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80. 영주권신청, 그리고 단신귀국

Thomas Lee 2023. 3. 30. 17:08

1996년 연말 무렵이 되자 뉴욕사무소에도 인사고과와 승진을 둘러싼 바람이 불었다. 부장승격심사를 앞두고 본사에서는 갑자기 승격심사의 방식을 바꾸었다. 전에는 인사고과를 비밀로 하여 본사로 보냈는데 이번에는 인사고과와 함께 승격심사대상자들에 대한 순위를 매기도록 변경이 된 것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부장승격심사제도의 변경으로 우리 뉴욕사무소에서도 적지 않은 혼란과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사장의 부장들에 대한 인사고과도 이루어졌다. 지사장이 부장들에게 매긴 인사고과를 박 부장이 보았는지 지사장이 내게 매긴 인사고과는 최하점수이고 아마도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내가 승격심사에조차 들어가지 못 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나는 이미 지사장이 그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은 것은 우리가 미국에 온 지 2년이 지난 1997년 3월말이었다. 아이들은 못 데리고 가고 나와 아내, 둘만 한국으로 날아갔다. 동생은 내게 아버지께서 언어기능을 상실하고 뇌가 손상되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으셨을 텐데도 끝까지 자식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셨다고 말했다. 우리 다섯 남매 부부가 다 모이고 친척들이 오고 그렇게 장례가 치러지고 아버지는 당신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신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 옛터골, 왜정 때부터 서 있던 무궁화나무가 아직도 남아있는 옛집터 바로 앞 언덕, 할머니 무덤 아래에 묻히셨다.

 

이제 주재원 생활도 한 해 남았다. 사무부장 박 부장 가족도 귀국하고 허 부장이 새로 부임하여왔다. 박 부장은 포트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하여 서울의 대학에 넣기 위하여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내게 알려주고 준비해야 할 서류들의 복사본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도 다음 해에 귀국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상황은 박 부장과는 달랐다. 딸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아들은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온 지 2년 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아들은 생각보다 훨씬 나은 SAT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성적으로 아이비리그 같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는 없었고 좀 낮은 대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고등학교에서는 몇 곳의 대학을 추천해 주었고 몇 곳 대학에 원서를 내었고 펜실베니아의 드렉슬 대학, 뉴욕주의 로체스터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뉴저지주가 아닌 타주로 가면 비싼 학비를 어떻게 감당하나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뉴저지 주립공대에서 입학허가가 나왔다. 같은 뉴저지라 학비가 훨씬 적게 들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들은 뉴저지 주립공대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월 가을학기가 되어 뉴저지주립공대에 입학하였다. 뉴저지주립공대는 뉴왁(Newark)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흑인들이 많이 살고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 높은 도시에 있었고 아들은 거기 기숙사에 들어갔다. 아들을 기숙사에 데려다 주면서 가보니 입구에서부터 살벌한 경비에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출입구와 신분증을 갖다 대야 열리는 출입문들을 갖춘 기숙사는 흡사 감옥 같았다. 학생 둘씩 한 방에 기거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방이 비좁고 누추하였다. 아들이 이런 곳에서 기거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께름칙하고 불안했다.

 

이제 우리는 딸만 데리고 내년에 귀국해야 하게 될 것이었다. 아들은 졸지에 미국에 내던져지게 될 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들의 체류신분이 또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1 주재원비자로 미국에 온 우리 가족이 귀국하고 나면 아들의 학교에서 재차 아들의 신분학인을 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아들이 F1 비자를 받아야 하는 국제학생 신분이 된다면 학교 등록금은 국제학생 기준으로 대폭 올라갈 것도 문제였다.

 

이 문제로 걱정하고 있을 때 교회의 교인 중에서 역시 주재원으로 있던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영주권을 얻는 방향으로 해 보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영주권자가 되면 학비를 국제학생이 아닌 뉴저지 거주자 기준으로 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영주권 신청을 하였다면서 맨해튼의 ‘힉비(Hicbie)’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이민전문변호사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맨해튼 31번가에 있는 힉비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변호사는 아내가 한국인이었고 사무실에도 한국인 통역 겸 비서를 쓰고 있었다.

