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81. 술 안 마시는 예수쟁이 부장

Thomas Lee 2023. 4. 1. 07:16

꼭 10년 만에 다시 온 영광원자력은 옛날 영광 1,2호기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본부 전체를 관장하고 대표하는 본부장, 영광 1,2호기를 운전하는 제1발전소의 소장, 영광 3,4호기를 운전하는 제2발전소의 소장, 영광 5,6호기를 건설 중인 건설소의 소장, 이렇게 최고위 1직급 간부만도 네 분, 2직급 부소장이 각각 둘씩 여섯 분에다 실장이 세 분, 그리고 본부, 제1발전소, 제2발전소, 건설소별로 각각 부장급이 열 명씩이 넘어 부장들만 50 여명 되는 것 같았고 과장들 250 여명, 직원들 일천여명이 되어 전체인원은 일천 이삼백 명은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발령받은 보직은 본부장 직속 품질관리2부장이었는데 건설중인 영광 5,6호기 품질관리업무를 담당하는 자리였다. 이미 준공되어 가동중인 발전소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품질관리1부와 건설분야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품질관리2부가 발전소와 건설소에 소속되지 않고 본부장 직속으로 된 것은 품질관리의 독립성을 위한 것으로 원자력규제사항이기도 하다.

 

앞서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지만 원자력 품질관리는 작업원, 종사원 모두에게 부여된 의무사항이다. 모든 사람이 품질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원자력 품질관리체제는 중복에 중복을 더하는 확인중복체제다. 한 사람이 일하는데 감독(Supervisor)이 작업을 지시, 지휘, 감독, 확인하고 다시 품질검사요원(Quality Control: QC)이 검사하고 다시 품질관리요원(Quality Assurance: QA)이 최종결과를 확인하는 식으로 네 다섯 사람이 뒤에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식이다. “중복검사와 중복확인으로 품질불량이나 시행착오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원자력발전소를 안전하고 신뢰성 있게 건설하고 또 운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요 요건이다.

 

그렇게 건설공사 과정에서 품질검사부서는 자재나 기기에 문제가 있는 것, 시공이 잘못 된 것, 도면이나 절차가 잘못 된 것 등 발견되는 모든 불일치사항을 부적합보고서(Non Conformance Report: NCR)로 작성하여 보고한다. 그러면 기술부서가 이를 검토하고 해결방안을 수립하여 NCR에 조치지시사항(Disposition)을 기록하여 현장에서 이 조치지시사항에 따라 조치를 하게 된다.

 

해결조치사항(Disposition)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Repair’, 수리하거나 고치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원래 규격이나 도면과는 차이가 나거나 없는 용접선이 추가되는 되는 것 같은 차이가 발생한다. 둘째는 ‘Rework’, 다시 재작업 하라는 것이다. 작업한 것을 걷어치우고 도면이나 절차대로 다시 정확히 재시공하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원래도면이나 절차서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Use-As-Is’, 그냥 그대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도면이나 요건과는 다소 다르지만 문제없는 것으로 판단되니 그대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끝으로 ‘Reject’, 폐기하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자재나 부품에 해당되는데 폐기하고 새로운 자재나 부품으로 교체하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술조치사항 가운데 Rework나 Reject는 원래요건대로 재작업하는 것이니까 품질기준으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Repair(수리, 보수)나 Us-As-Is(있는 대로 사용)는 도면이나 요건과 차이가 있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품질등급(Q, R, T Class)의 경우는 반드시 품질관리부서장(QA)의 확인과 승인이 있어야 한다. 이 품질관리부서장(QA)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나의 휘하에는 과장 세 사람과 직원들 열다섯 명 정도가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들과 부적격사항보고서, 불일치사항과 변경사항들이 우리 부서로 날아와 최종적인 품질보증확인 절차를 밟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품질관리요원들은 품질검사부서, 시공감독부서, 자재관리부서 등이 수행하는 업무와 절차서 이행상태, 품질관리를 감사(Audit)하고 업무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엔 시정조치요구서(Corrective Action Request: CAR)를 발행하는 품질업무감찰 역할도 했다.

 

