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74. 골프 치는 아빠와 여름가족여행

Thomas Lee 2023. 3. 23. 21:11

뉴욕사무소 주재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 하나가 골프였다. 1995년, 아직 한국에는 골프장이 열 개도 안 되었고 골프는 일반인들이 좀체 하기 어려운 귀족운동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주재하는 3년 동안 골프를 열심히 치는 것이 돈 버는 거라 하여 부장과 과장들이 전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골프를 치러 다니는 것이 불문율, 아니 의무사항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과장들의 추천에 따라 1,100불짜리 캘러웨이 아이언세트, 거의 300불짜리 드라이버, 150불인지 200불짜리 우드 두 개, 그리고 골프백, 골프공, 장갑, 모자, 티셔츠, 그리고 손으로 끌고 다니는 카트까지 도합 이천 불 가까이의 거금을 들여 골프장비를 구입하고 골프연습장에 가서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였다.

 

두어 주 레슨과 연습을 거친 다음 어느 토요일, 드디어 골프장에 나가게 되었다. 소장님은 골프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무부장과 과장들만 갔는데 나를 환영한다 하여, 또 내가 처음 골프장에 머리 얹으러 나간다 하여 포트리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뉴욕 업스테이트의 꽤나 좋다고 이름난 그로싱거(Grossinger) 골프장으로 데리고 갔다. 골프장이 난생 처음이었다. 드넓은 골프장을 덮은 잔디는 내 눈에 잔디가 아니라 양탄자처럼 보였고 골프는 운동이 아니라 호사스러운 놀음처럼 느껴졌다.

“이놈의 나라는 세계에서 좋은 건 다 갖다놓고 다 만들어놨구나.”

 

나는 1번 홀 티박스에 올라가 인생 첫 드라이버 티샷을 했다. ‘틱’ 소리와 함께 빗맞은 공이 ‘떼구루루’ 굴러 오른 편에 관목울타리에 가서 처박혔다. 사무부장이 내게 ‘멀리건’이라면서 다시 치라고 했다. 다시 쳤지만 이번에는 대가리를 맞은 공이 또 “떼구루루‘ 얼마 못 갔다. 몇 타 만에 그린에 도착하였는지 우여곡절 끝에 첫 홀을 지나고 나니 왼편으로 구부러진 곳 언덕 위에 다음 홀 티박스가 있었고 파 4인 그 홀의 그린은 물 건너편에 섬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또 거기서 공 두어 개를 물속에 빠뜨렸다. 겨우 그린에 올라갔지만 골프레슨을 받으면서도 퍼팅을 어떻게 하는 건지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던지라 퍼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이 퍼팅하는 걸 보고 당구 치는 요령으로 흉내를 내었는데 홀은 왜 또 그렇게 작게 만들어 놓았는지. 그렇게 그 첫 골프라운딩을 어떻게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타수로 아마 120타, 130타는 가볍게 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과장들이 좀 가까운 하버스트로라는 곳의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골프 카트를 타지 않고 걸었다. 오르막 내리막이 심한 골프장이었는데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골프공을 쫓아다니고 헤매느라 전반 나인홀을 돌고 나니 기진맥진하였고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 열여덟 홀을 마쳤는지 정신이 없었다.

 

