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82. 준비된 대통령과 무법시대, 그리고 눈물의 한시퇴직

Thomas Lee 2023. 4. 2. 13:41

그랬다. 그것은 IMF 경제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뉴욕사무소에 나가있는 동안에는 골프 치러 다니느라 크게 못 느꼈지만 한국전력은 오랜 세월 박봉의 회사였던 것이다. 돌아보면 1969년 내가 한전에 입사하던 그 때, 열아홉 살짜리 고졸 신입사원이 2만원 넘는 월급을 받던 그 때가 유일하게 ‘반짝’ 좋은 때가 아니었다 싶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이미 한전의 봉급은 치솟는 물가에 짓눌리고 끌려가기 시작하였고 30년 회사생활을 해오면서 쪼들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명백히 30년의 착취였다. 회사생할을 그렇게 하고도 전세 아파트 얻을 돈이 없어 부모님 신세를 져야 했고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 해 이리저리 이사 다니고 아이들 학원비도 없었던 세월, 그리고 이제 뉴욕사무소를 떠나 뉴저지에 가족을 두고 영광원자력에 온 입사 30년차 부장의 이것저것 떼고 남은 200여만 원의 월급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1700대 1을 오르내리는 환율에 한 달 렌트비도 안 되는 1,100 달러, 1,200 달러 밖에 안 되는 돈을 미국의 가족에게 송금하면서 이 적은 돈으로 미국에서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나,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을 해야 하는 비참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 도적 죠지 소로스를 모셔와 도와달라고 엎드리고 한국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한 외인들에게 ‘묻지 마’ 국가채무보증을 해주고 국가부도를 막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기엔 참으로 부당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랬다. 국민들에겐 증시에 투자했다가 기업이 부도나고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어도 ‘투자는 본인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왜 해외투자자들에게는 투기자본에까지 무조건 국가채무보증을 해주느냐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꼭 그렇게 해야 했는지 나는 모른다.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그러고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은 왜 그렇게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가가 앞장서서 채무보증을 해주고 국내기업들을 해외에 싸구려로 넘겨주어야 했을까?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불과 몇 십억 달러의 외환보유고 부족사태가 불러온 IMF경제위기로 대한민국은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 그리고 몇 백억, 몇 천억 달러의 국부(國富)를 해외에 넘겨주었고 우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던 ‘국가채무’라는 단어를 듣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증시를 무방비로 개방하여 외국인 투자자들이 증시를 주물럭거리며 돈을 불리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국가채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몇 정권을 거쳐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소주성 정책과 선심성 일자리 예산과 탈원전과 신재생 에너지정책으로 폭발적으로 불어나 이제 2,200조원이라는, 자손대대 벗기 어려운 빚의 멍에, 노예의 굴레가 되고 말았다. 나는 적어도 김대중 한국정부가 무조건 국가채무보증을 해 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외국자본 무조건 국가보증을 하더라도 적어도 건전한 투자자와 투기성 투자자를 심사하고 구분하여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자는 너희 책임’이라는 원칙이 여기에서도 적용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권은 아직 임기가 1년이나 남아있던 한국전력 이종훈 사장을 압박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이종훈 사장이 아직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98년초, 회사의 분위기나 경제위기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일부 직원들이 명예퇴직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이종훈 사장은 3직급 부장 이상에게만 명예퇴직을 허락하고 4직급 과장이하 직원들에게는 명예퇴직을 허락하지 않고 반려하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명예퇴직원은 일체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 이젠 명예퇴직을 하고 싶어도 꼼짝없이 도마에 오른 물고기처럼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숨 막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어처럼 김대중에게 돌아와 충성하겠다.”고 맹세한 가신(家臣) 장재식 의원의 형인 장영식 뉴욕주립대 교수를 형식적인 공모절차를 거쳐 한전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자칭 에너지전문가라는 장영식 사장은 1998년 5월 18일, ”한전은 복마전, 외채의 주범“이라고 으르렁거리며 한전사장에 취임하였다. 한전은 공룡처럼 비대하고 경영이 방만하고 온갖 비리가 판치고 막대한 외채를 끌어와 IMF 경제위기를 초래한 괴물 회사라는 것이었다. 원자력발전소를 건설, 전력요금을 낮추어 세계에서 가장 값싸고 풍부한 전력을 공급하면서 부채율 110% 밖에 안 되는 건실한 재무구조를 갖춘 한국전력, 국가신용도 보다 더 높은 신용도를 바탕으로 국내금융에 의존하지 않고 해외에서 외자를 도입하여 발전소를 건설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난 전력수요를 감당해낸 국가경제의 견인차 한국전력을 장영식 사장은 ‘복마전, 외채의 주범’으로 몰아붙이며 부임한 것이다.

