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23. 아버지의 면회

Thomas Lee 2022. 4. 27. 21:53

내가 군에 있던 3년 동안 딱 세 사람이 면회를 왔었다. 첫 번 째는 그녀가 김해공병학교로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간 것이었고, 두 번 째는 가평신병교육대로 어머니가 찐 통닭을 가지고 면회를 오신 것이었고, 세 번 째는 아버지께서 벽제 용미리로 찾아오신 것이었다.

 

내가 입대한지 이태 째 되던 해 여름 우리 부대는 벽제에서 북쪽으로, 공동묘지 조금 지나 용미리에 나가서 월남에서 돌아오는 백마부대를 위한 막사를 짓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지공사와 도로공사, 석축공사, 벙커 같은 것은 우리 부대 장비부와 작업중대가 직접 맡아 하고 막사와 건물 건축공사는 공영토건이 맡아서 했다. 우리 작전과도 공사현장으로 나가 텐트를 치고 상황실을 설치했다. 챠트병인 나는 상황판, 현황판을 열심히 만들어 붙였다. 용미리 마을 한 켠 나지막한 산에 사찰이 있었고 거기에는 은진미륵처럼 생긴 석불이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텐트를 친 곳 길 건너 앞쪽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고 식당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곳으로 찾아오셨다. 의정부 북쪽 주내 우리부대에까지 가셨다가 이곳으로 파견 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어물어 찾아오신 것이었다. 나는 외출허가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부대 밖으로 나갔는데 아버지는 먼저 부대 앞에 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쇠고기 국밥을 사 주셨다.

“아부지, 여기는 파견부대라 먹는 건 괜찮아요.”

“그래도 많이 먹어라. 군대 배고픈 거 다 안다.”

하긴 그렇다 그 맛없고 냄새나는 군대 짬빵과 밖에서 먹는 사제 밥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 때 식당에서는 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모여 TV 권투중계를 보고 있었는데 내가 TV로 눈길을 잠시 돌리는 순간 우람한 죠지 포어맨이 태권도 빗당겨치기 폼으로 죠 프레이져를 때려눕히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버지와 나는 광탄읍내까지 꽤 먼 길을 옛날에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주말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가시던 때 그랬던 것처럼 먼지를 쓰면서 나란히 걸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왜정시절, 청송군 파천면에 있는 소학교까지 재를 넘고 골짜기를 따라 이십리 넘는 길을 다니셨다. 1942년엔가 43년에, 열여덟 살 나이로 일본군에 징집되셨는데, 나중에 일본 수상이 되고 록히드 사건으로 물러난 다나까氏가 오장(지금의 분대장)이었는데 함께 팔공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한 막사에서 뒹굴었단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아버지가 소속된 일본군 부대는 남양군도로 차출되어 가다가 미군의 어뢰를 맞고 태평양 바다에 수장되었단다. 그런데, 아버지는 부대가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이상한 꿈을 꾸셨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데 아버지도 그 가운데 휩쓸려 함께 Ep밀려가고 있었단다. 그런데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벼랑길이 되고, 그 벼랑길 아래는 까마득히 시퍼런 물이 있더니 사람들이 그 벼랑 아래로 꽃잎처럼 떨어지더란다. 그 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봐라, 저 사람들 다 죽는다.”, 하더란다.

 

아버지는 이 이상한 꿈을 꾼 후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나셨는데, 심한 오한과 함께 온몸이 두드러기 투성이가 되었단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전염병인지도 모른다는 군의관의 진단으로 부대로부터 격리되셨고, 부대는 아버지를 남겨둔 채 군함을 타고 남태평양으로 가다가 어뢰를 맞고 수장되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그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셨다. 아버지는 남으셔서 대전역에서 개찰구 검문헌병을 하셨단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몇 몇 친구들과 순천에 가서 국군준비대 창설에 참여하셨는데, 미군정 당국이 400명을 허가해 주더란다. 그런데 모집공고를 내자, 전국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구름을 이루었단다. 신체검사와 면접을 통해 대원을 선발하였는데, 마음이 불타는 젊은이들을 돌려보낼 수가 없어 그만 2,000여명이나 되어버렸단다. 일본군이 쓰던 군부대 막사에다가, 일본군이 버리고 간 3.8식, 9.9식 장총에다가, 일본군이 입던 군복을 빨간 물을 들여 입었단다.

