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76. 미국 이민사회와 주재원사회

Thomas Lee 2023. 3. 25. 16:01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95년 4월 1일 우리가 미국에 도착한 날은 토요일이었고 우리 가족은 살림살이와 가재도구를 사느라 쉬지도 못 하였는데 다음날인 일요일에 우리 가족이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온 가족이 늦잠을 자고 교회에도 가지 못 했던 것 같다. 그 다음 주에는 이웃에 살던 부하 과장댁이 알려준 주소로 교회를 찾아 나섰다. 잉글우드라는 동네였는데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 교회는 찾지 못 하고 시간은 11시가 다 되었는데 마침 한 교회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지판을 따라 가니 제법 큰 교회 하나가 있었고 우리는 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 교회로 들어갔다.

 

그런데 교회의 분위기가 어쩐지 좀 이상했다. 교인들은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앞에서 근사하게 흰 옷을 입은 한 여자의 인도에 따라 다들 일어선 채로 열심히 찬양을 부르고 있었는데 찬양곡이 흡사 군가 같았다. 프로젝터로 앞에 띄워놓은 찬양곡 가사는 주님이 사단을 쳐부수고 또 성도들이 진군하는 전투와 승리 일색이었다. 한참 그렇게 찬양이 이어진 다음 그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플라스틱인지 크리스털인지로 만들어진 투명한 강대상 앞에 서서 기도를 인도하고 이어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어라, 저 여자가 목사라고?”

흰옷을 입은 그 여자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였고 설교의 내용은 주님이 무덤에서, 죽음에서사단의 머리를 깨부수고 승리하고 부활하셨다는 것이었다. 이 교회는 보통의 교회가 아니다 싶었다. 나는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시간에 아내의 옆구리를 툭툭 쳐서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나왔다. 그게 우리 가족의 미국에서의 첫 주일예배였다.

 

그 다음 주에는 침례교회를 찾아서 멀리 북쪽으로 올라갔다. 미국교회를 빌려서 오후에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였는데 우리가족이 포트리에서 왔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굳이 이렇게 멀리 오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교회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 다음 주에는 서쪽으로 좀 떨어진 다른 침례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와 예배분위기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역시 집에서 너무 멀고 오가는 길도 복잡하였다. 그 다음 주에는 전에 소개받았던 잉글우드의 교회를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헤매지 않고 그 교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교회 역시 미국인 교회를 빌려서 미국인들의 예배가 끝난 오후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교인수가 열 명도 되지 않았고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셨다는 그 목사님은 혼자서 피아노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하였다. 나와 아내에게는 괜찮겠다 싶었지만 아들과 딸이 다니기엔 좀 아니다 싶었다. 우리 가족은 그런 식으로 몇 달 동안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포트리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감리교회를 알게 되었다. 그 교회 역시 미국인교회를 빌려서 오후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지만 교인수도 아이들까지 합하면 백 명이 넘었고 중고등부도 있었으므로 우리 가족은 ‘침례교회가 아니면 어떠냐,’ 하고 결국 그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게 되었다.

 

미국 이민사회의 교회들은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곳이 많았다.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이 교인수가 적었고 미국교회를 빌려 오후에 예배를 드리는 셋방살이 교회들이었고 그 가운데 이상한 이단성 교회들도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도 있었고 다락방이나 무슨 복음교회 같은 전투적 메시아를 믿는 교회들도 있었고, 김기동 계열의 이단성교회, 구원파에다 금가루, 금이빨 교회까지 이민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것 같았다. 또 한국교회들이 세운 신학교들도 많았다. 한국교회 교단들이나 큰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신학교를 만들고 목회자를 양산해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교회들이나 신학교들이 미국체류신분을 해결하는 매우 중요한 방편인 것 같았다.

