 성수대교를 지날 때, 아, 나는 찬란한 석양을 보았다.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서쪽 하늘과 한강을 붉게 물들인 그 환상적인 석양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아름답게 남아있다.

 

여의도로 옮긴 한전....., 사장실과 주요간부집무실, 기획부서, 영업부서, 감사실 같은 부서들은 마포대교 바로 옆에 신축한 건물에 입주하였고 원자력부서들은 KBS 맞은 편 20층이 넘는 전경련 건물의 여섯 개 층을 빌려 거기에 입주하였다. 여기서도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한참을 걸어 본부건물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고 사장님이나 윗분들의 결재를 받거나 감사실 결재를 받으려면 또 거기까지 걸어가야 했다. 본부건물 앞에는 커다란 그물을 덮은 골프연습장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닭장 같은 그물망 안에서 뚝딱거리며 조그만 공을 치고 있었다. 그 전경련 빌딩에서 근무하던 중 나는 고리1호기 복수탈염설비증설공사 추진업무를 수행했고, 그 해 79년 10.26이 있었고, 12.12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5.18 광주사태가 있었고, 나는 초급간부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계장이 되었다.

다시 81년엔가 이번엔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맞은편 한라빌딩을 거의 통째로 얻어 또 이사를 했다. 이 건물은 나중에 한전이 사옥을 지어 나가자 한전기술(주)가 주인(?)이 되었다. 성낙정 사장과 박정기 사장이 자리를 맞바꾼 것도 우리가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건너편 한라빌딩에 있을 때였다.

 

박정기 사장은 정권의 실세답게 한전의 사옥건설을 밀어붙였다. 삼성동 무역회관 앞에 통 크게 부지를 매입한 다음 통 크게 사옥건물 설계를 밀어붙였다. 곧 우리나라에도 마이카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전 직원이 주차할 수 있을 만큼 넒은 주차장이 있어야 한다면서 드넓은 주차장을 확보하도록 했다. 우리가 아직 마이카 시대 꿈도 꾸지 못 하였을 때였다. 국내최대공기업 한국전력답게 사옥도 웅장해야 한다면서 30층 높이인가로 설계를 추진했는데 정부의 견제로 밀고 당기다가 결국 20층으로 타협되었다. 박정기 사장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한전은 그 후로도 계속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 하였을 것이다.

그 한전이 일곱 토막으로 쪼개어지고 본사는 머나먼 전라도 나주 땅으로 귀양가고 쪼개어져나간 한수원과 발전회사들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질 줄이야, 그 드넓은 한전본사 부지가 10조원에 현대자동차에 팔려나갈 줄이야 그 때는 어찌 알았으랴.

 

한전사옥 이야기가 길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한전사장과 한중사장이 자리를 맞바꾸고 정부의 산업합리화기준이 나오고 한중의 본격적인 한전 젖빨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었다.

“한국중공업이 정상화될 때까지 한전은 모든 발전설비를 한국중공업에 우선 발주한다. 보일러, 터빈발전기 원자로설비 등 주기기는 한중에 발주한다. 보조기기는 한중분으로 분류된 기자재는 한중에 수의계약으로 발주하고 한중분으로 분류되지 아니한 일반보조기기나 기자재는 한중이 참여의사표명을 하면 한중을 입찰에 참여시켜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국중공업 정상화 방침’이며, ‘발전설비 일원화’요 ‘산업합리화기준’이다. 그리고 이 정부의 방침은 거의 모든 국내의 다른 업체의 기계류 발전설비 참여를 봉쇄하고 근 20년 세월 계속된다.

한국중공업 정상화방침을 결정한 정부의 내부결재문서 사본이 공문서에 첨부되어 한전에 내려왔다. 장관들과 총리가 서명한 싸인들은 도망갈 구멍 찾는 쥐새끼들처럼 네모칸 귀퉁이에 쪼그맣게 쭈그리고 있었고 ‘전두환’이라는 싸인은 오른쪽 상단의 제일 큰 네모칸이 비좁아라 커다랗게 휘갈겨져 있었다.