다들 주말이면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골프를 치고 다녔지만 나는 주일에는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토요일 하루만 골프를 치는 것으로 하였다. 한 주일에 토요일 단 하루였지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골프를 쳤고 넉 달 뒤엔가 라클리 골프장에서 과장들과 함께 라운딩을 하면서 98타, 처음으로 두 자릿수 타수를 기록하였다. 골프는 시간이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골프 한 게임에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다 골프장까지 왕복운전시간과 준비시간, 대기시간을 합치면 하루가 그냥 날아갔다. 그러나 평소에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내게 이때부터 골프는 거의 유일한 운동이 되었다. 처음에는 18홀을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서울에서는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가기만 하면 10분. 20분도 걷기가 힘들어 앉을 곳을 찾던 내가 대여섯 시간을 끄떡없이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수시로 허리가 아프던 내가 허리가 아프지 않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일흔을 넘긴 내가 아직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골프 덕분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골프가 좋은 것은 대자연 속을 걷는다는 것이었다. 골프채를 휘둘러 때린 하얀 공이 푸른 하늘로 솟아올라 날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시원하고 짜릿한 즐거움이었고 동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것도 기쁨이었다. 전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나 즐기는 사치스러운 놀이라고 생각했던 골프가 때로는 하나님이 지으신 대자연이라는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주말마다 골프나 치는 것은 분명 축복은 아니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뉴욕을 바로 곁에 두고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맨해튼에 나가 브로드웨이와 타임스퀘어, 그리고 센트럴파크를 걷고 뮤지엄과 미술관을 구경하고 오페라나 뮤지컬을 보고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는, 더러는 가족을 차에 태워 워싱턴 DC와 필라델피아, 보스턴 같은 곳에 데리고 가는 가장의 즐거움, 골프나 치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그런 축복을 3년 동안 골프만 줄창 치느라 거의 누리지 못 했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회사에 나가 밤이 되어서나 돌아오고 토요일엔 골프 치러 나가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는 게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빠와 엄마는 성가대 연습을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주방봉사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헌금계수 봉사를 하는 동안 아들과 딸은 주일학교 중고등부 예배에 참석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같이 오는 것 말고는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좋은 아빠가 되지 못 했지만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환경도 그랬지만 아들과 딸에게 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였다. 한국은 3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지만 미국에서는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별 수 없이 아들과 딸은 한 학년을 낮추어 들어가야 했다. 중학생인 딸은 그나마 좀 나았지만 문제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막 올라갔던 아들이었다. 6개월을 낮추어 2학년으로 들어간다 해도 금방 가을에 3학년이 될 것이고 그러면 바로 미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ssessment Test, 대학진학적성시험)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할 수 없이 아들은 한 학년 반을 낮추어 포트리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하였다.

 

학교에서는 영어를 못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제2의 언어 영어) Class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ESL클래스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영어가 금방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소문 하여 한국인들 사이에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미국인 영어선생을 시간당 50달러씩 지불하면서 한 주일에 두 번씩 집으로 모셔다 영어과외를 시켰다. 그러나 한 주일에 두 번 과외로 영어가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아들과 딸이 영어 때문에 겪었을 어려움을 누가 알기나 했겠는가?

 

포트리에는 한국인들이 많았고 고등학교에도 한국인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한국인끼리 어울리게 되는 것 같았다. 아들은 키가 큰 편이었다. 게다가 한 학년 반이나 낮추어 1학년에 들어갔으니 다른 아이들 보다 나이도 많았다. 그런데 영어를 잘 못 하니까 한국인 교포 아이들이 놀리거나 깐죽거리는 일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참지 못 하고 어느 날 폭발하여 교포학생 하나를 쥐어박아버렸다. 아들은 출동한 경찰에 잡혀 포트리 경찰서로 끌려갔다. 나는 포트리에 오래 살았고 영어를 잘 하는 교회의 한 집사님에게 부탁하여 함께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 집사님이 경찰관에게 유창한 영어로 한국학생들의 정서를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하여 아들은 짤막한 반성문 한 장을 쓰고 훈방되어 나왔다. 그 일만이 아니었다. 한 번은 아들이 싸움을 하였는지 집으로 그 아이의 부모가 집으로 찾아와 치료비를 내놓으라고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골프모임에서 빠져서 온 가족을 차에 태워 가족과 함께 보스턴으로 가서 하바드 대학과 MIT 공대를 구경하였다. 그렇게 하바드대와 MIT를 가보고 나서 아들이 자극을 받고 공부에 의욕을 갖기를 바랐다. 아무튼 그렇게 어렵게 공부하면서 2년 후에 아들은 생각보다 훨씬 나은 SAT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대학은 아들에게 연이어 닥친 험산준령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되어서 골프나 치고 다닐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붙잡고 함께 공부했어야 했다. 물론 그 때는 3년 뒤에 귀국할 것이고 그 때 웬만하면 한국의 괜찮은 대학으로 편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까지 죽자고 공부시킬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러나 인간사 앞일을 누가 알았으랴?

