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뉴욕사무소

72. 뉴욕사무소로 가다

Thomas Lee 2023. 3. 21. 08:28

인생의 길은 매순간 선택과 갈림길의 연속이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수없는 변화와 고비가 만들어져 가는가 보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갈까 말까, 할까 말까, 만날까 헤어질까, 지금 할까 나중에 할까, 이걸 택할까 저걸 택할까.... 헤아릴 수 없는 크고 작은 선택의 갈림길들....

 

81년 아리조나 팔로버디 원전건설현장에서 원자력건설요원 해외훈련을 받았던 나는 결국 해외사무소 주재원 근무의 꿈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 갈림길의 선택으로 나와 나의 가족의 삶과 길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그 후에 닥친 IMF 경제위기와 회사생활의 갈등, 거기에서 나는 또 회사를 떠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보다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겠지. 지금 돌아보면 후회스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어쩌랴? 그 어느 길, 그 어느 선택이 더 나은 길이었는지 누가 알랴? 그 길이 나의 선택이었는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섭리였는지 하나님만이 아시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하심 같이.

 

회사에서 뉴욕사무소 부장 공모가 있은 것은 94년 말쯤이었다. 나는 나의 직속상사인 이J 부처장님께 뉴욕사무소 근무에 지원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해’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신청서류를 준비하여 처장님의 허락을 받으려고 결재를 올렸는데 처장님이 싸인을 안 하신다고 비서가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신청서 접수마감 바로 전 날 밤 열시까지 처장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외출에서 돌아오신 처장님께 신청서류를 들이밀었고 또 처장님의 “마지못해” 싸인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어렵게 신청서류를 결재 받아 마감날에 인사처에 접수시켰고 다른 신청자 한 사람과의 경쟁심사에서 내가 선발되었다.

 

내가 뉴욕사무소로 가는 것으로 결정되자 인사처에서 나와 우리 가족의 출국과 비자업무를 위하여 계약된 여행사 직원을 붙여주었다. 그 여행사 직원은 말과 행동이 재빠르고 명쾌하고 똑 부러진 젊은 여자였는데 미국 대사관 비자신청과 한국정부의 출국심사에 필요한 모든 서류들을 가르쳐 주고 떼어오게 하고 챙겨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 문제가 생겼다. 고2 아들이 1995년에 만 18세가 되어 병역법에 따라 제1국민역으로 편입되기 때문에 출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서울에 남겨두고 나가든지 주재원 부임을 포기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준엄한 판사가 선고하는 것처럼 내게 또렷하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주무장관의 추천이 있기 전에는 아드님의 출국이 불가합니다. 출국을 포기하시든지 아드님을 두고 가시든지 해야 합니다.”

 

아들을 놔두고 세 가족만 뉴욕에 가서 3년 동안 살다 온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나는 회사의 도서실에 가서 법전을 빌려서 병역법, 시행령, 그리고 시행세칙을 찾아보았다. 병역법은 그 여자가 말한 대로 만 18세에 제1국민역에 편입되는 모든 남자는 해외여행이 불가하다고 되어 있었고 주무장관이 추천하는 경우에 한하여 출국이 허용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주무장관이 어느 장관을 이야기하는지, 어떤 경우에 추천을 해줄 수 있고 추천을 받아야 한다든지 하는 조건 같은 것은 없었다.

 

“주무장관이 어느 장관? 조건이 없다? 그렇다면 그냥 ‘장관이 추천합니다,’라고 쓰기만 하면 되겠네?” 하고 생각이 되어 나는 간단하게 추천서를 작성하였다.

“병무청장 귀하, 위 OOO은 금번 한국전력 뉴욕사무소로 부임하게 된 OOO의 자녀로 해당법령 조항에 의거, 해외여행을 추천하오니 허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산업자원부장관”

밑도 끝도 없는 이런 추천서를 작성한 다음 또 한전에서 산업자원부에 협조를 요청하는 간단한 공문서를 작성해서 결재를 받고 문서수발실에 가서 사장의 직인을 받아 가지고 과천 정부청사 산업자원부를 찾아갔다. 전력국의 한전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추천서에 장관의 직인을 받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장관의 결재를 받았다면서 장관 직인이 찍힌 추천서를 가지고 왔다. 그 추천서를 그 여행사 여직원에게 갖다 주었더니 입을 딱 벌리고 놀란다. 자기는 주무장관 추천서를 받아오는 사람도 처음 봤고 이런 식의 추천서도 처음 봤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아파트는 전세를 놓고 새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장롱이니 침대니 이런 덩치 큰 가구들은 모두 헐값으로 처분하였고 이삿짐을 싸서 대한통운 선박편으로 미국으로 부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안동으로 내려가 아버지와 어머니께 작별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우리가 미국으로 3년 동안 가게 된 것을 한 편으로는 서운해 하면서도 기뻐해 주셨다. 그러나 언어기억을 상실하신 아버지는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 하셨다.

“아버지, 저희들 미국에 갔다가 3년 뒤에 돌아와요.”아버지는 전혀 알아듣지도 못 하시면서 “오냐, 오냐, 그래, 그래”만 반복하셨다.

