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73. 청기와장수 소장님과 김치찌개 사건

Thomas Lee 2023. 3. 22. 18:22

뉴욕사무소의 업무는 기자재구매업무와 해외업체상대를 해온 내게 그리 어렵거나 무거운 일들은 아니었다. 기술부서의 과장들은 미국 업체들의 공장에서 제작, 공급되는 영광 3,4호기와 울진 3,4호기 건설용 기자재와 보조기기들의 제작진도를 점검하고 독려하여 늦지 않게 납품되도록 하는 일, 그리고 제작과정에서, 그리고 제작완료 때 공장을 방문하여 품질검사를 하고 출하승인을 하는 일이 주업무였고, 사무부서 과장들은 미국업체들이 제작된 물품을 미국수출항에 운송하여 대한통운에 인도하면 기자재 납품대가를 지불하는 업무, 대한통운의 운송대가를 지불하는 업무, 그리고 경영정보 수집이라 하여 미국에서 발간되는 전력관계 잡지와 뉴스를 발췌, 번역하여 본사로 보내는 일들을 하였다.

 

사실 사무직들이 하는 대가지급업무나 경영정보수집 업무는 반드시 미국현지에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술직의 업무는 반드시 제작공장을 방문하여 물품을 직접 확인하고 점검 혹은 검사를 해야 하고 때로 제작이 늦어지거나 건설공정상 건설현장에서 긴박하게 필요로 하는 경우 긴급하게 달려가서 제작독려를 해야 하고 때로는 한기의 기술부장들을 동원하여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뉴욕사무소장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이나 기자재에 관하여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사무직 1직급 고위직원이 맡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원래 고리 3,4호기와 영광 1,2호기 때는 미국에서 제작, 공급되는 기자재 관련업무를 위하여 벡텔사에 로스앤젤레스 사무소를 두고 또 웨스팅하우스에 주재사무소를 두고 기술부서에서 운영하였는데 영광 3,4호기부터는 회사를 장악한 사무직이 해외사무소들을 접수하여 대금지불업무와 경영정보수집업무 같은 업무를 한다고 사무직 직원들을 추가로 파견하고 소장도 사무직이 맡게 된 것이다. 따라서 뉴욕사무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원자력건설을 위한 기자재 제작공급 업무가 아니라 손님접대와 의전(儀典)과 대외업무가 되어 있다시피 했다.

 

뉴욕사무소장인 이W 소장님은 한 때 본사 외자처에서 해외차관과 금융조달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분이었다. 연세도 오십대 중반이었고 몇 년 뒤면 정년퇴직을 하거나 집행간부(전무)로 승진하실 분이었는데 말년에 뉴욕사무소장으로 나와서 해외생활을 누리고 계신 셈이었다. 사무실에서나 집에서나 항상 손에서 영어책자나 영어사전을 놓지 않고 영어공부를 계속하여 영어실력을 갈고 닦았고 젊어서 태권도를 수련했다는 몸은 단단하고 빵빵하여 우람한 탱크 같았다. 골프는 치지 않았지만 매일 근력운동을 한다고 했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할 때면 언제나 ‘Dewars’라는 이름의 양주를 마시며 ‘Dewars’가 박정희 대통령이 마시던 시버스 리걸 보다 나은 술이라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또 자신이 영어를 잘 한다는 것과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부하직원들에게 은근히 자랑하고 과시하기를 좋아하였다. 이 분의 단골메뉴 중 하나는 ‘천주교의 일곱 가지 성사(聖事)가 무엇이냐’였다. ‘청기와장수’라는 별명은 이 분이 해외차관과 금융조달업무를 하면서 취득한 업무지식과 노하우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거나 공유하지 않고 개인영업비밀로 지켰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했다.

 

아침에 출근하여 아홉시가 되면 사무부장인 박 부장과 기술부장인 나는 노트를 들고 소장실에 들어가 아침문안인사 겸 업무보고를 하였다. 사무부장은 간략한 업무보고에 이어 그 날에 있는 주요행사와 본사 혹은 정부기관에서 뉴욕을 방문하는 인사와 일정을 보고하였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코참(재미한인상공인회의: KOCHAM)에 참석하는 것도 빠지지 않는 중요일정이었다. 기술부장인 내가 보고하는 내용들은 주요기자재 납품현황과 품질검사나 출하검사, 혹은 제작공정 확인 및 독려를 위한 미국업체 공장방문 출장계획 같은 것들이었다. 어려운 기술적 문제들은 설명해봐야 어차피 알아듣기 어려울 것이므로 가급적 간단하게 보고하고 끝내곤 하였다.