 

아이들을 내팽개쳐놓고 주말마다 골프나 치러 다니던 아빠가 그런 아이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아빠노릇, 남편노릇을 그나마 한 것은 여름휴가를 내어 여행을 간 것이었다. 첫해 여름에는 세 가족이 캐나다 록키와 옐로스톤 공원으로 한 주일, 7박 8일의 여행을 갔다.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에 내려 한 가족 한 대씩 자동차를 렌트한 다음 국경을 넘어 밴쿠버로 올라갔다가 다시 캐나다 록키산으로 갔다. 눈을 뒤집어쓴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웅장한 산들이 연이어 늘어선 캐나다 록키의 풍경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웅장한 산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재스퍼에서 밴프로 내려오면서 폭포를 구경하고 케이블카로 3천 미터 넘는 고봉에 올라가보고 영화 닥터 지바고를 촬영했다는 빙하와 설원에도 가보고 밴프에서 온천욕도 해보고 밴프의 한국인식당에서 스테이크도 먹고 다시 캘거리를 거쳐 미국 땅으로 내려온 다음 높은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멋진 글래시어 공원(Glacier National Park)을 지나고 다시 남하하여 유명한 옐로스톤 공원(Yellowstone Park)에서 치솟아 오르는 간헐천 분수와 아름답고도 무서운 온천들과 버팔로 들소를 구경하였고, 다시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랜드티탄(Grand Teton)국립공원을 거쳐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에 도착하여 렌트카를 반납하고 뉴저지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8일 동안 2,700 마일을 달린 강행군이었다.

 

그 이듬해 여름휴가 때는 두 가족이 함께 라스베가스(Las Vegas)로 가서 차를 빌려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가보고 다시 라스베가스를 거쳐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와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을 구경하고 그랜드캐년(Grand Canyon)으로 내려와 노스림(North Rim)에서 노새를 타보기도 하고 다시 빙 돌아 싸우스림(South Rim)에서 웅장한 그랜드캐년을 구경하고 라스베가스로 돌아와 차를 반납하고 비행기편으로 뉴저지로 돌아왔다. 그 지역은 내가 15년 전인 1981년 아리조나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에서 해외훈련을 받을 때 거의 다 가본 곳이었다. 나는 내가 해외훈련 때 가보았던 그곳을 내 가족들에게 보여준 셈이었다.

 

또 그 다음해는 안 가겠다는 아들은 집에 놔두고 딸만 데리고 셋이서 뉴저지에서부터 자동차를 몰아 플로리다로 가서 디즈니월드와 에콥센터 그리고 씨월드를 구경하였다. 동화 속 같이 꾸며진 디즈니월드, 그리고 그곳에서 밤에 펼쳐지는 불꽃쇼는 환상적이었고 딸에게는 잊지 못 할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마이애미를 거쳐 섬과 다리로 이어진 긴 길을 따라 키웨스트 끝까지 가 보았고 밑창의 유리바닥으로 바다 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배를 타 보았고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집을 구경했고 돌아오는 길에 케네디 우주센터 구경도 하였다. 그리고 스무 시간을 부지런히 차를 몰아 뉴저지로 돌아왔다. 내가 아직 사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기에 그런 강행군이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치 내가 이렇게 멋진 구경을 시켜주려고 너희들을 이 미국 땅에 데리고 왔다는 듯 그렇게 해마다 여름강행군 가족여행을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노릇, 아버지 노릇이라도 된다는 듯이...... 아이들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덮어놓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