 

장영식 사장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방만한 복마전 공기업” 한국전력의 구조조정과 긴축과 쇄신작업에 나섰다.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면 집행간부들의 옷을 벗기고 간부직원들을 다그쳤다. 직원들의 봉급이 너무 많다 하여 권원표 노조위원장을 윽박질러 세 차례에 걸쳐 전 직원들의 급여를 ‘급여반납’ 형식으로 삭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삭감한 직원들의 봉급 465억원을 1998년 10월 26일, 산업자원부장관에게 갖고 가서 ‘실업기금’으로 기부하였다. 그것은 횡포였고 강탈이었고 불법이었다. ‘이게 30년 동안 내가 다닌 한국전력이란 말인가?“ 회사에 정이 다 떨어졌다.

 

그리고 8월쯤이었던 것 같다. 뉴욕지사장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시간에 왜 거기에 갔었는지 뉴저지 어느 호텔 주차장 차량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사람이 신고를 해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미 소생불가능 뇌사상태였고 뇌출혈로 진단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아들이 달려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산소호흡기를 떼 내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신은 서울로 운구되어 한일병원 영안실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했다.

 

나는 차를 몰고 서울 한일병원으로 올라갔다. 영안실에는 고인을 전무로 추서한다는 플래카드를 달아놓았고 회사에서 많은 사무직 직원들과 간부들이 와 있었다. 지사장 부인은 나를 보더니 눈물을 훔쳤다. 부장, 과장들 부인들을 골프장으로 몰고 다니던 위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회사에서는 지사장을 순직으로 처리하고 위로금과 보상금을 줄 것이라고 했다. 업무와 윗사람의 압박에 시달리다 암으로 돌아가신 고 김J 처장님은 끝내 순직처리를 안 해주더니 역시 사무직은 다르구나, 사무직은 그렇게 죽어도 순직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영주권신청이 받아들여졌으니 미국으로 와서 온 가족이 이민국에 가서 지문날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요일에 이어 이틀 휴가를 내어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 이틀 사이에 본부장이 내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했단다. 나는 가족을 데리고 뉴왁에 있는 이민국에 가서 지문채취를 하였다. 이제 한두 달 기다리기만 하면 영주권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힉비(Hicbie) 변호사가 내게 그랬다. 영주권이 이렇게 빨리 나온 건 매우 특별한 케이스라고 했다. 이민국 담당자가 적체되어 수북하게 쌓인 영주권신청서류들을 훑어보다가 우리 가족의 영주권신청서를 보게 되었고 우리 가족 중 아들의 스물한 번 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만 21세가 넘으면 영주권 부여가 안 되는데 그러면 이 가족은 어떻게 되나? 급하다.” 그래서 그 담당직원이 우리 가족의 케이스를 특별히 긴급처리했다는 것이었다. 그 담당공무원이 수많은 영주권신청서류 중에서 어떻게 우리 가족의 서류를 보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만일 그렇게 영주권이 나오지 못 했다면 우리가족의 앞날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장영식 사장도 동생 장재식 의원처럼 연어처럼 김대중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서든 대규모 감원을 하여 한국전력이 솔선수범하여 구조조정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 같다. 아랫것들을 몰아붙여 “감원계획”을 만들어냈다. 그 감원계획이라는 것은 근속연수가 오래 된 장기근속직원들을 “안 나가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여 내쫓는 것이었다. 그것을 “한시퇴직”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회사가 이렇게 돌아가기 시작하였을 때 사내인터넷에 정부의 잘못된 조치들과 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방침과 행동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올렸다. 정부에 호소문도 보냈다. 직속상사인 본부장에게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호소문을 보냈노라고 본부장에게 보고하였다. 본부장은 앞부분만 쓰윽 훑어보더니 내게 그랬다. “당신 군대는 다녀왔어?”

 

1998년 10월 26일 오후, 본사로부터 “구조조정을 위한 현원감축방안”이라는 이름으로 “한시퇴직 시행” 지시공문이 하달되었다. 내부결재 형식으로 만들어진 그 서류에는 관리본부장과 인력관리처장과 노무처장의 싸인이 있었고 장영식 사장이 최종결재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감원시키기 위하여 장기근속 직원을 타깃으로 하여 한시퇴직 지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한시퇴직을 하면 명예퇴직금을 주는 건 아니고 명예퇴직금을 절반으로 삭감한 한시퇴직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한시퇴직은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다음에는 한시퇴직금마저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기근속직원이 한시퇴직에 응하지 않으면 무보직 발령을 하고 수당과 업무추진비 등을 지급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봉급이 줄어들 뿐 아니라 나중에 퇴직하면 한시퇴직금마저 받지 못 할 것이고 그나마 기본 퇴직금도 대폭 줄어들 것이니 지금 한시퇴직으로 나가는 게 이로울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거라도 줄 때 나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악랄한 일이었다.

