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대생할

24 . 제대

Thomas Lee 2022. 5. 1. 02:17

그 때의 사병봉급(월급)은 이병 때 800원, 일병 때 900원, 상병 때 1,100원, 병장 때는 1,200원이었는데 내가 제대하던 해에는 조금 올라서 병장봉급이 1,560원인가 그랬다. 그 돈으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더러 PX에 가서 찐빵이나 깡통 막걸리 같은 걸 사먹기도 했지만 월급 받았을 때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훈련소에서부터 사병들에게는 화랑담배가 배급되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병에게는 건빵이 한 봉지 더 나왔다. 화랑담배는 처음에는 필터가 없었다가 나중에 필터가 달려 나왔는데 필터재료가 조악하고 쓴 맛이 나서 담배를 피우는 사병들은 사제담배를 사 피우기도 했다. 은하수 담배가 120원이었던가 했고 거북선 담배가 150원인가 했다. 더 싼 담배로는 청자 100월, 신탄진 60원인가 했으니 사병이 봉급으로 사제담배를 사다 피우는 건 사치였다. 가끔 휴가 갔던 친구들이 외제담배를 사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대부분 선물용, 아부용이었다.

장교와 하사관 봉급은 좀 달랐다. 언젠가 한 번 장교와 하사관들의 봉급이 엄청나게 큰 폭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오른 적이 있었다. 우리 작전과장 대위 월급도 대폭 올라서 3만원 가까이 됐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내가 재대해서 한전으로 돌아가면 나도 그 보다는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의 사병들은 휴가를 얻어 집에 다녀오면 부모님으로부터 얼마간의 용돈을 받아 그걸로 담배와 군것질을 해결하곤 했다. 졸병시절에 휴가를 다녀올 때 고참병들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하나 하는 것도 큰 고민이었고 혹시나 고참병이 휴가 다녀오는 졸병을 괴롭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휴가 다녀오는 사병이나 부모님들에게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그 시절, 적어도 우리 부대 우리 내무반에서는 휴가 다녀오는 졸병을 괴롭혀서 뺏어먹는 그런 야비한 고참병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대대에 군종사병이 한 분 있었다. 나보다 한 해 정도 고참병이었다. 키가 자그마한 그는 예쁘장한 얼굴에 항상 웃음을 머금고 품행이 그지없이 착한 천사표 사병이었는데 일요일마다 인근교회에 나갔고 수요일이나 금요일에도 저녁에 교회를 다녀오곤 했다. 우리는 군종병이 그냥 교회 다니는 사병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그로부터 자신이 가진 신앙이나 복음, 기독교나 하나님이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다. 우리가 들은 것은 그가 군대생활 3년 동안 받은 사병봉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저축해서 3만 원쯤 되는 거금(?)을 갖고 제대했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힘겹고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던 군대생활도 어느덧 2년이 지나고 나도 병장이 되고 제대말년이 되었다. 1975년, 나의 제대말년 그 해에 우리 부대는 국민방위성금으로 임진강을 건너 민통선 안에다 북괴군 탱크를 막는 만리장성 같은 방어석축을 쌓고 도로낙석을 세우는 공사를 했다. 또 우리는 문산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저만치 자유의 다리가 보이는 곳 도로 오른편 언덕 위에 월남에서 돌아온 포병부대를 위한 막사를 짓는 공사를 했다. 나는 또 그 포병부대 막사건설현장에 파견을 나가서 공사현황판을 만들어야 했다. 작업중대 병사들과 차량, 장비들은 자유의 다리를 건너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서 공사를 하곤 했지만 나는 민통선 안의 방벽공사 현장에는 가보지 못 하였다.

 

공사현장에서 전에는 천막을 치고 야전침대를 놓고 지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함석철판으로 만들어진 네모반듯한 그럴 듯 한 임시건물이 지어져서 우리의 내무반이 되었다. 파견현장에서는 내가 가장 선임병이라 내무반장을 맡았다. 내무반 옆에는 의무대가 조그만 간이건물로 자리 잡았고 그 옆에는 키 큰 아카시아 숲이 있었다. 5월이 되자 아카시아 꽃이 또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놈의 아카시아꽃이 또 피는구나. 나는 수십 년 지난 지금도 해마다 아카시아 꽃이 피면 그놈의 김해공병학교와 또 그녀가 생각난다.

 

월남에서 돌아온 포병부대에서는 우리부대의 공사가 완료되기를 기다리며 임시막사에서 기거하였는데 수시로 포사격훈련을 했다. 밤에 포사격훈련을 하면 포탄이 우리 머리 위를 지나 임진강 하구 방향으로 ‘우르릉 슈슈슉’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날아갔다. 어느 날, 군단장과 여단장이 탄 헬리콥터가 전방에서 격추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국민이 낸 방위성금 4천만 원을 해먹고 들통이 나자 북쪽으로 도망가려다가 아군에 격추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사실여부와 내막은 지금도 궁금하다.

