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7. 머나먼 울진원자력

Thomas Lee 2023. 3. 12. 06:06

1992년 내가 부장으로 승진한 그 해에 우리 가족은 자양동 주택조합이 건축한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입주한 강변아파트는 잠실대교 바로 옆 강변에 자리 잡은 12층짜리 두 동, 모두 25평형 국민주택 사이즈로 200 세대 쯤 되었는데 우리 집은 뒷동 11층, 1104호였다. 앞동에 절반 쯤 가려졌지만 그래도 오른편으로 한강과 잠실운동장과 영동대교 쪽으로 좀 트여져 있어 제법 시원한 조망과 근사한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조그만 방이지만 방도 3개 있었고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있었다. 아파트 입주 때 잔금은 고덕동 아파트를 판 돈으로 충당이 되었고 좀 남은 돈으로 가죽소파와 침대를 구입하여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 나와 아내는 교회 식구들을 불러다 저녁대접을 하고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곧 중학교에 들어가게 될 딸은 가까운 성자국민학교로 전학시켰고 아들은 전에 다니던 청담동 영동고등학교에 그냥 다니도록 했다. 머지않아 대학에 가야할 아들을 강북 자양동 변두리(?)학교로 전학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서였다. 아침마다 나는 잠실대교를 지나 삼성동 회사로 출근하면서 아들을 함께 태우고 가서 회사 앞 영동대로에 내려주면 아들은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잠실을 지나 삼성동으로 들어가는 탄천 다리에서 어떤 차가 우리 차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그 차의 운전자가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아니, 세우는 척 하다가 잽싸게 도망을 갔다. 그 놈을 따라가 잡을 수도 없고, 차번호도 미처 외우지도 못 했다. 나중에 보니 운전석 문짝이 움푹 지끄러져 있었다. 퇴근한 다음 나는 드라이버로 문짝 안쪽의 볼트를 풀어 약간 벌린 다음 손을 집어넣어 망치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툭툭’ 쳤다. 그랬더니 아뿔싸, 문짝철판이 펴지긴 했지만 바깥쪽으로 망치자국이 뾰족뾰족 솟아올라왔다.

“아니, 무슨 철판이 이 모양이야?”

철판이 아니라 얇은 함석판 같았다. 아니, 마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런 차를 타고 다닌단 말이지?”

그러고 나니 운전석에 앉기만 하면 차체와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아무것도 나를 보호해주는 것 없는 썰매 위에 덩그러니 앉는 기분이 되었다.

 

1981년 무렵 문제가 된 현대양행의 IBRD차관 사기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신군부정권은 현대 정주영 회장과 대우 김우중 회장을 불러놓고 ‘자동차를 할래, 발전설비를 할래?’ 하는 빅딜을 시도한 바 있고 발전설비를 택한 대우가 2천억 원 지원을 요청하는 바람에 대우의 발전설비는 취소되고 한국중공업이 국영기업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자동차는 그대로 정주영씨의 현대가 맡게 되었던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 그 뒤로 한국의 승용차는 현대가 독점하였고 현대는 포니 승용차를 거쳐 80년대 중반에 포니엑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1986년에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에서 현대건설 직원이 쓰던 포니엑셀 중고차를 200만원에 인수하여 6년을 탔다.

 

그랬다. 전국 차량대수가 겨우 100만대를 넘긴 1988년도에 대한민국의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1만 명을 넘어섰다. 자동차 100대당 1명이 사망하는 세계최악의 교통사고 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일만 명이 넘는 연간 사망자수는 2000년까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2022년인 지금도 5천명 수준을 오르내리고 있다. 1980년대 그 시절에도 아직 전국 대부분의 국도는 신작로에 아스팔트 포장을 한 수준이라 길 양편에는 미루나무 가로수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승용차가 가로수에 충돌하기만 하면 탑승자 전원 사망 내지 중상을 피할 수 없었다. 국산차와 외제차가 충돌하면 외제차는 멀쩡한데 국산차는 대파되고 외제차를 탔던 사람들이 국산차에 탔던 사망자와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갔더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현대자동차는 승용차를 독점하면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포니엑셀은 고장력 강판으로 제작하였고 내수용 자동차는 허접한 일반 압연강판으로 제작하였다. 1986년엔가 최초로 미국에 수출된 포니엑셀은 4,999 달러의 헐값에 팔렸고 현대자동차는 국내에서 내수용 포니엑셀을 훨씬 비싸게 팔아서 수출로 본 손해를 만회하였다.

 

정주영 회장이 국회에서 그렇게 답변하였다고 들었다. “내수용 승용차가 일반 압연강판으로 제작되어 위험하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충돌할 때 부드러운 철판이 충격흡수효과가 더 좋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 정주영 회장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현대자동차를 키워줬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현대자동차를 사고 싶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 위에 세워진 회사 같아서다. 그런 회사가 해마다 파업을 하고 귀족노조가 되어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아무튼 1992년 그 해에 거금 800만원인가를 주고 자동변속기를 갖춘 대우 에스페로를 새로 구입했다. 브레이크가 밀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현대차를 안 사겠다고 생각하니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6년에 2년 된 중고차로 사서 6년이나 타고 다녀 거의 폐차수준으로 낡은 포니엑셀은 30만원인가를 받고 정비공장에 넘겨주었다.

