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9. 다시 본사로

Thomas Lee 2023. 3. 15. 19:49

동해안은 아름다웠다. 머나먼 교통오지에 서울에 가족을 두고 홀아비생활을 하긴 했지만 울진은 내가 30년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그러나 울진에 그리 오래 있지 못 하였다. 1년이 지나자 본사 원자력건설처에서 나를 또다시 콕 집어 본사로 발령을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운 동해, 죽변 바닷가, 그 동안 정들었던 직원들과 교회식구들을 뒤로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93년 겨울이었다.

 

나를 콕 집은 분은 전에 나의 상사 기술부장으로 영광 3,4호기 주기기를 담당하다가 승격하여 울진 3,4호기 담당역, Project Manager(PM)가 된 이J 씨, 나중에 한수원 사장이 되신 분이다. 나는 그 분을 보좌하고 울진 3,4호기 건설공사 전체를 총괄하는 공사운영3부장으로 발령 받았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울진 3,4호기 “새끼PM”이 된 것이었다. 당시 영광 3,4호기는 95년과 96년 준공을 목표로 건설막바지에 이르러 있었고, 울진 3,4호기는 영광 3,4호기의 복제설계 후속기로 이어서 건설되고 있었다.

 

울진 3,4호기 공사운영부장, 즉 새끼 PM은 PM을 보좌하고 담당 프로젝트인 울진 3,4호기 건설공사 전반을 챙기고 굴러가도록 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날마다 건설현장의 공사진행 상황을 챙기고, 주기기를 맡은 한국중공업, 플랜트종합설계를 수행하는 한기(주), 시공계약자인 동아건설, 원자로계통설계를 담당하는 원자력연구소 등 모든 참여업체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진행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한 주일에 한 번씩 이들 참여업체들의 PM들과 실무책임자들이 모여 진행하는 주간PM회의에 참석하여 공사진행 상황과 문제점을 보고받고 또 점검, 협의하고 챙기는 것이 나의 주요업무였다. 물론 상부로 공사현황을 종합하여 보고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국내 참여업체만을 관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 제너럴일렉트릭(GE), 싸전트앤런디(S&L) 같은 해외업체들의 수행업무 진행상황이나 문제점도 파악해야 했고, 오가는 문서들과 서신들, 보고서들도 챙겨보아야 했다. 또 울진 3,4호기에 관련된 한전내부의 여러 다른 부서들, 보조기기구매, 기계, 전기, 토목, 건축, 설계, 품질부서 등의 업무들도 파악하고 진행상황을 확인, 독려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울진 3,4호기와 관련하여 돌아가는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파악, 점검, 독려하는 역할이었다.

 

또다시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요일은 웬만한 긴급상황이 아니면 면제를 받아 전처럼 일요일까지 회사에 출근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회사의 업무가 복잡하고 많기는 했지만 건설현장 만큼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윗분들과의 관계나 직원들과의 관계도 좋았고 일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또 나는 다시 가족과 합쳐 자양동 아파트 우리집에서 가정생활을 꾸릴 수 있었고 교회 식구들도 다시 만나 재미있는 교회생활도 이어갈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다시 신우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퇴근시간이 지나면 잠깐 시간을 내어 삼성동 전철역에서 현대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신우회 찬양팀이 하는 노방전도에도 참여하였다. 나는 찬양팀에 끼여 노래를 부르고 한 페이지짜리 쪽 전도지를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우회 합창단에도 들어가 횃불회관에서 공연하는 데에도 끼었다. 어쩌면 30년 회사생활 중 가장 무난하고 순탄한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탄한 기간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94년 봄이나 여름쯤이었던가, 내가 본사로 올라와 그렇게 울진 3,4호기 공사운영부장을 맡은 지 반 년 쯤 지난 후 1년에 한 차례 개최하는 Project Review Meeting, PRM이라고 부르는 프로젝트 전체회의를 미국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국내와 미국의 모든 참여업체들을 모아놓고 건설공사의 전반적인 진행상황과 문제점들을 점검, 협의하는 회의였다. 회의장소는 미국 커넥티컷주에 있는 CE로 정해졌다. 한전에서는 PM과 나, 그리고 몇 사람의 간부들, 그리고 한국중공업, 한기(주), 동아건설, 원자력연구소 등 관련업체들에서 PM들과 실무책임자들이 미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CE는 물론 GE와 Sargent & Lundy사 등 참여업체들의 실무책임자들이 참석하여 참석인원이 100여명이 넘는 대규모 회의였다. 나에게는 1982년 아리조나 팔로버디 원전건설현장에서 건설요원 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실로 12년 만에 다시 미국 땅을 밟는 셈이었다. 그 때 미국 동부에는 와보지 못 하였기 때문에 뉴욕공항이나 동부지역은 내게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를 거쳐 열여섯 시간인가 걸린 비행기 여행 끝에 JFK공항에 내린 우리 한국 회의팀 일행은 CE가 마련한 버스 편으로 세 시간 가량 고속도로를 달려 커넥티컷주 하트포트 북쪽, 윈져(Windsor)라고 부르는 곳에 자리 잡은 CE 본사 인근의 어느 호텔에 도착하여 가방을 풀었다. 미국 동부의 풍경은 서부의 풍경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호텔의 창문을 열고 높은 산도 안 보이고 평평하게 펼쳐진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이튿날 아침부터 CE 본사 회의실에서 사흘 동안 PRM 회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각 업체들의 참석자 소개가 이어졌고 그런 다음 공정계획과 공정실적 보고 프레젠테이션이 있었고 이어서 각 업체들이 순서에 따라 업무진행상황과 문제점, 애로사항 같은 공사진척상황을 보고하였다. 회의를 진행하는 사회 및 진행자는 나였다. 나는 짧은 영어로 버벅거려 가면서도 그런대로 열심히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한전 뉴욕사무소에서도 부장과 과장 한 사람이 회의에 업저버로 참석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점심시간에는 CE가 준비한 햄버거와 과일, 빵 같은 것이 제공되었고 하루 회의를 마치고 나서는 각 업체들이 순서를 맡아 돌아가면서 인근식당에서 저녁만찬을 대접하였다. PRM 회의는 모든 참여업체들이 모여 공사진행상황을 점검하고 협의하고 문제점을 해결하자는 목적과 기능도 있었지만 모처럼 전체가 모여 얼굴을 마주 하고 화합을 도모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데도 의의가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12년만의 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 짧은 미국여행은 나에게 12년 전 아리조나 팔로버디 원전 건설현장에서 해외훈련을 받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고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을 때 윗분이 나더러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라고 한 제안을 사양했던 일도 아쉬움과 함께 기억났다. 당시 한전은 해외사무소 근무기간을 3년으로 정해놓고 해외주재원을 주기적으로 선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욕사무소에 나가있는 나의 입사동기 유 부장이 다음해면 3년이 되어 귀국하게 되고 후임자가 선발될 터였다. 이제 시간이 더 지나고 우리 아이들이 더 커버리면 가족을 데리고 해외주재원으로 나갈 기회도 영 사라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병들어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이 큰 불효이겠지만 만일 아버지께서도 정신이 있으시다면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아니 기뻐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얼마 후 회사에서 치러지는 TOEIC 영어시험에 응시하였다. 썩 좋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무난한 점수를 얻었다. 가족을 데리고 해외에 나가서 생활해보고 싶다는 그 생각이 나의 앞길을, 우리 가족의 미래를 통째로 바꾸어버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 때는 알지 못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