 

한중이 한전의 상전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경쟁 없는 수의계약, 달라는 대로 주는 발주, 세상에 이런 일방통행식 부당거래도 있을까? 한전은 한중이 하겠다고 하면 무슨 품목이든 한중에 발주하거나 입찰에 참여시켜야 했다. 한중은 발전설비를 수주해서 직접 제작 공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내업체들에 하도급을 많이 주었다. 수의계약품목들은 비싸게 수주 받고 다른 업체와 경쟁하는 품목들은 덤핑으로 입찰해서 따갔다. 심지어 발전소 사택, 전시관공사도 덤핑수주로 따낸 다음 하도급을 주기도 하였다. 영광원자력 전시관은 이런 식으로 한중이 따간 다음 너 댓 차례 하도급으로 내려갔는데 이 바람에 공사를 마치는데 한전현장의 감독들이 애를 먹었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중은 경영정상화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기설비를 만드는 효성전기, 디젤발전기를 만드는 쌍용중공업, 공기조화설비를 만드는 동흥전기, 펌프 만드는 삼신펌프, 스테인리스 배관자재, 구리배관 자재 생산하는 삼미, 풍산, 밸브를 만드는 삼진밸브 같은 한중과 분야가 다른 업체들은 영향을 덜 받았지만 발전설비를 수주하려던 국내업체들은 죽을 맛이었다.

한중수의계약품목은 국내업체들에게는 아예 입찰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입찰경쟁품목에서는 한중과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몇몇 업체들이 저항을 하고 한중에 맞서 출혈경쟁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구매를 담당한 영광 1,2호기 보조기기 품목들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몇 있었다.

영광 1,2호기 중앙해수냉각기(Central Chiller)의 경우 우리가 예상한 적정가격은 17억원 수준이었는데 한중이 10억원도 안 되는 헐값으로 입찰하였다. 그런데 경원세기가 6억9천만원으로 더 낮은 금액으로 입찰하여 한중을 물리치고 수주에 성공하였다. 한중을 이기고 수주에는 성공하였지만 경원세기가 결국 물품을 제작, 납품하고 수억원이 넘는 손해를 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보조보일러의 경우 한전이 예상한 가격은 약 7억원이었다. 그런데 한중은 3억 몇 천만원으로 입찰하고 현대중공업은 내가 질쏘냐, 2억 5천만원에 입찰하여 수주에 성공하였다. 역시 수억원의 손실을 보았다.

한중에 맞서지 않은 약삭빠른 업체도 있었다. 물처리설비와 복수탈염설비 전문업체인 한국정수공업은 한중과 맞서지 않고 한중이 수주하도록 은근히 도와준 다음 한중으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방법으로 실속을 챙겼다.

생각해 보라. 이 한중경영정상화방침이 거의 20년 가까이 계속되었으니 다른 국내업체들이 어찌 되었겠는가?

 

현대양행, IBRD차관으로 탄생하여 적자에 허덕이다가 한전과 무수한 국내업체들의 희생을 통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아 두산중공업이 된 그 한국중공업은 국가와 국민에 막중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

나는 25명이 넘는 원자력 7.8호기 건설 해외교육요원에 끼어 1981년 11월에 미국으로 갔고, 벡텔사와 팔로버디 원전건설현장에서 훈련을 마친 다음 1982년 9월에 돌아와 본사 원자력건설부 기전공사 2과에서 1년 동안 영광 1,2호기 보조기기 구매기술업무로 일한 다음 결국 “해외훈련인원 현장배치 원칙”에 따라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영광 건설현장으로 내려가기 전 1 주일간 연수원에서 그 동안 미루어졌던 초급간부 기본교육을 받았다.

그 연수원 교육이 끝나던 날 무서운 소식이 전해졌다. “사할린 KAL기 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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