 

전화는 벨 아틀랜틱(Bell Atlantic)이라는 전화회사가 독점하고 있었고 한국으로 전화를 걸면 통화료가 1분당 3달러씩이나 되었다. 한 번 통화에 수십 달러의 전화요금이 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나중에 벨 아틀랜틱의 전화사업은 독과점 금지법인가 때문에 버라이전, AT&T, 스프린트 같은 여러 전화회사들로 쪼개어졌다. 그렇게 비싸던 국제전화요금도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점차 싸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공중전화는 내게 악몽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전화카드를 전화기에 넣고 통화를 했는데 미국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한 번 뉴왁공항에 갔다가 전화카드를 하나 사서 공중전화기가 있는 곳에 갔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전화카드를 넣는 전화기가 없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나중에 전화카드에 적힌 조그만 글자들을 읽어보니 어디로 전화를 걸라고 전화번호가 나와 있었다. 그 전화번호가 중계회사 번호였던 것이다. 그 전화번호를 돌린 다음 통화하고자 하는 번호를 또 눌러야 했다. 그러면 통화시간 만큼 전화카드 구입금액에서 돈이 자동으로 줄었다. 국제전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집전화로 거는 것 보다는 쌌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집에서도 전화카드를 사용하여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뉴저지의 전력회사는 PSE&G였는데 전기와 도시가스를 함께 공급하였다. 199년 무렵 전기요금은 kwh 당 12 센트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살던 중국인 집은 집이 오래 된 데다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름에는 지붕에서 내려오는 열기에 푹푹 찌면서도 에어컨으로 한 달에 300 달러 넘는 전기요금이 나왔고 겨울에는 춥게 지내면서도 한 달에 300 달러 넘는 난방 가스요금이 나왔다. 그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낡은 구두쇠 같은 중국인 집에서 어처구니없는 에너지 낭비, 돈 낭비를 하면서 고생하고 살았던 셈이다.

 

27년이 지난 2022년 지금, 뉴저지의 PSE&G가 70% 가까운 전력을 원전에 의존하고 있어 지금도 전력요금이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50% 정도 올랐나? 그러나 뉴욕의 전력회사인 Con Edison은 인디언포인트 원전을 폐쇄하는 등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로 가는 바람에 전력요금이 폭등하여 뉴저지 전력요금의 3배 가량이나 된다. 뉴욕주 2천만 주민들은 지금 탈원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다시 95년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레오니아에 있는 한국인 선물가게에서 삼백 몇 십 달러를 주고 소니 TV 한 대를 사와서 거실에 설치하였다. 팰리세이즈팍에 있는 유선케이블 회사에 신청하였더니 한 달에 백 몇 십 달러 시청료로 유선케이블 채널박스를 달아주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TV방송은 CNN, NBC, FOX 같은 채널들과 몇 개의 오락방송이었고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HBO 같은 채널은 보지 않았다. 유선방송 채널에 한 개인가 두 개의 한국방송이 있었는데 한국방송은 한국에서 방송되는 뉴스나 연속극 같은 것을 녹화하여 비디오테이프를 대한항공 편으로 부쳐주면 JFK 공항에 가서 그걸 받아다 틀어 보여주었기 때문에 항상 하루 정도 늦은 고국소식이 되었다.

 

한국신문도 한국일보가 나왔고 나중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가세하였는데 한 달 구독료가 20~30 달러 되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발행된 신문이 항공운송 되어 와서 미국에서 인쇄되는 현지판 신문을 거기에 끼워서 배달되는 거라 하루, 이틀 시간차가 있었고 뉴스(News)는 그 사이에 낡은 올스(Olds)가 되어 있었다. 포트리나 팰리세이즈 팍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비디오 가게가 많았다.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매주 열 몇 개씩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한국드라마를 보았다. 한인마켓에 가면 교민사회에서 발간되는 교민신문과 잡지, 한인업소들의 광고들로 만들어진 ‘교차로’라는 책자도 있었다. 교차로에는 식당, 세탁소, 델리, 이발소, 미용실, 네일가게, 부동산, 보험, 진학학원, 선물가게, 옷가게, 컴퓨터가게 등 한인들이 하는 온갖 비즈니스들과 가게들의 광고가 빼곡히 실려 있었다.