 

기자재 제작과 납품이 한창 진행될 때는 과장들은 물론 부장인 나도 같이 뛰어야 했다. 커넥티컷주의 CE 공장과 뉴욕주 스케넥터디의 GE 공장, 그리고 뉴욕 롱아일랜드나 뉴저지 일대의 가까운 제작공장들에는 자동차를 몰고 이틀이나 사흘, 가까운 곳이면 당일에도 다녀올 수 있었지만, 캘리포니아, 알라바마, 오하이오 같은 먼 곳은 비행기로 사나흘 일정의 출장을 다녀야 했다. 기술직 부장과 과장들은 미국 내 여러 곳의 제작공장을 방문하기 위한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사무직 소장이니 부장, 과장들은 간혹 뉴욕이나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플로리다, 캐나다 터론토나 밴쿠버, 에드먼턴 같은 곳에서 열리는 전력회사 국제회의 같은 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사무직 소장이나 부장, 그리고 과장들에게는 은근히 불만스럽고 눈꼴신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한 지 반 년 쯤 지난 95년 늦가을쯤이었다. 나는 소장님에게 출장허가를 받고 영광 3,4호기 핵폐기물처리설비를 제작하는 업체를 방문하기 위하여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공항에서 렌트카를 빌려 운전해서 제작업체를 찾아갔다. 오후에 도착하였으므로 일단 개략적인 제작상황을 알아보고 나서 다음날 구체적인 협의와 확인을 위하여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서 나와 짐 가방을 차에다 싣고 제작업체로 다시 찾아갔다. 제작품목과 제작납품일정을 점검하고 오후에 뉴욕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제작책임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는 전갈이 왔다. 1995년 그 당시는 아직 휴대전화가 없었고 사람들이 간혹 삐삐를 차고 다닐 때였다.

 

나는 사무실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과장이었다.

“아, 부장님, 다름이 아니고 소장님이 전화통화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그러고는 소장님을 바꿔주었다.

“아, 소장님이십니까? 무슨 일이신지요? 저 오늘 저녁에 돌아가겠습니다.”

소장님이 말했다.“아, 이 부장, 오늘 나도 거길 좀 가봐야겠네.”

“예? 소장님이 여길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부장인 너는 미국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고 소장인 나는 사무소에 앉아있어야 하느냐는 것 같았다.

 

나는 업체에 뉴욕사무소장이 방문하러 온다고 통보를 하였다. 업체에서는 적잖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비상이 걸렸다. 나는 소장이 오후 세시쯤 클리블랜드 공항에 도착하면 내가 가서 모시고 올 테니 간단한 회사소개와 브리핑, 그리고 공장투어를 준비하고 저녁식사를 대접하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고 업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호텔에 전화를 걸어 방 두 개를 예약해 두고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동차 반납일을 하루 연기하였다. 그리고 차를 몰고 클리블랜드 공항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소장님을 태워서 돌아왔다.

 

그렇게 업체에 들이닥친 소장님에게 그 업체의 사장과 부사장, 공장장, 제작책임자 등 주요간부들이 인사를 하고 회사 브리핑을 하고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공장견학까지 마치고 나서 그 업체에서 모두 열 두어 명이 소장님을 모시고 작은 폭포로 정원을 꾸며놓은 식당으로 갔다. 클리블랜드에서 제법 유명한 식당인 것 같았다. 이층에 마련된 우리의 만찬장에는 테이블이 기다랗다 놓였고 식당이 다른 손님들로 좀 시끄럽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이블 한 쪽에는 사장과 부사장 등 업체의 고위직 간부들이 소장님을 중심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고,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 않는 테이블의 반대편 끝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좀 직위가 낮은 간부직원들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소장님은 평소에 자랑하는 그 유창한 영어와 온갖 지식을 뽐내며 유쾌하게 떠들었고 사장과 간부들이 경청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는 반대쪽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갖고 간 하모니카를 꺼내어 몇 곡을 연주하였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식사가 끝나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는 소장님을 승용차 뒷자리에 모시고 호텔로 향하였다. 그 시각이 밤 열 시 쯤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호텔을 행하여 운전해 가는데 뒷자리에 앉은 소장님이 나를 불렀다.“야, 이 부장. 여기 어디 저녁 먹을 데 없냐?”“예?”