 

힉비 변호사는 한국전력 뉴욕지사가 미국에 세금을 내는 현지설립법인이기 때문에 뉴욕지사가 스폰서가 되어 나를 고용하고 나와 가족의 영주권을 미국정부에 신청할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귀국할 날짜가 몇 달 남지도 않았고 영주권이 나오는데 보통 1년 반, 2년씩 걸리는데 귀국 전에 어떻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영주권을 신청하고 나면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출국을 못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해외로 나가게 되면 영주할 의사가 없다고 간주하고 영주권신청이 무효화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힉비 변호사는 내가 귀국하더라도 가족이 미국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으면 내가 업무상 장기해외출장 하는 것으로 이민국에 신청을 하여 출국허가를 받으면 되니 걱정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졸지에 미국영주권 신청을 하게 되었다. 힉비 변호사는 영주권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알려주고 영주권신청서류 양식을 준비해 주었다.

 

나는 지사장에게 이러한 내용을 알리고 그 양식에 따라 신청서를 작성하고 회사(뉴욕지사)의 현지법인 등록서류와 나의 세금납부기록 등을 갖추어 영주권 신청을 하였다. 지사장 또한 서울에 아들을 두고 온지라 내가 아들 때문에 부득이 영주권을 신청해야겠다고 하자 선선히 신청서류에 서명을 해 주었다. 영주권신청에는 많은 번거로운 일이 뒤따랐고 돈도 많이 들었다. 힉비 변호사에게는 변호사비 수천 달러와 영주권 신청비를 지불하였고 우리 가족은 또 몇 천 달러를 들여 몇 곳 병원을 돌아다니며 결핵예방주사니 무슨 예방주사니 하는 쓸데없는 주사를 맞고 접종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모두 1만 수천달러가 넘는 돈이 들었다.

 

한 편 한국에서는 ‘97 대통령선거가 시작되고 김대중 후보와 이해창 후보가 격돌하게 되었다. 미국에 나와 있는 우리에게는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대통령선거는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지사장도 이 때 만큼은 같은 경상도라고 나를 자기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사무실로 와서 절대로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안 된다고,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나라고 회사고 틀림없이 전라도 사람들이 득세하여 말아먹게 될 거라면서 열을 올렸다. 그러나 지사장의 바람과는 달리 대통령 선거는 김대업이 이회창 아들 병역면제 비리의혹을 터뜨리고 결국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지사장은 몹시 실망하였다. 나에게 당신도 경상도니까 귀국하면 조심하라고 하였다.

 

IMF 경제위기가 터졌다. 우리는 왜 경제위기가 왔는지 IMF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코참에서 일하는 주재원 한 사람이 이제 한국은 부도가 나고 한국의 여자들이 남의 나라에 가정부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국뉴스는 대통령 당선자가 소로스를 모셔다가 대접을 하고 온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의 삼년 주재원생활의 마지막 해는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지나갔다. 이듬해 1998년 4월, 나는 뉴저지에 가족을 둔 채 귀국하였다.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계획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영주권이 나온 다음엔 아들만 미국에 남겨두고 아내와 딸은 귀국하도록 해야겠지, 그 때는 그런 생각 밖에 할 수가 없었다.

 

회사는 해외생활을 하고 돌아온 사람은 일단 본사가 아닌 현장에 1년 이상 근무해야 한다는 인사방침에 따라 나를 영광원자력본부 건설소, 영광 5,6호기 건설현장으로 발령하였다. 나는 그렇게 1988년 3월에 영광 1,2호기 건설을 마치고 본사로 올라간 지 꼭 10년 만에 다시 영광 건설현장으로 발령을 받은 셈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25평, 방 두 개짜리 작은 직원사택 아파트 하나를 배정해 주었다. 나는 한 직원의 소개로 낡은 승용차 한 대를 100만원에 구입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안동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아파트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IMF로 원-달러 환율이 치솟아 있었다. 회사에서 받는 봉급은 이것저것 공제를 하고나면 200만원도 채 안 되었다. 환율이 1700대 1이나 되니 천 달러 조금 넘는 금액인 셈이었다. 한국전력에서 30년째 일하는 부장의 월급이 천 달러 남짓이라니.....

나는 최소한의 용돈만 남겨두고 홍농우체국으로 가서 환전을 하여 천 달러, 혹은 천이백 달러를 뉴저지의 아내에게 부쳤다. 한 달 렌트비도 안 되는 그 돈으로 어림없을 터였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내게 통장의 잔액이 거의 바닥나고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아들은 무슨 배선용역회사에서 밤에 일을 하는데 전선주에 올라가 전화선 같은 것을 설치하거나 연결하는 일이라고 했다.

‘뭐? 아들이 그런 일을 한다고? 위험한 일일 텐데...., 그리고 그렇게 밤에 일을 하고 공부를 어떻게 하나? 아,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이런 식으로 버텨낼 수 있을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랴? 끝없이 어두운 터널 안을 걷는 것처럼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