 

그러던 신탁통치반대 시위 때 어느 날 국군준비대 2,000명이 거리로 나가 신탁통치결사반대를 외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국군준비대의 엄청난 수를 보고 놀란 미군당국이 해산명령을 내리더란다. ‘이 일을 어떡하나? 설마 어쩌기야 하겠어?’ 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웬걸, 밤중에 미군들이 트럭으로 몰려오더니 막사에다가 기관총을 드르륵, 드르륵, 갈기더란다.

 

국군준비대는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오시고 말았단다. 친구 중 몇 분은 다시 순천으로 되돌아가서 국군준비대를 국방경비대인지로 바꾸어 재창설하였다는데, 아버지는 안동사범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여 교편을 잡게 되셨다. 아버지는 만일 그 때 순천으로 되돌아갔더라면 여순반란사건 때 죽었거나, 6.25때 죽었거나, 혹 살아남았다면 장군이 되어있을 거라는 말씀을 가끔 하였다.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들을 나에게 직접 자세히 들려주신 적은 없다. 나는 밤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소리 때문에 가끔씩 잠을 깨는 적이 있었는데, 단칸방에 해바라기 이불을 덮고 일곱 식구가 함께 누워 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매우 빠른 발을 갖고 계셔서 100미터 1,500미터 경북 대표선수로 선발될 정도였고, 왜정 때 그 시골에서 배우셨을 리가 없는데 언제 배우셨는지 풍금도 치셨고, 맏아들로 태어난 내가 어릴 적에 병약한 바람에 독학으로 의학공부를 하셔서 반의사가 되셨고, 그 바람에 양호교사를 겸하고 무의촌 의사역할을 하실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갖고 계셨다. 그러나 윗사람에게 굽신거리거나 소위 ‘사바사바’라는 건 할 줄 모르는 고지식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첫발령은 안동읍내 동부국민학교였지만 그 뒤로 풍산, 도산, 계곡, 길산, 와룡, 녹전초등학교 같은 산골학교로만 다니셨고 우리 다섯 남매는 아버지를 따라 산골학교로만 다녔다.

 

내가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는 녹전초등학교 교감으로 가셨는데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안동시내에 두신 채 녹전에서 홀로 자취생활을 하셨다. 주말이 되면 집으로 오셨다가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셨는데 봉화로 가는 갈림길에 들어서서 내리신 다음 다시 30여분 정도를 걸어서 자취방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가끔 학교로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먼지 풀풀 날리는 영주통로 신작로를 함께 걷곤 했다. 그 때는 길을 걷다가 손을 들면 버스가 서던 시절이었다. “너무 멀리 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괜찮아요, 아부지. 다음 버스 올 때까지만 갈게요.”

우리 부자(父子)는 그렇게 걷다가 제비원 미륵이 있는 곳까지 함께 걷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이제 아버지가 군에 있는 아들을 찾아오신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용미리에서 광탄읍까지 먼지 풀풀 나는 시골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 때를 떠올렸다.

 

우리는 그렇게 광탄읍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법원리로 갔다. 법원리에는 미군상대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하는 우리 일가 한 분이 계신다고 했다. 우리가 그 가게를 찾아가니 그 분이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좀 있다 가게 안으로 미군 흑인병사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흑인병사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일가 분은 아버지께 미군들과 또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 이놈이 양공주한테 줄 선물을 고르는 모양입니다.”