나와 아내와 아들과 딸, 이렇게 우리 넷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저희들 돌아와서 다시 뵐게요. 그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셔야 해요.”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2년 뒤, 1997년 봄 우리가 아직 뉴욕사무소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1995년 4월 1일 토요일, 서울에는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피던 그 봄날 우리는 뉴욕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오전 10시엔가 11시쯤 출발하였는데 뉴욕에 도착하니 4월 1일 같은 날 정오 무렵이었다. 우리 가족 넷이 이민 백 한 개씩을 끌고 입국심사대를 거쳐 나가니 뉴욕사무소 과장직원들이 밴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JFK공항을 떠나 뉴욕 킌즈를 지나고 다리를 두 개나 건너 뉴저지로 오는 길에서 보이는 나무들은 아직도 싹이 돋지 않아 앙상한 채였다. 뉴욕에 봄이 오는 것이 서울보다 두어 주일은 늦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죠지워싱턴브리지를 건너 뉴저지 포트리(Fort Lee)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부장이 새로 온다고 전임 부장과 과장들이 나와서 포트리의 큰 식당에서 환영식 겸하여 점심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가 살게 될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살 집은 포트리에 중국인이 소유한 이층집이었는데 아래층에는 주인이 살고 우리 가족은 2층에 살게 되었다. 미국영화에서 보던 멋있는 저택과는 너무나 달라 아들과 딸은 적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양동 우리집보다 훨씬 못 한 집에 살게 될 줄을 알았겠는가. 우리가 살게 될 이층에는 낡은 카펫이 깔린 넓은 거실과 방 세 개, 그리고 부엌과 화장실 두 개가 있었는데 출입문이나 유리창문들이 엉성하였고 방이나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어 퀭하였고 천장에는 전등조차 달려있지 않았다. 우리가 매달 지불해야 할 렌트비는 천오백 달러였고 이와는 별도로 전기, 가스, 수도요금은 입주자가 내야 한다고 했다.

 

몹시 피곤하고 잠이 쏟아졌지만 과장들과 고장부인들이 기본 살림살이를 구입해야 한다면서 우리를 데리고 몇 곳 마켓을 돌아다녔다. 전기밥솥과 냄비, 그릇, 수저, 주방도구들, 키가 큰 전등스탠드 네 개, 의자 네 개, 그리고 침대와 이불, 베개까지, 우선 먹고 잠자는데 필요한 기본 살림살이들을 장만해야 했다. 식탁이 없으면 라면박스 놓고 식사해야 한다면서 누가 쓰다가 두고 갔다는 식탁 하나를 갖고 왔다. 그렇게 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보내고 우리 가족은 녹초가 되어 미국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아들이 동편에 솟아오른 아침 해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우와, 해다, 해. 저거 좀 봐!”

서울에서는 스모그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붉고 선명한 아침해를 처음 본 것이었다.

 

당장 먹고 자는데 필요한 생필품 구입도 문제였지만 가장 시급한 것이 카운티(County, 우리나라의 구, 혹은 군에 해당)에 가서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소셜시큐리티(Social Security)번호를 받는 것과 차량국(DMV, Division of Motor Vehicle)에 가서 자동차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것, 그리고 은행계좌를 개설하는 것 같은 것들이었다. 과장 한 사람이 우리 가족을 싣고 카운티로 가서 B1 비자가 붙은 여권을 제출하고 소셜시큐리티 번호를 신청하였다. 그런데 나만 소셜시큐리티번호가 나오고 가족들의 소셜시큐리티 번호부여는 거절되었다. 담당공무원이 B1 비자를 받아 입국한 당사자만 소셜시큐리티번호가 필요하지 가족에게 왜 필요하냐면서 거절한 것이었다. 사무소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다시 가서 가족들에게도 학교 입학과 운전면허 취득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다시 신청하란다. 그래서 다음날 우리 가족은 카운티에 다시 가야 했다.

 

그렇게 소셜시큐리티 번호를 받아가지고 차량국으로 가서 운전면허시험을 치렀다. 운전면허시험을 위하여 따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14년 전 아리조나 피닉스에서 보았던 운전면허시험의 기억과 그 동안의 운전경험 덕분에 별 문제없이 합격하여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하자 뉴욕사무소에서 부장에게 제공되는 승용차 한 대를 리스해 주었다. 포트리의 한인은행이라고 알려진 팬아시아 은행에 가서 계좌도 개설하였다. 그리고 아들은 포트리 고등학교, 딸은 포트리 중학교에 넣었다. 학교에서 직원이 직접 집을 방문하여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공부를 할 수 있는 주거환경인지를 조사, 확인한 다음 입학허가가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우리 가족은 자리를 잡아갔다.

 

뉴욕사무소는 뉴욕이 아니라 뉴저지 잉글우드클립스(Englewood Cliffs) 타운, 9W 하이웨이 바로 곁에 자리 잡은 흰색 나지막한 빌딩 2층에 입주해 있었다. 집에서 자동차로 오 분 정도, 걸어서는 30분 정도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명칭이 뉴욕사무소라 하여 사무소를 굳이 사무실 렌트비도 비싸고 직원들 주거비도 비싼 뉴욕에 두는 것보다는 허드슨강 건너 뉴져지에 두는 것이 유리하다 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했다. 뉴욕사무소에는 소장 한 명, 부장은 사무직 부장 한 명과 기술직 부장인 나, 그리고 사무직 과장 여섯 일곱 명, 기술직 과장 여섯 일곱 명, 그리고 사무소 행정과 부수업무를 위하여 현지에서 채용한 현지채용직원이 남자직원 한 명, 여직원 세 명, 이렇게 네 사람이 있었고 또 한기(韓技, KOPEC)에서 파견된 두 사람의 부장이 더 있어 스물 두어 명 되었다. 그리고 별도로 커넥티컷주 CE공장에 나가있는 기술직 과장 한 명, 그리고 워싱턴DC의 INPO(원자력운영자협회?)에 파견된 부장 한 명이 뉴욕사무소 소속으로 되어 있었으니 모두 스물 대여섯 명인 셈이었다. 나의 전임부장은 나와 입사동기인 유S 부장이었는데 나의 정착과 업무인수를 위하여 두어 주 더 있다가 4월 하순에 가족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렇게 나는 뉴욕사무소 부장으로, 가족을 데리고 미국생활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