“나 배고프다. 어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하는 데 없냐?”

“아니, 저.....”

“야, 이 부장, 자네는 부장이 되어가지고 소장이 뭘 먹는지 안 먹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단 말이냐? 양식(洋食), 그게 사람이 먹는 거냐? 난 양식이 입에 맞지 않아 포도주 한 잔 밖에는 아무것도 못 먹었다.”

어이가 없었다. 외자유치를 위하여 해외를 그렇게 다니고 미주, 유럽, 수십 개 나라를 다녔다고 자랑하는 소장님이 양식을 먹지 않는다니.......

“이 부장, 어디 라면 같은 건 없을까?”

나는 눈에 띄는 수퍼마켓 앞에 차를 세우고 마켓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라면은커녕 마땅한 먹거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니다, 이 부장, 어디 한국식당 좀 찾아봐라. 김치찌개 좀 먹자.”

 

길가에 차를 세우고 공중전화 부쓰에 들어가서 전화기 밑에 매달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R, R, R, 레스토랑......”

있었다. 코리아식당인지 서울식당인지 그런 이름이 붙은 한국식당이 있었다.

나는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밤 열시가 넘었으므로 전화를 안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전화를 받았다.

“아, 한국식당이지요? 저희들 뉴욕에서 왔는데 혹시 김치찌개 좀 될까요?”

식당에서는 원래 열시에 문을 닫지만 기다릴 테니 오라고 하였다.

한국식당은 하필이면 클리블랜드 도심을 통과하여 반대편 이리호 호수 쪽에 있었다. 전화로 알려준 걸 받아 적은 메모에 의지하여 클리블랜드 도심을 가로질러 거의 밤 11시나 되어서 식당에 도착하였다.

식당에는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치찌개가 나왔다. 소장님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도로 뱉어내면서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땅’ 내리쳤다.

“이게 뭐야? 이거 돼지고기 아냐. 야, 이 부장, 내가 돼지고기 안 먹는 거 몰라?”

다시 어이가 없었다.

나는 주인아저씨에게 소고기로 김치찌개를 다시 만들어달라고 사정을 했다. 주인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측은하게 보았는지 딱하게 보았는지 김치찌개를 다시 만들어 왔다. 돼지고기의 비개를 제거하고 쇠고기 다시다 같은 조미료를 넣어서 다시 끓여 가져온 것 같았다. 아니 나중에 주인아저씨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소장님은 그걸 소고기 김치찌개라고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소장님은 예의 그 Dewars 양주를 주문하였다. 어딜 가나 그놈의 Dewars 양주였다. 소장님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술을 안 마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혼자서 양주를 마셨다. 그러다 취기가 오르자 이번에는 노래방 가라오케가 있느냐고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를 식당 뒤편에 아마 복도를 개조해서 만든 듯 한 좁고 기다란 노래방으로 안내하였다. 소장님은 마이크를 잡고 몇 곡을 뽑으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면서 노래를 부르란다. 내가 몇 곡을 불렀더니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가씨 불러올 수 없느냐고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주인아저씨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여 여자 한 사람을 불러왔다. 소장님은 그 아가씨를 옆에다 앉혀놓고서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셨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노래 부르고 나서 어느 정도 성에 찼는지 이제 호텔로 가잔다. 새벽 네 시쯤 된 시각이었다. 소장님을 다시 승용차에 태워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무슨 오소리 같은 짐승이 길옆에서 툭 튀어나오더니 내가 운전하는 차바퀴에 탁 부딪혔다. 불쌍한 오소리!

 

이 일 말고는 그 소장님이 나를 특별히 나쁘게 대하시거나 어렵게 하시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27년 전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아, 그 날 비용? 한 500 달러쯤 나왔던 것 같은데 내가 신용카드로 지불하고 사무부장에게 처리하라고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