미군한테 이놈 저놈 해도 되나 생각을 하는 것을 그 분이 알았던지 그러셨다.

“아, 욕 좀 해도 괜찮아요. 이놈들이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지요.”

저녁때가 되어 우리 셋은 함께 인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저녁 늦게 아버지와 나는 다시 파견부대로 돌아왔고, 아버지는 부대 앞에서 버스를 타고 뒤돌아보시고 또 뒤돌아보시며 그 날 밤 내가 훈련소에서 꾸었던 꿈속에서처럼 멀어져 가셨다.

 

서울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총에 육영수 여사가 쓰러지는 사건이 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데프콘 쓰리 (DEFCON Ⅲ)비상이 걸리고, 우리는 완전군장 출동준비를 하고 밤에도 군화를 신은 채 잠자도록 명령받았다. 부모님께 유언을 담아 마지막 편지를 쓰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부대 안 나지막한 언덕에 땅을 파 참호를 만들고 그 위를 덮어 지하상황실인지 진지인지 무덤인지를 구축하였다. 안에서 밖을 전혀 볼 수 없었으니 진지가 아니라 무덤이나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비행기가 천 몇 백 대니, 북괴군이 특수부대를 침투시킬 때 사용하는 AN-2기가 수백 대나 된다느니, 수륙양용정이 몇 백 대니, 수포작용제, 신경개스 같은 무서운 화학무기들이 얼마라느니, 독개스가 살포되면 어떻게 하라느니, 원폭이 투하되면 어떻게 하라느니 하는 교육이 계속되었다. 우리 부대 앞으로 시뻘건 입과 이빨을 그린 공격용 코브라 헬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동두천 방향으로 날아 지나갔고 부대 앞 도로 위에는 탱크와 자주포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러나 전쟁은 나지 않았다.

 

가을이 되자 대학생들의 데모 소식이 전해지고 긴급조치들이 계속 나왔다. 서울로 외박을 나갔던 녀석들이 동아일보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금지로 동아일보의 광고란은 허옇게 비어 있었고 독자들이 대신 돈을 내어 광고란에 동창회니 무슨 모임이니 하는 안내와 광고와 격려문을 싣고 있었다. “동아일보, 언론 최후의 보루, 힘내라! 이겨라!”

 

우리 내무반에는 TV가 없었다. 흑백 TV도 귀한 시절이라 우리 본부중대에서 TV가 있는 곳은 수송부, 장비부 내무반뿐이었다. 졸병 때는 저녁 자유시간이라 해도 감히 TV를 볼 엄두도 못 내었지만 고참병이 되자 나도 더러 수송부, 장비부 내무반에 가서 TV를 보았다. 장학퀴즈, 가요무대가 인기프로였다. 군인들에게는 장미화, 김추자 같은 가수, 그리고 탤런트 김혜숙, 여배우 장미희가 인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대 앰프에서는 군가와 행진곡이 많이 나왔지만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이름 모를 소녀', '긴 머리 소녀', '편지' 같은 가요들도 많이 흘러나왔다. '개여울',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하는 노래들도 기억나고 더러는 팝송이나 클래식도 나왔다. 보초를 서면서 ABBA 그룹의 '워털루', '댄싱퀸', 카펜터즈의 'Top of the world' 같은 곡들을 들은 기억이 난다.

 

군복무를 한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군대생활 3년은 너무나 긴 터널이었다. 군대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득하게만 느껴질 때도 많았다. 하루가 저물고 불국산 그림자로부터 내려온 어스름이 콘센트 막사를 덮어갈 때면 이놈의 군대생활이 영원히 계속되고 나는 영원히 군바리로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만 같은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아, 그 때가 언제였던가, 그런 날이 있었던가, 내가 언제 한국전력과 부산화력발전소에서 일했던 적이나 있었던가, 내가 언제 대학을 다녔었던가, 모든 기억들이 옛이야기처럼 아득했다. 많은 것들이 나를 떠나갔고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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