10년 만에 다시 건설현장에서, 그러나 10년 전과는 다른 업무를 맡아보니 참 많은 변화가 느껴졌다. 우선 영광 1,2호기 때와 같은 긴박하고 치열한 느낌이 없었다. 온갖 문제와 부딪히며 건설공정 준수를 위하여 밤샘작업, 돌관작업을 하던 그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간부직원들이 문제해결과 공사진행을 위하여 머리를 싸매는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모두들 여유를 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같은 설계로 영광 3,4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울진 3,4호기를 거치고 영광 5,6호기에 이르면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이 영광 3,4호기와 울진 3,4호기에서 거의 다 해결되고 걸러졌기 때문에 영광 5,6호기는 설계나 절차서나 구매나 시공이나 품질관리까지 선행호기를 따라 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사실 똑같은 설계로 똑같은 원전들을 계속 지어나가는 것은 경제성은 물론 건설공정이나 품질 측면에서 엄청난 이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 그런 것들이 내 눈에 보였다. 매너리즘이랄까 관료화랄까, 기술적 판단보다는 절차라는 틀과 문구와 형식에 매몰된 것이 느껴졌다. 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영광 1,2호기에 비하여 설비와 기기들의 품질등급이 지나치게 상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산업표준규격(IS) 등급이 현저히 줄어들고 Q, R, T 등급이 대폭 늘어나 업무와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아무튼 10년 전 영광 1,2호기 시절에 비하여 영광원자력본부의 인원이 많이 늘다 보니 홍농읍 상하리 골짜기 한전사택단지 안에도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줄줄이 새로 지어져 있었고 전에 얕은 산과 논밭이던 사택 남쪽에는 후문이 새로 나 홍농읍내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택 도로가에 심었던 벚나무들이 훌쩍 자라서 길을 터널처럼 덮고 있었다. 봄철벚꽃이 만개할 때는 볼만 하다고 했는데 내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벚꽃이 진 다음이었다.

 

네 분의 1직급 본부장과 소장님들, 여덟 분이나 되는 2직급 부소장님들과 실장님들, 그리고 나 같은 3직급 부장들 오십 여명, 이렇게 육칠십 명의 간부직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서울에 가족을 두고 현장에 내려온 홀아비 아닌 홀아비들이었다. 과장들이나 직원들 중에도 나이 들고 자녀가 자란 사람들은 서울이나 광주에 가족을 두고 혼자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사택에는 많은 홀아비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독신자들을 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또 사택 뒤켠에는 꽤 잘 갖추어진 골프연습장이 있었고 퇴근 후 저녁식사를 마친 간부직원들이 거기에서 골프채를 휘둘렀다.

 

퇴근할 때가 문제였다. 빈 아파트에 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맛없는 식당밥이나 먹고 쓸쓸히 들어가 잠자리에 들기도 그렇고 자연히 퇴근 후에 본부장, 소장, 부소장, 부장들이 홍농읍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술도 마시는 퇴근회식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부장들이 본부장님을 모시고 저녁식사와 술자리가 끝난 후 사택으로 가서 뒤풀이 오락으로 마작을 하게 된 것 같았다. K본부장은 술과 마작을 좋아해서 매일같이 부장들 몇 사람을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가서 밤늦도록 마작을 하였다.

 

내가 술을 못 마신다니까 은근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K본부장이 내게 술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 깬다고 싫어하는 기색은 역력하였다. 나는 마작도 할 줄도 몰랐다. 본부장 직속인 품질관리부장이 본부장의 취향과 전혀 맞지 않은 예수쟁이였으니 심히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사실 K본부장은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았지만 오래전 부산화력에서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그런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K본부장은 골프도 좋아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한국에 골프장이 많지 않을 때였고 홍농에서 한참 먼 무안골프장 나인홀이 막 개장한 때였다. 골프를 치자면 비용도 적잖이 들었기 때문에 무안골프장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작팀은 본부장을 모시고 더러 골프를 치러 가는 것 같았다. 나도 그 무안골프장에 딱 두 번 가 보았다.

 

또 문제는 과기처 원자력부에서 건설현장에 파견 나와 있는 주재관이었다. 사무관급이었는데 한전의 입장에서는 무서운 관청나리였고 잘 모셔야 하는 시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특히 품질관리부장인 내가 업무창구였으므로 내가 잘 모시고 잘 다독여 쓸데없는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과기처 주재관이 내가 술을 안 마신다고 몹시 못마땅해 했다. 회식자리에서 내게 술잔을 내밀며 마시기를 강요하였고 내가 끝내 술 마시기를 거부하자 어디 안 마시고 배기나 보자, 두고 보자는 식으로 별렀다. 이걸 지켜보는 본부장으로서는 과기처 주재관을 잘 구슬리고 맞추어 주어야 할 품질관리부장이 저러고 있으니 심사가 적잖이 불편하였을 것이다. .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거부하고 과기처 주재관의 술잔을 물리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30대를 보낸, 어쩌면 고향과도 같은 영광원자력에 다시 돌아와서 찍히고 눈엣가시같이 못마땅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회식자리가 파한 다음 건축부장 K부장이 나와 함께 아파트를 향해 걸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 부장님, 저도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주는 술 다 받아 마시고 이렇게 취했네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표도 못 내고 이렇게 살고 있네요. 이 부장님께 너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해합니다. 참 힘드시지요? 이 나라는, 이 회사는 술 안 마시면 안 되는 술 먹이는 나라, 술 먹이는 회사인 걸요. 그러나 제가 무슨 용서를 하고 말고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마음 아파하실 거예요.”

