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22. 동계훈련과 유격훈련

Thomas Lee 2022. 4. 27. 21:52

우리 102 야전공병대대는 도로공사, 벙커공사, 군부대 조성 및 막사 건설공사를 많이 했다. 74년 무렵부터 월남에서 맹호부대, 백마부대 같은 부대들이 대거 철수하여 귀국하였기 때문에 건물과 막사를 건축하고 연병장과 길을 닦는 부대조성공사가 많았다. 본부중대 수송부는 수십 대의 트럭과 덤프트럭 찦차들을 운용하는 운전병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장비부는 불도저, 그레이더, 페이로더, 트레일러 같은 중장비를 운용했다. 이들은 작업중대 병력과 함께 작업장에 투입되었다가 공사가 끝나면 차량과 장비를 끌고 복귀했다.

 

우리 부대가 맡은 공사는 직영공사와 도급공사로 나누어져서 진행되었다. 부지정지공사나 도로공사, 벙커공사 같은 건 직영으로 하고 건물과 막사를 건축하는 도급공사는 주로 한신공영이라는 민간회사가 맡았다. 전체공사 지휘와 관리는 우리대대 정보작전과장이 총괄하였다. 상급부대에서 도면과 설계서, 공정표가 만들어지고 계약이 체결되어 내려왔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세부공사 설계나 설계변경은 우리 정보작전과에서 했다. 작전과장은 더러 우리에게 공사도면을 그리게 하고 설계변경과 품셈계산 같은 일도 시켰다. 대개의 경우 작업량과 물량을 늘여주는 일이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정보작전과는 부대를 떠나 공사현장에 텐트나 임시막사를 짓고 거기서 기거했다. 본부텐트 안에는 공사현황을 나타내는 현황판들과 공정표, 설명도표들이 가득 붙었다. 수시로 공사현장을 방문, 점검하는 대대장이나 여단장, 혹은 맹호부대나 백마부대 지휘관들이나 관계자들이 오면 작전과장이 그 현황판을 막대기로 가리키며 브리핑을 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면서 그 현황판들과 공정표, 설명도표들을 만들어 붙여야 했다. 모조지 전지에다 '무슨 무슨 현황'이라고 커다랗게 간판 같은 글자들을 그려놓고 그 아래에다 공사개요니, 공사기간, 규모, 금액, 투입병력과 장비현황.... 이런 것들을 반듯반듯한 글자로 그려넣고 표를 만들고 공정표를 붙이고 챠트글씨로 써넣고..... 검은 색, 빨간 색, 파란 색 매직잉크와 수성펜, 싸인펜으로 멋지게 현황판을 만드는 작업에도 어느덧 익숙해져갔다.

 

가을이 오고 겨울철이 다가오면 우리는 다시 본대로 복귀했다. 월동준비를 한다고 부대 뒷산 불국산에 올라가 싸리나무를 베어와 빗자루를 만들고 볏짚으로 나무와 화초들을 싸매었다. 한 번은 불국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는데 불국산 너머에는 6사단이 있었고 산 정상 조금 못 미쳐 조그만 굴이 있었고 거기엔 수양하는 도사(?)가 갖다놓은 양초와 식기가 놓여 있었다.

 

한겨울, 우리 부대는 동계야전훈련을 나갔다. 완전군장으로 수십 리를 걸어서 의정부를 지나 벽제 쪽으로 가다가 도봉산과 북한산 방향으로 난 골짜기로 들어갔다. 동네이름이 ‘절름메기’, ‘안골’, 그런 이름이었다. 순수한 우리말 동네이름이라 지금도 기억난다. 거기가 우리부대의 동계훈련장이었다. 중대별로, 다시 소대별로, 분대별로 나누어 우리는 이 산, 저 산으로 올라가 야전삽으로 개인호를 만들고 흙을 파헤치고 판초우의를 맞붙여 텐트를 만든 다음 낙엽을 모아다 텐트 안에 깔고 다시 그 위에 모포를 깔았다. 땅바닥은 꽁꽁 얼어 있었지만 다행히 아주 깊이 얼지는 않아 야전삽으로 땅을 파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밤이 되자 우리는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 옷을 입은 채 모포를 덮고 잠을 청했다. 몹시 추웠다. 바닥에 낙엽을 몇 아름씩 긁어 넣어서 깔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추위에 잔뜩 웅크리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에 눈을 떠보면 판쵸 우의 텐트 천장에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고 우리 얼굴에는 코와 입을 둘러싸고 고드름이 조롱조롱 붙어 있었다. 훈련 중 불을 피우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우리는 싸리나무를 베어 불을 피웠다. 싸리나무 연기는 멀리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군과 대항군으로 나누어 야간침투훈련을 했다. 거의 매번 그랬지만 이번에도 침투하는 대항군이 이겼다. 아군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물샐 틈 없이 보초를 섰는데도 바로 보초의 등 뒤에까지 다가온 대항군을 발견하지 못 했고 대항군은 보초를 처치(?)한 다음 가상 탄약고에 연막탄을 터뜨렸다. '탄약고 폭파 성공', 상황끝이었다. 코를 베어가도 모른다더니 어두움 속에서의 인간의 감지능력이란 그렇게 무디고 둔하다는 걸 나는 그 때 확실히 알았다.