 

지금은 ‘H 마트 한아름’이라는 한인마트가 이 지역 한인사회를 석권하여 가장 큰 식품마트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잉글우드에 한아름마켓, 버겐필드에 한양마켓이 있었고 포트리에는 장스마켓이라는 한국 식품가게가 있었다. 장스마켓은 이 지역에서 처음 생긴 한인마켓이라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주인아저씨가 아틀랜틱시티에 가서 카지노에 다 털어 넣었고 아들은 강도의 칼에 찔려 죽었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았다. 포트리에서 아틀랜틱시티 카지노로 가는 무료버스가 매일 운행되고 있었다. 아틀랜틱시티 카지노에 재산을 갖다 바치는 한국인들이 그 때도 많았지만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알게 모르게 많은 것 같다.

 

아무튼 3년이라는 제한된 기간이지만 미국에서 회사가 주는 급여를 받으면서 살다가 귀국하게 되는 주재원들과 그 가족의 삶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교포들의 삶과 같을 수는 없었다. 포트리 지역에는 많은 한전 뿐 아니라 많은 한국 지상사(支商社)들이 진출해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수많은 주재원들과 주재원 가족들은 이민사회의 경제의 매우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출석하게 된 교회 안에서도 같은 교회식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과 구획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고 그건 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대학진학을 위하여 나름대로 공부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학교에서 소위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딸은 학교에서 브라스밴드에 참여하여 플롯연주도 하고 했지만 말이 통하는 한국학생들과 많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위하여 좀 멀리 북쪽으로 한국인들이 적게 사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아내와 나누기도 했지만 이사한다는 것도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교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교인들 중에는 주재원들도 있었고 현지교포들도 있었다. 80년대 초반에 이민 온 한 분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니 공항에서 영주권을 주더라고 했다. 뉴욕에 와서 작은 가게를 운영했는데 돈이 잘 벌려서 젊은 기분에 흥청망청 썼다고 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델리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 분이 한 이야기 중에 잊어지지 않는 것은 미국의 뒷골목이나 상권이 마피아에 장악되어 있어 장사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 한국인이 뉴욕의 연어 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 하고 알라스카에서 연어를 대량으로 사와서 팔아 돈을 벌었는데 어느 날 목이 잘린 시신으로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한 부부는 생선가게에서 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이었다. 나는 그 남편분과 함께 교회에서 재정부 헌금계수 하는 일을 잠깐 했는데 그 분은 목사에게 매달 지급되는 사례비와 사택비, 보험료 같은 것이 너무 많다고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났다. 다른 한 부부는 조그만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 보았더니 거의 외마디 수준의 콩글리시로 미국인 고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부부는 남편은 흑인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아내는 우체국에서 일하였는데 세탁소의 벌이가 괜찮았는지 수십만 달러를 주고 집을 샀다면서 교인들을 불러 집들이를 했다.

 

그런데 세탁소도 옛날 같지 않다고 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인들이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자녀들 대학도 보내고 넉넉히 살았는데 이젠 세탁소가 너무 많이 생겨나서 한인세탁소들끼리 가격경쟁을 하느라 20년 전 와이셔츠 한 장 세탁비 1 달러가 지금도 1 달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빠른 사람들은 세탁소를 내어 장사를 하다가 매상이 올라가면 세탁소를 팔아서 많은 이익을 얻는 세탁소 장사를 한다고 했다. 미국에 무작정 온 한인들 중에는 마땅한 비즈니스가 없어 그런 세탁소를 인수했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돈까지 까먹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을 고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하였다.

