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회사를 떠나서

88. 한기 백 과장

Thomas Lee 2023. 4. 11. 00:11

“백 과장에 대한 판결이 곧 나온다던데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1심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받을지.......”

2014년 12월 초순, 내가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원전 건설용 기자재 제작독려업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커넥티커트 하트포드 인근에 있는 케이블 제작사 RSCC에 케이블 제작사와 기술협의를 하기 위하여 서울의 한기 본사에서 3명의 기술인력이 출장을 왔는데 그 중 일원인 김 차장이 내게 한 말이었다.

“징역 2년요? 아니 뭘 얼마나 잘못 했는데요?”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이 부장님도 아시죠? 가짜부품 사건 신고리 3,4호기 케이블 품질서류 사건이 터지고 잡혀 들어간 사람이 100명 훨씬 넘습니다. 그래서 이젠 엔지니어들이 책임 질 일은 전혀 안 하려고 합니다. 백 과장이 구속되고 재판에서 2년형을 받은 것은 백 과장이 일을 잘 하려다가 벌어진 사건입니다. 백 과장은 제작설비의 성능시험이 건설공정에 비추어 도저히 납품 전에 공장에서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제작사의 요청에 따라 건설현장에 일단 납품한 후 제작사의 책임하에 건설현장에서 성능시험을 하도록 조치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인가요? 건설공정과 상황에 따라 긴급히 해야 할 일은 조치해야지요.”

“그런데 백 과장은 구속되었습니다. 제작사를 봐주기 위하여 제작공장에서 수행해야 할 성능시험을 건설현장에서 하도록 조치해 줬다는 겁니다. 그 제작사도 한심하지, 글쎄, 현장에서 성능시험을 수행토록 해줬으면 기다렸다가 그 성능시험이 끝난 다음 기성고 지불신청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기기가 납품되었다고 덜렁 한수원에다 납품 기성고 지불을 신청한 겁니다.”

 

“허어, 그랬군요.”

“물론 납품회사의 입장도 이해는 갑니다. 기기의 제작납품이 이루어졌으니 자금이 급한 회사로서는 일단 납품불 지급요청을 한 겁니다. 납품불 중에서 성능시험미결로 인한 유보금만 빼고 지불해 달라고 한 거지요. 그런데 검찰은 백 과장이 업체로부터 뭘 얻어먹고 봐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검찰이 아무리 뒤져도 돈 받은 증거는 없고.... 지금까지 한기 직원들이 숱하게 검찰조사를 받았지만 검찰도 이상하다고 한대요. 수많은 사람을 뒤지고 그 많은 조사를 했는데 한기 직원들, 엔지니어들이 업체로부터 돈 받아먹은 건 단 한 건도 없으니 이게 더 희한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게 뭐 이상해요? 당연한 일이지.”

“그게 검찰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수조원 짜리 원자력건설공사에 당연히 수억, 수십 억 정도의 콩고물이 여기저기 떨어져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으니 이상하다는 겁니다. 재작년에 한수원 송부장인가 하는 사람이 돈 받아먹은 사건, 케이블 검사기록 조작사건, 납품비리인지 원자력 마피아인지, 한수원 김JS 사장, 이JC 부사장 사건 때문에 줄줄이 구속되고 조사 받고, 이젠 원자력 한다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국가기간산업, 첨단기술, 그런 원자력의 영광은 한갓 과거의 일입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어버린 거네요.”

 

“한기는 곧 문 닫을 겁니다. 봉급이 또 깎였습니다. 정부경영평가에서 최하등급 받았다고요. 제가 얼마 받는지 아세요? 참, 말도 못 하겠네.....”

“아니, 전에는 한기 봉급이 한전 보다 훨씬 많았는데요? 1,5배는 넘었던 거 같은데....?”

“그거 옛날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거꾸로입니다. 아무튼 이제 한기는 아랍에미레이트 원전 끝나면 없어질 겁니다.”

“한기가 왜 없어져요? 영광원자력 3,4호기 때 기술자립 한다고 한전이 한중, 한기, 원연에다 퍼다 준 돈이 얼만데... 한기에도 기술자립비가 300억원 넘게 나간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해서 배워오고 들여오고 쌓아온 기술은 어떡하고요.”

 

“지금 아랍에미레이트 계약조건에 기술전수조건이 있습니다. UAE전력공사(ENEC)에서 달라고 하면 다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술기준, 규격, 설계기술, 설계방법, Know-How, 심지어 엔지니어가 계산한 계산서까지 ENEC에서 달라는 자료는 다 제출해야 합니다. 계산서, 이거까지 내 놓으면 끝이지요. 더 이상 숨길 비밀도 기술도 없이 발가벗고 다 주는 겁니다. 한전은 후속기인 5-8호기도 수주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UAE는 한국의 기술을 다 벗겨먹었으니 5호기부터 8호기까지는 굳이 한전에 줄 일이 없을 겁니다. 선배들이 그렇게 피땀 흘려 쌓은 기술이 이렇게 일회용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리고 한기는 해체, 공중분해될 겁니다. 똑똑한 친구들은 UAE로 가서 재취업할 거고, 대부분은 길거리에 나가 앉겠지요. 그 기술, 선배들이 어떻게 배워온 건데.... 애국한다고, 원자력기술자립 한다고, 영광 3,4호기 때 미국 싸전드 앤 런디에 가서 기술 배울 때, 안 알려 주는 거, 비밀로 숨기는 거, 이런 걸 밤중에 사무실에 몰래 숨어들어가 쓰레기통 뒤지고 자료 훔치고 해서 배워온 건데 이렇게 허망하게 UAE에다 갖다 퍼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

“아니, 그런 계약을 했단 말입니까?”

 

“그 뿐 아니지요. 이건 계약이 아니라 한 마디로 노예계약, 달라는 대로 발가벗고 주는 계약이예요. 건설공기는 촉박하고, 준공 늦으면 엄청난 지체상금 물고, 선행호기인 신고리 3,4호기가 준공이 늦어도 벌과금을 물어야 하고.... 사사건건 ENEC 검사에다 감사에다, 보고에다, 승인에다.... 꼭 채찍질 당하고 뺨때기 얻어맞아가면서 해주는 그런 기분입니다.”

“참 어처구니없군요. 누가 그런 계약을 했단 말입니까?”

“윗대가리들이 정치적 협상으로 이런 계약을 해놓은 겁니다. 원자력 해외진출이라는 명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실무자, 기술자들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해버린 거지요.”

“아니, 그렇더라도 한기가 기술자료제공을 거부하면 안 됩니까? 세상에 어떤 기술회사가 영업비밀, 핵심기술까지 내놓고 남아나겠습니까?”

“전 모르겠습니다. 낙하산 아래서 목 내놓고 그렇게 반항할 사람이 있을까요? 까짓 기술이 뭐 기술입니까? 기술직이 뭐 사람입니까? 아무튼 한기는 이제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망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