 

우리는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도록 되어 있는 낙석도로의 좌우 산비탈에 중화기 진지를 만들고 토우 미사일을 배치했다. 실제로 발사하는 훈련은 하지 않았다. 테트라싸이트 폭약으로 도로대화구를 만들어 적의 전차를 저지하는 연습, 그리고 불도저로 도로를 메워 복구하는 연습은 도상훈련으로 하고,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괜히 왔다갔다 폼만 잡으며 가상훈련으로 했다. 산 속에는 “박정희 괴뢰도당을 무찌르자”, “박정희 호색 무뢰한을 작살내자”, “박정희와 윤정희...”, 박 대통령의 얼굴을 괴상흉측하게 그려서 북한에서 풍선으로 날려 보낸 삐라들이 수없이 뿌려져 있었다. 우린 그 삐라들을 주워서 중대본부에 제출했다.

 

여름에는 감악산인지 까막산인지에로 유격훈련을 받으러 갔다. 완전군장으로 30 킬로미터를 걸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온종일 걸어서 감악산 유격훈련장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기진맥진하였다. 군장을 내려놓고 공터에 판쵸 우의 두 장을 붙여서 텐트를 치고 나니 집합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온종일 30 킬로미터를 걸어왔는데 또 10킬로미터 구보를 한단다. 허우적거리며 10 킬로미터 구보를 마치고 나니 저녁식사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이튿날 아침부터 본격적인 유격훈련이 시작되었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새까만 얼굴의 야무진 유격조교들이 단상에 올라서고 PT체조가 시작되었다. 조교의 구령에 맞춰 우리는 뛰고 구르고 소리 지르는 PT체조를 했다.

신병훈련소와는 다르게 이곳 유격훈련장 조교는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대어를 썼다.

우리를 올빼미라고 불렀다. 유격훈련을 받을 때는 사람이 아니고 새라는 뜻인지....

“복창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모기소리 같은 복창소리로 북괴군을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다시 이십 회 반복실시, 마지막 구호는 붙이지 않습니다.”

“하나, 둘, 셋.....”, 우리는 조교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악을 써 번호를 붙이면서 뛰고 굴렀다.

“열 여덟, 열 아홉, 스무...” 또 한 녀석이 붙이지 말라는 마지막 구호를 붙이고 말았다.

“아직도 정신이 안 납니까? 마지막 구호를 붙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스무' 소리가 났습니다. 다시 사십 회 반복 실시합니다. 마지막 구호는 붙이지 않습니다. 시작!”

“하아나, 두울, 세엣.....”

땀과 흙먼지로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기상나팔이 울렸을 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 몸 구석구석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고 일어나려니까 다리며, 배와 목이 아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옆으로 몸을 굴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연병장에 집합했다. 또다시 PT체조가 시작되었다. 한참 PT체조를 하다 보니 그렇게 아팠던 몸이 거짓말처럼 아프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땅위를 기고 굴렀고, 밧줄을 잡고 경사면을 오르고, 두 줄 타기, 외줄타기를 했다.

“○○번 올빼미, 애인 이름 세 번 복창하고 뛰어내립니다, 실시!”

 

PT체조를 하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조교 하나가 내게 다가와 나지막하게 물었다.

“○○번 올빼미는 몇 살입니까?”

내가 수염이 많고 얼굴이 희니까 나이가 들어 보여 안 됐던 모양이다.

“스물 여덟 살입니다.”

나는 너댓살을 올려서 대답했다.

그 조교가 나지막이 말했다.

“군에 늦게 오셨군요. 힘드시면 요령껏 하세요, 내가 봐 드릴 테니...”