 

나는 본부장과 과기처 주재관에게 찍혔고 나의 회사일은 그리 즐겁지 못 했지만 기억나는 일들은 있었다. 영광원자력본부 체육대회가 열렸다. 평소 달리기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10 킬로미터 단축마라톤에 참가했다.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면서 10 킬로미터를 겨우 완주하고 후미그룹으로 운동장으로 들어오니 본부장이 나를 보고 “이 부장, 아직 대단하네.” 하였다.

 

또 건설소 단합대회가 열렸다. 전 직원이 금요일 저녁에 건설현장에서 꽤 멀리 떨어진 숙박 장소에 집결하였다. 산 속에 마련된 캠핑과 숙박시설이었는데 그곳에서 캠프파이어를 하고 고기를 굽고 밥과 술로 저녁식사를 하고 스무 개 넘는 방에 200여명이 흩어져 들어가 밤을 새우며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흉금을 털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과장, 직원들과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지고 간 하모니카를 불었다. 과장들과 직원들이 앵콜을 외쳤다. 그러다가 하나씩 둘씩 포개져 쓰러져 자고 아침에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 식사를 마친 다음 전 직원이 몇 시간 동안 선운산을 등반하여 산을 넘어 선운사로 내려갔다. 영광 1,2호기 때는 해보지 못 한 단합대회였는데 참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그 무렵 TV에서 본 주방요리사 남자 셋인가와 여자 하나가 펼치는 부엌칼로 토닥토닥 시작하여 신명나고 웅장하게 이어지는 ‘난타’ 공연이 참 기억이 난다. 또 TV 뉴스에서 김대중 정부는 IMF경제위기 극복을 위하여 구조조정과 경비절감을 강조하였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했다. KBS이던가 MBC던가 여러 차례에 걸쳐 뉴질랜드 르포기사를 방송하였다. 뉴질랜드가 어떻게 공무원을 줄이고 긴축하여 작은 정부를 만들었는가를 심도 있게 취재하였다. 대한민국도 그렇게 줄여야 한다고 했다.

 

그 TV 기사를 보며 나는 오래 전 88년도엔가 서울 삼성동사무소에 갔던 때를 떠올렸다. 무슨 서류를 떼러 갔던 것 같은데 서류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면서 탁자에 놓여진 홍보자료를 보았었다. “한국과 일본 비교”였다. 비교자료는 일본이 한국을 압도하는 것뿐이었다. 인구는 3배, 국토면적은 6배, 국민총생산, 일인당 국민소득, 자동차 보유대수, TV 보유대수, 전화 보유대수, 교역량, 무슨 생산량 등, 몇 배에서 몇 십 배까지, 대한민국이 일본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하고 미약하였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은 수치가 하나 있었다. 공무원 수였다. 일본도 80만 명, 한국도 80만 명. 공무원 수에 있어서는 1988년에 대한민국은 이미 일본을 따라잡고 있었던 거다. 나는 김대중 정부가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IMF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 뒤 그런 르포기사는 중단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공무원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동역자”라면서 ‘작은 정부 지향’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무원을 끌어안았고 오히려 공무원을 늘리기 시작하였다.

 

아파트에 방이 두 개라 어머니는 큰방을, 나는 작은방을 썼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직원 가족들이 조그만 텃밭들을 가꾸고 있었다. 우리에겐 텃밭이 없었지만 내가 출근한 다음 어머니는 아파트 텃밭에 내려가서 이웃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을 사귀셨고 더러 풋고추나 깻잎, 호박 같은 것을 얻어오기도 하셨다. 돈을 아끼려고 누가 쓰던 걸 얻어온 고물냉장고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음식이 상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냉장고를 바꿔야 하는데 뉴저지에 돈 부칠 일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했다. 나는 주일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홍농읍교회로 나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십 수 년 전 영광 1,2호기 때 내가 아직 예수 믿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을 그 때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딸이 유치부 크리스마스 성극을 하던 그 교회였다. 나는 자원하여 성가대에 끼여 앉았다. 가끔 하모니카 독주로 특송을 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밤 나는 마귀를 보았다.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새까만 실루엣으로 머리에는 양편으로 뿔이 솟구친 투구를 썼는데 내가 잠자는 침대 오른편 발치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뱀 앞의 쥐처럼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부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입조차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덜덜 떨면서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이 머리맡에 서신 것처럼 그 발목, 그 옷자락을 두 손으로 잡은 듯이 하고 불렀다.

“예수님, 내 구주, 예수님, 내 구주, 예수님, 내 구주.......”

그 소리만 반복하고 다른 어떤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덜덜 떨면서 ‘예수님 내 주구’만 반복하였는데 이윽고 그 검은 그림자가 스르르 사라졌다. 내 평생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없었다.

 

뉴저지에 가족을 두고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에서 홀아비생활을 하던 나의 한국전력 마지막 해는 그렇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