 

설비제도개선반이 끝나고 얼마 후 나는 울진원자력본부 건설소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 정식으로 부장이 된 셈이었다. 가족을 서울에 둔 채 혼자 울진원자력본부로 부임한 나는 울진 3,4호기를 건설하는 건설소 공정관리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그리고 북면 언덕 위에 자리잡은 한전사택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부장 나이쯤 되면 예외 없이 거의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홀아비 생활을 하였는데 미리 자리 잡은 부장들은 프랑스 프라마톰 직원들이 사용하던 번듯한 아파트에 혼자 입주해 살고 있었지만 나는 25평짜리 일반 직원아파트를 배정받았다. 25평이면 어떠랴, 어차피 혼자 살기엔 너무 넓은 아파트 아닌가. 아파트는 바다 가까운 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밤이면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리고, 베란다로 나가면 바다를 비추는 달빛과 저 멀리 불을 환히 밝힌 오징어잡이배가 환상적인 밤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는 식권을 내면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까지 제공되었다. 아, 이런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여긴 관광지로구나, 아니 천국이로구나. 나의 부임을 환영한다고 소장님과 부소장님, 그리고 부장들이 죽변 어시장 식당에서 환영만찬을 열어주었다. 주 메뉴는 오징어 회였다. 갓 잡아와 잘라놓은 싱싱한 오징어 회에서는 향기와 함께 단맛이 느껴졌다. 그 후로도 오징어회를 먹으러 죽변 어시장에 가끔 갔었다.

 

나는 서울의 집에 갈 때나 안동으로 갈 때는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죽변의 침례교회에 출석하기로 하였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초신자나 다름없는 나를, 격주에 한 번밖에 출석 못 하니 못 한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성가대원으로 앉히고 또 청년부 지도교사를 맡겼다. 크리스마스 때가 다가오자 성가대는 유명한 바하의 곡 “할렐루야”를 연습하였다. 나도 베이스 파트에 끼여서 입을 벙긋거렸다. 그래도 아, 할렐루야 합창은 너무 멋지고 너무 감동적이었다. 성탄절 전야에는 청년부 대원들과 함께 새벽송을 나갔다. 무척 추웠지만 죽변읍내 이곳저곳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거룩한 밤 고요한 밤’을 고요하지 않게(?) 부르고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 새벽송을 난 난생 처음 해보았다. 나는 울진원자력 신우회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한 번은 신우회 회원들을 따라 죽변 뒤편 어느 마을에 전도 겸 구제활동을 하러 갔었는데 그 곳에서 나는 허물어져가는 낡은 집에서 짐승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왜정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정신병을 얻어 돌아왔다든가 했는데 끔찍했다.

 

어쨌든 나는 울진 3,4호기 건설 공정관리부장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현장 시공계약자는 현대건설이 아니라 동아건설이었다. 건설공사는 그럭저럭 진척되고 있었지만 1992년부터 노태우 정부가 추진하는 주택 이백만 호 건설 정책으로 인하여 노무자들이 분당, 일산 아파트단지로 몰려가는 바람에 동아건설은 작업인력 조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작업인력의 임금이 몇 배나 올랐는데도 큰 배후도시가 없는 탓에 인력조달 자체가 어려웠다. 동아건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러 대의 소형버스와 봉고차를 부구, 울진으로 보내 작업인력들을 실어 날랐고 동해, 삼척까지도 가서 데려 온다고 했다. 아무 기술 없는 초짜도 망치만 들고 오면 일당 사만원, 오만원을 준다고도 했다. 한전에서 건설공사감독을 맡은 부서들은 기계부, 전기부, 토목, 건축부 같은 부서들이었지만 현지상황이 그런지라 공정관리를 맡은 나로서는 인력부족으로 인한 공사지연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공정관리부에는 과장이 세 명에다 직원들이 이십여 명이나 있었다. 소장님이 진취적인 분이시라 가끔 사기진작, 화목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를 열었다. 사진 컨테스트도 하고 부별 가족합창대회도 했다. 나는 사진 컨테스트에 내가 찍은 건설현장 사진을 출품하였다. 또 부별 가족합창대회를 할 때는 직원들과 가족을 나의 사택아파트에 모아놓고 연습을 시켰는데 거의 모두가 음악엔 맹탕이었다. 다른 부서에서는 피아노 치는 엄마도 있고 첼로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자녀들도 있었는데 우리 부에는 그런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지휘 겸 하모니카 반주를 했다. 서유석이 부른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곡으로 했는데 아무리 연습을 시켜도 화음을 맡은 파트가 자꾸만 멜로디를 따라가는 바람에 도무지 화음을 제대로 만들어내지를 못 하였다. 할 수 없이 내가 하모니카로 화음을 담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연습하고서 대회날, 직원들과 가족을 합하여 삼십여 명을 세워놓고 나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지휘까지 했다. 심사는 인근학교에서 모셔온 음악 선생님들이 맡았는데 우리 부는 4등을 했다. 악기다운 악기도 없이 음악맹탕 직원들과 가족들이 만들어낸 것 치고는 준수한 성적이었다.