 

한인들에게 또 큰 문제는 체류신분 문제였다. 처음에는 이민이나 영주권 취득이 쉬웠지만 해가 가면서 이민문호는 좁아지고 영주권 받기도 어려워졌다고 했다. 취업비자를 받아서 오거나 학업비자를 받아서 오거나 종교비자를 받아서 오거나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는 길은 험난하였고 관광비자로 와서 늘러 앉은 불법체류자도 적지 않다고 했다.

 

어쨌든 삼년 기한으로 미국에 살다 귀국할 주재원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다만 안타까운 이야기일 뿐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가끔 사무부장 부인과 과장 부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거나 쇼핑을 다니기도 하였고 또 교회에서 만난 교인들과 왕래하였는데 어느 날 동네에서 한국인 또래 여자를 만나 사귀게 되었다. 그 여자는 같은 동네에서 한국인을 만나 반갑다면서 아내의 손을 잡고 차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고 그 때부터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는데 남편이 뉴욕영사관에 근무하는 무슨 문화예술 담당 영사라고 했다.

 

그 뉴욕영사가 사는 그 집은 듀플렉스라고 불리는 3층짜리 집이었는데 허접한 우리 사는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좋았다. 우리집의 렌트비는 한 달에 천오백 달러였는데 그 집은 삼천 달러가량이나 된다고 하였다.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비나 주거비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 같았다. 나도 아내와 함께 그 집으로 가서 부부가 함께 식사도 하고 그 영사를 뉴욕 영사관에 가는 길에 만나기도 했는데 영어를 나보다도 훨씬 못 했고 미국인 여자통역사가 곁에서 시종처럼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하, 공무원들은 저런 형편없는 영어실력으로도 영사로 나오는구나.”

몇 년 후 그 영사 가족은 스웨덴으로 전근되어 갔고 이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들리는 소식으로는 은퇴연금도 적지 않다는 것 같다.

 

우리 한국전력 뉴욕사무소 직원들이 부족하고 구차스러운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무원이나 대기업 지상사들에 비하여는 열악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렌트비가 적었다. 소장은 이천 달러 수준, 부장, 과장은 천오백 달러 수준에 묶여 있어서 허술한 집 이층이나 겨우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 또 아이들에게 속된 말로 좀 쪽팔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공무원이나 대기업 지상사 수준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3년간의 미국생활을 나름대로 누릴 수는 있는 수준은 되었다. 그러니 남편들은 주말마다 그린피가 비싸지 않은 퍼블릭 골프장들을 찾아다니며 골프를 칠 수 있었고 아내들은 아내들끼리 어울려 작은 그릇들이나 컵, 히슬러 냄비나 옷이나 머플러 같은 귀국 때 가져갈 살림살이 가재도구와 선물들을 알뜰살뜰 장만하러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귀국선물은 커피나 초콜릿 과자 같은 게 대세였고 좀 비싼 걸로는 그릇과 컵, 스카프, 머플러 같은 것들이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째가 되니 귀국할 때 아이들의 일이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아들은 일단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해야 할 것 같았고 나중에 사정을 봐가면서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막 올라간 딸은 아무래도 데리고 귀국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문제였다. 딸의 입장에서 보면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와서 1년 손해 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고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야 할 텐데. 영어도 한국어도 어정쩡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주재원 가족들의 공통된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 주재원 가족들에 의하여 한국학교가 만들어져 있었다. 티넥(Teaneck)이라는 동네의 한 고등학교 교실을 빌려 토요일마다 한국인 자녀들을 위한 한국학교가 만들어져 아이들에게 한국의 중학교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버스가 운행되었고 삼성, 대우, 현대, 엘지, 한전 등 한국 지상사 주재원가족 엄마들이 순번을 정하여 안전요원과 안내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딸을 토요일마다 그 한국학교에 보냈고 아내도 순번에 따라 몇 차례 안내요원이 되어 봉사하였다. 딸은 아무 말 없이 주중에는 미국학교에 토요일에는 한국학교에 다녔지만 참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3년 미국 주재원생활은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