유격훈련 조교 중에도 저런 인정 있은 녀석이 있구나. 내가 지 형 같아 보였나? 감악산 꼭대기는 하얀 구름이 돛배처럼 한가롭게 흐르는 새파란 하늘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사흘 동안의 유격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행군을 하지 않고 군용 카고 트럭을 탔다. 감악산을 조금 떠나 한 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거기가 설마리라고 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해서 설마리란다. 그 설마리에서 유엔군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중공군을 막아냈다고 했다.

 

우리 102 공병대대가 속해있는 1공병여단은 또 임진강에 가서 부교를 놓는 훈련도 했다. 미군과 카투사 병사들도 도하훈련에 참가했다. 임진강은 이상하게 생긴 강이었다. 강의 양 쪽이 이 쪽 아니면 저쪽, 어느 한 쪽은 깎아지른 10여 미터 높이의 벼랑으로 이어지는 천연적인 방어선이었다. 임진강에는 장판교, 장마루촌, 초평도...., 같은 이름의 다리와 지명들이 있었다.

장판교는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을 품에 안고 건너고 장비가 추격하던 조조군을 막아선 다리였는데 왜 임진강에 있지? 장마루촌?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시던 아버지가 구독하시던 교원잡지에 “장마루촌의 이발사”라는 소설이 연재되었었는데 그 장마루촌이 여기로구나, 나는 그런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초평도..... 초평도라는 조그만 모래섬은 부평초처럼 임진강에 떠 있었다.

 

초평도 근방 나루터 벼랑길로 내려가는 길옆에는 무슨 정자 같은 게 있었는데 여기엔 역사적 사연이 있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쫓겨서 의주로 피난 가던 선조일행이 임진강에 다다랐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캄캄하여 강을 건널 수 없었는데, 누군가가 나타나 바로 이 정자에다 불을 질러서 강을 환하게 비춰 주었고,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나. 그 정자는 그 오래 전부터 이 비극의 날을 예견한 선지자(?)가 날마다 하인들을 시켜 기름걸레로 닦도록 하였고 그래서 그 비오는 날 밤에 불태워 선조 일행을 구해 낼 수 있었다나.....

 

나는 작전과장, 중대장과 함께 고무보트를 타고 임진강에 있는 섬 초평도를 돌면서 수심을 재고 지도에 표시하였다. 군데군데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에 고기가 걸린 채 썩어가고 있었다. 임진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때때로 강에서 떠내려 오는 시체를 만난다고 했다. 일 년에도 수 백 구씩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체를 건져서 경찰에 신고해도 그게 북한에서 떠내려 온 것인지 남한 사람의 것인지 신원파악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나중엔 신고도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고 했다.

 

공병부대였지만 우리도 보병사단에 있는 사격장으로 사격훈련도 갔다. 백 미터, 이백 미터, 이백 오십 미터, 까만 상체모습의 표적을 쏘아 넘어뜨렸다. 나는 스무 발 중 열 아홉 발을 맞추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첫발, 가장 가까운 표적을 넘어뜨리지 못 했다. 가까운 표적은 아래를 겨냥하라는 사격요령에 너무 충실하여 너무 낮게 조준했던 탓에 표적지 바로 앞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표적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M1 개런드 소총......, 2차세계대전 때 미군이 처음 들고 나와 남태평양 과다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킨 8연발 소총......., 그 M1 소총을 6.25 전쟁 때 보급 받아 국군이 사용하고......, 그 뒤로 40년 동안이나 물려받으면서 날마다 점호시간마다 꼬질대에 헝겊을 끼워 기름에 적셔서 쑤셔대며 닦은 소총......., 그렇게 닳고 닳아 넓어질 대로 넓어진 총구.

그런대로 잘 관리가 된 소총은 잘 맞았지만 총구가 지나치게 넓어진 M1 소총은 잘 맞지 않았다.

 

우리는 제대할 때까지 신형 M 16소총은 만져보지도 못 했다. 구경은 해봤다. 장교들이 사격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장교가 깡통을 놓고 M16을 쏜 다음 깡통을 보니 총알이 관통한 자국이 의외로 작았다. 까만 색깔의 M16 소총은 무식하게 무거운 M1소총 보다 작고 가벼웠고 총소리도 무지막지한 M1소총 소리 보다 훨씬 작았다. 총알도 작은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총이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이 그렇게 무서워하던 소총이었단다. M16 소총은 우리가 제대하던 무렵부터 보병부대부터 시작하여 전군에 보급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