 

여름이 된 어느 날, 단풍하사 하나가 전입해 왔다. 단풍하사란 신병훈련소에서 일반병 가운데서 차출되어 하사관 훈련을 받고 하사계급장을 달고 부대로 배치되는데 계급장 윗부분을 붉은 색깔로 가렸다가 하사임명을 받으면 벗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보통 사병들 사이에서는 계급보다는 누가 얼마나 오래 군대생활을 했느냐, 짬밥 그릇수가 서열을 정하는데 단풍하사가 배치되어 오면 복무기간으로는 졸병인데 계급은 높으니 사병들이 무척 껄끄러워 했다. 그건 단풍하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간병들이 전입해 온 단풍하사의 기를 미리 꺾어 놓으려고 전입신고를 시켰다. 신고태도가 불량하다면서 몽둥이찜질까지 하려고 했다. 이런 하극상 집단린치는 얼마 안 있어 제대할 고참병들에게는 몰라도 아직 군대생활이 많이 남은 병사들에게는 참 입장곤란한 일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너무 지나친 것 같아서 내가 이제 그만 하라고 제지하여 중단시켰다. 김 하사는 그런 내가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거기에서 문산이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의 다리도 가까웠다. 포병 부대 앞에는 창녀촌, 양공주촌이 조그맣게 형성되어 있었다. 밤에 점호가 끝나고 취침시간이 되면 김 하사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끌고 부대 밖으로 나가서 술을 사기도 했는데 이 친구가 알고 보니 참 황당하고 어이없고 재미난 녀석이었다. 하루는 이 친구가 내게 부대 앞의 양공주 점검순찰을 같이 가잔다. 아니 탈영병 수색을 나가잔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 그런 짓은 못 하는데 이 친구는 개구쟁이 아이가 장난을 치듯 그런 장난을 거침없이 해치웠다. 김 하사가 앞장서더니 플래시를 들고 미군과 양공주가 잠자는 방의 방문을 와락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탈영병을 찾는다고 소리를 쳤다. 플래시 불빛 속에 검은 흑인병사와 여자의 벌거벗은 몸과 당황해 하고 어이없어 하는 그들의 눈빛들이 비쳤다.

“탈영병이 이리로 왔다는 정보가 있어서 수색 나왔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김 하사는 천연덕스럽게 경례까지 붙이고 나서 다음 방문을 또 ‘우당탕’ 열어젖혔다.

 

가을이 되자 인근마을에 대민봉사를 나갔다. 나도 따라 나가 낫을 들고 벼베기를 도왔다. 다리에 달라붙는 거머리를 떼어내며 가을햇볕 아래에서 벼를 베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맛없고 냄새 나는 군대 짬밥만 먹다가 임진강 마을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땀을 흘리고 막걸리와 쌀밥을 얻어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고추를 다 따고 난 고추밭에는 따다가 남은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고추를 보면 잽싸게 따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빨갛게 익은 고추는 맵지 않고 달았다. 그리고 부대에서 맛없는 짬밥을 먹을 때 따온 고추를 된장에 찍어 함께 먹으면 별맛이었다.

 

그렇게 3년의 군대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아 놔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더니,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제대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제대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서러움이 소용돌이처럼 맴돌아 북바쳐 오르고 있었다. 부대 앰프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고, 캠퍼스 잔디 위에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시절, 시절 시절들... 루루루루 세월 가네, 루루루루 젊음이 가네.....”

제기랄, 무슨 노래가 어쩌면 이토록 내 신세와 똑 같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고래 잡으러...”

술 마시고 춤을 춘다고 돌아올까? 동해로 고래 잡으러 가듯 내 청춘을 다시 잡으러 갈 수 있을까?

화랑담배 연기와 함께 흘러가 버린 3년의 세월이 그녀의 얼굴과 함께 파르스름하게 피어올라 허공에 흩어져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 영영 떠나가 버린 수많은 것들, 아 그리고 그녀......

 

제대날이 가까이 오자 나는 공사현장으로부터 대대본부로 복귀하였다.

제대를 앞둔 내게 녀석들이 내게 그랬다.

“이 병장님은 글씨를 잘 쓰시고 챠트를 잘 하시니 제대해서 먹고 살 걱정은 없겠습니다.”

뭐라고? 나보고 발전소로 돌아가지 말고 챠트나 그려먹고 살라고?

내가 제대하여 부대를 떠나기 전 날 밤, 내 졸병, 조수 녀석이 나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이 병장님, 이병장님 제대하시면 전 어떻게 군대생활 해요?”

“야 임마, 사나이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군대생활 어떻게 하냐? 나도 했는데 너라고 못 할 거 있냐?”

내가 녀석한테 너무 잘 해 주었나보다. 제대하는 날 붙잡고 우는 걸 보니.....

하긴 좀 걱정은 되었다. 그 녀석은 아직 쓸 만한 챠트병이 되려면 멀었다. 솔직히 아직 똥대가리 수준....

녀석들이 소주와 오렌지 환타를 탄 깡술을 자꾸만 권하는 바람에 나는 잔뜩 취하여 내무반에도 못 들어가고 작전과 사무실 야전침대 위에서 부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개구리복을 입고 제대신고를 하고 부대를 떠났다.

인사계 김상병이 세무가죽 군화를 제대선물로 내게 주었다.

녀석들이 부대정문에까지 따라 나와 내게 거수경례를 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녀석들을 보니 그 날 김경언 병장이 제대하여 부대를 떠나던 날 우리가 욕을 하던 생각이 났다.

 

개구리 제대복을 입고 부대 앞에서 의정부행 버스를 타고 검문소를 지나면서 이제야 내가 떠나는구나, 실감이 났다. 의정부에서 다시 종로5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청량리행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청량리 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나는 안동으로 내려갔다.. 휴가 갈 때마다, 외출할 때마다 무섭던 헌병을 이제는 더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36사단, 우리가 3년 전 신병훈련을 받았던 그 부대로 들어갔다.

제대병들은 훈련소의 반대편에 마련된 숙소로 안내되어 간단한 안보교육을 받고 군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전역식을 치렀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2년 10개월 만에. 1975년 11월 25일인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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