 

사규에도 없는 그런 악랄하고 야비한 한시퇴직이라는 이름의 퇴직제도를 보고서와 내부결재로 만들어 시행하다니! 위에서 시킨다고 그런 서류를 만들어 올리고 거기에 서명한 자들이나 거기에 서명하여 시행하는 월권행위로 수많은 장기근속자들을 몰아낸 자나 모조리 불법 범죄자들이고 공범 내지 방조범들이었다. 한시퇴직은 명백히 무효이고 불법이었다.

 

사업소에 장기근속자 순위표가 하달되었다. 나는 나이도 많지 않았는데 열아홉 살에 입사한 죄로 30년 근속한 장기근속자로 3직급 원자력직군 20번째로 상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사업소에는 ‘장기근속자 무보직심사 위원회’가 설치된다고 했다. 사내전산망으로 지금 한시퇴직으로 나가는 경우와 안 나가는 경우 감액될 봉급과 퇴직금 비교표가 내려왔다. 지금 안 나가면 퇴직금이 8천만 원이 줄어들어 2억 천만 원 밖에 안 될 거라는 협박장이었다.

 

‘한시퇴직으로 나갈 것인가, 버틸 것인가?’를 결정할 시간은 딱 한 주일이 주어졌다. 촉박한 시한으로 심리적 긴박감과 압박을 주자는 것 같았다. 많은 장기근속 직원들이 내가 써서 사내인터넷에 올린 “호소문”을 읽고 그걸 프린트해서 집으로 가져가 아내와 함께 읽으며 울었다.

나는 장영식 사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사장에게 회사의 규정에 없는 퇴직제도를 만들어 시행할 권한 없습니다, 한시퇴직은 한국전력공사법이나 단체협약, 근로기준법을 위반할 뿐 아니라 회사규정에도 없는 퇴직제도입니다. 이런 불법적 퇴직제도를 사장이 내부결재로 만들어 시행하는 것은 무효이고 위법하므로 그 시행을 중단해 주십시오.”

세 차례나 이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회사를 나가야 하나, 버텨야 하나?” 사실 버티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런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싶은 실망감이 너무 컸다. 그리고 뉴욕지사장이 다 망가뜨려놓은 나의 인사고과점수도 그랬다. 앞으로 최소 3년 동안은 승격심사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최악의 인사고과점수에다 지금의 본부장에게서도 좋은 인사고과를 기대할 수 없으니 회사 다닌들 무슨 낙이 있으랴 싶기도 했다.

 

나는 밤중에 사택 공중전화박스에서 아내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지만 뾰족한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사흘 동안 금식을 하였다. 회사출근을 하면서 금식을 하였더니 사흘 째 되는 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 가족의 생계문제였다. 내가 회사를 안 나가고 버틸 수는 있겠지만 회사에서 주는 200만원의 박봉으로 달러를 바꾸어 천 불 남짓 보내는 식으로 계속 버틸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퇴직금을 받아 미국으로 가서 당장 생계의 급한 불을 끄는 것이었다.

“그래. 나가자. 영주권도 나왔으니 떠나자. 미국에 가면 굶어죽기야 하겠나?”

 

그러나 한시퇴직원을 그냥 낼 수는 없었다. 나는 명예퇴직원을 작성하여 우체국에 가서 내용증명우편으로 보냈다. “회사 규정에 따라 명예퇴직을 신청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한시퇴직원에 도장을 찍어 총무부에 제출하였다. 내용증명으로 보낸 명예퇴직원은 묵살되었고 며칠 후 11월초에 발령 통보된 한시퇴직자 2,369명의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사내 인터넷에 한시퇴직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정부와 회사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들 여러 편의 글을 올렸다. 많은 직원들이 읽고 호응하는 댓글들을 달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회사는 한시퇴직자들을 수안보 온천 생활관에 며칠 입소시켜 퇴직후 생활과 노후대책 강의와 위로의 마지막 선심을 썼다. 그리고 1998년 12월 16일부로 퇴직발령처리 되었다. 결국 나의 뉴욕사무소 해외생활은 한시퇴직으로 이어진 셈이고 나의 한국전력 30년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