 

한 번은 직원들과 함께 응봉산으로 토요일 오후 산행을 갔다.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을 까먹고 어찌어찌 응봉산 정상까지 오르긴 했는데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해가 지고 말았다. 금방 어두워졌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벼랑길이 이어지는 험한 산길을 내려오는 것은 정말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우리는 앞사람의 허리춤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누군가가 조그만 신당을 만들어놓고 치성을 드리는지 그 안에 양초가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우리는 그 양초를 종이로 둘둘 말아 불을 붙였다. 환한 횃불이 되었다. 우리는 그 양초횃불에 의지하여 덕구온천까지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깜깜한 밤 그 위험한 산길에 이십 여명이 사고도 없이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내려온 것은 기적이었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여러분은 산에 갈 때 반드시 플래시라이트를 챙기시라. 아니다, 지금은 셀폰에 전등기능이 있으니 그럴 필요 없겠다.

 

지금 생각해도 울진은 참 좋은 곳이었다. 밤이면 언제나 바다 위의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이 비치었고 산과 골짜기들이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싱싱한 해물과 생선회를 즐길 수 있었고, 유명한 성류굴이 있었고, 덕구온천이 있었다. 가끔 덕구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순두부집에 들러 순두부 아침식사를 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건설현장에서 매주말마다 서울의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다들 홀아비 생활을 하는 터라 자연스럽게 격주에 한 번씩 가는 게 불문율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격주에 한 번을 다시 나누어서 서울의 집에도 가야 하고 또 병 든 아버지가 계신 안동에도 가야 했다. 결국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울에,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안동에 가게 되었다. 서울로 가는 길은, 또 울진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에스페로 승용차를 몰고 동해안 국도를 따라 삼척, 동해를 지나 강릉으로 간 다음 대관령을 굽이굽이 넘었다. 대관령 꼭대기 휴게소가 서울-울진 중간지점 쯤 되었다. 거기에서 국도로 원주에 이르면 거기서부터는 고속도로였다. 아직 영동고속도로가 완성되기 전이었다. 꼬박 여덟 시간 넘게 걸리는 머나먼 길이었다. 어두운 국도를 달리는데 경찰에 잡혔다. 50킬로미터 제한속도를 넘겼다는 것이었다. 좀 봐 달라고 했더니 벌금 만원이 넘는 속도위반 티켓 대신 이천원짜리 음주고성방가 티켓을 끊어주었다.

 

다른 길로도 다녀보았다. 태백산맥 높은 산길을 넘어 태백으로 가서 영월을 거쳐 원주, 박달재를 넘어 충주, 거기에서 장호원, 이천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 길로 서울을 가는 도중에 영월화력에 들러 보았다. 구화력은 동강대홍수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복합화력이 서 있었지만 거의 25년 전 내가 일하던 영월 신화력은 옛모습 그대로였고 석탄미분기도 그 때처럼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또 다른 길은 울진으로 내려간 다음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불영계곡을 지나 영주, 죽령을 넘고 단양을 지난 다음 충주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 코스를 택하든 여덟 시간 넘게 걸리는 건 큰 차이가 없었다.

 

안동으로 가는 길도 그랬다. 지도를 보면 울진이나 안동이나 모두 경북 북부지방이라 금방 닿을 것 같은데 구불구불 험악한 불영계곡을 통과하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고 그렇게 봉화를 거쳐 안동까지 가는 데 네 시간 가량 걸렸다. 나는 에스페로 승용차를 몰아 그 길을 자동차 경주를 하듯 빙글빙글 커브길을 달리는 데 달인이 되어 갔다. 60년대 후반, 불영계곡에 그 도로를 만든 것은 육군 공병대였다고 한다. 폭약으로 바위를 터뜨리고 벼랑길을 깎아 도로를 만드는 그 험악한 난공사에 수십 명의 국군장병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가본 적 없지만 지금은 그 험악한 도로 위로 높다란 교각이 세워지고 그 위로 미끈한 새 도로가 생겨났다.

 

울진...., 참 아름다운 곳이지만 참 머나먼 오지였다. 또 지금 생각해 보면 한 해에 1만 명 이상, 매일같이 전국 어디에선가 하루에 30여 명씩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던 그 시절에 브레이크도 시원찮은 에스페로 승용차로 그 먼 길을 오가면서 사고 한 번 당하지 않고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