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6. 과장 12년 만의 부장승진

Thomas Lee 2023. 3. 10. 22:24

1992년, 어느덧 내 나이도 마흔 두 살이 되었다. 원자력 초창기에 원자력에 자리 잡은 선배님들은 30대에 과장, 부장을 거쳐 처장의 자리에까지 초스피드로 승진하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그 분들 보다 5년, 10년 늦게 태어나 늦게 입사한 죄로 앞을 꽉 채운 똥차(?)들에 가로막혀 도무지 승진이 되지를 않았다.

 

회사는 역시 공돌이 기술직 보다는 펜대 사무직이어야 했다. 사무직은 그래도 승진이 좀 되었다. 회사의 전체 인원수는 기술직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상위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사무직 자리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기술직, 특히 원자력에서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헤쳐 나가고 자신의 기술과 능력으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만이 최선이었고 그래서 승진을 위하여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잘 보이려는 게 거의 없었다. 아니 더러 있기는 있었다. 열심히 밭 갈아 준 친구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래봐야 워낙 승진의 문턱이 높아 별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무직은 다른 것 같았다. 사무직에서는 승진의 기회가 많은 만큼 경쟁도 치열하였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들도 대단하였다. 내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가 있던 자곡동은 서울 강남이지만 아직 논밭이 있는 시골 골짜기였고 산자락에는 꽤 고급스러운 주택을 포함하여 100 여 호의 가옥이 있었는데 그곳에 조(趙) 부사장님 댁도 있었다, 그런데 한전직원들이 얼마나 들락거리는지 그 집 대문 앞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내다버리는 케이크 상자들이 언제나 수북이 쌓여있다고 우리교회 성도들이 말했다.

 

그랬다. 회사는 역시 사무관리직이었다. 사무직들이 본격적으로 회사를 주무르기 시작한 것은 박정기 사장님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업홍보니 CIP사업이니 하면서 홍보부서가 생겨났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원전반대 시위, 그리고 보상요구로 들끓는 원자력건설현장에서 대민업무를 수행하려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사무능력 부족한 기술직 사업소장만으로는 안 되고 사무직 행정실장이 필요하다 하여 행정실(行政室)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점차 확대되어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 배전사업소들에도 행정실이 생겨나고 부속부서들이 생겨났다. 많은 사무직 간부자리가 생겨난 것은 물론이다.

 

또 회사규정들과 절차들이 대폭 제, 개정되어 이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사규집이 발간되었다. 실무부서의 업무는 점차 사무, 관리부서의 통제와 관리에 들어가 장악되었다. 본사에는 관리본부가 생겨났고 경영정보부서들이 또 생겨났다. 21세기 정보시대를 맞이하여 전 세계 에너지와 전력산업계의 흐름과 동향을 파악하고 경영정보를 수집하여 경영에 활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한국전력의 미래에 대비하고 에너지산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경영정보라는 책자가 매달 발간되었고 그 책자에는 미국의 어떤 전력회사가 어떻게 하고 있다느니, 프랑스의 전력회사가 무슨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느니 하는 그런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 정보들은 해외의 잡지와 신문들에서 베껴온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때까지 해외업체 제작독려를 위하여 기술직 간부들이 나가있던 뉴욕사무소, 터론토 사무소, 파리사무소 같은 해외사무소에는 기술직만 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여 사무직이 추가로 파견되었고 해외경영정보 수집을 위하여 또 사무직 과장들이 또 대거 파견되었다. 자연스레 사무소장도 기술직에서 사무직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경시, 공돌이 멸시 같은 사회풍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술직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좁은 생각과 조금만 생각하고 공부하면 될 법규와 규정과 절차, 그리고 사무업무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외면이 기술직들이 사무직에게 장악되어 마침내 사무직은 군림하고 통제하는 관리직이 되고 기술직은 일만 하는 미천한 머슴직이 되는 사내풍토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였다고 생각된다. 한국전력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한 가지의 신분 프레임에 넣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회풍조는 나라 전체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러한 틀을 거부하였다. 나는 그들이 갖지 못 한 기술경험과 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무엇이 꿀리겠는가. 기술직인 내가 사무규정이나 법률적 지식까지 갖춘 것을 보고 그들은 더러 내게 그랬다. “이 과장님은 기술직 같지가 않습니다.”

 

또 변화 중 한 가지, 부서들마다 하는 중요한 업무가 보고서 만드는 일이 되었다. N-5200이라는 워드프로세서와 ‘아래아’ 한글 소프트웨어, 그리고 프린터가 각 부서마다 보급되어 손으로 쓰거나 타자기로 만들던 문서들이 멋진 워드프로세서와 프린터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전에는 애써 작성한 서류와 그 수고를 존중하는 마음이라도 있었지만 워드 프로세서가 보급되자 문서의 어구 하나, 문장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정, 재작성을 수없이 반복하는 경우가 다반사가 되었다. 보고서를 잘 만들어 위로 올리기 위하여 부서들마다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워가며 문구를 고치고 문서 모양을 다듬었다. 그러나 보고서는 아무래도 사무직이 더 잘 만들었고 보고위주의 업무의 길목에는 사무직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때라 1992년 그 해에도 사무직에서는 꽤 많은 승진이 이루어졌지만 기술직, 특히 원자력 직군에서는 승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내가 영광 1,2호기 건설현장에서 그렇게 일하고 또 본사 영광 3,4호기 부서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것도 승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어쩌다 되는 승진도 대개 고참순, 연공서열이었고 내 앞에 나 보다 더 오래 된 고참 과장들이 많았던 터라 나는 승진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기도하고 꿈을 꾸었다면서 내게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믿지 않았지만 정말 내가 부장으로 승진되었다. 그것도 원자력직군에서 단 한 명으로 말이다. 나는 그 때의 전통대로 처장님과 부처장님들, 그리고 선배 부장님들을 고급레스토랑인지 큰 술집인지 모를 업소에 모셔서 축하 및 신고식을 하였다. 그리고 평생 처음 아내와 함께 처장님 댁에 달랑달랑 케이크 하나를 사들고 가서 인사를 드렸다.

 

나의 승진을 놓고 이런 저런 뒷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 나의 일하는 것을 보아온 윗분들이 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한전생활 30년 동안 업무 때문에 윗분에게 꾸지람을 들어보거나 퇴짜를 맞아본 적이 없다. 그 유명한 심 전무님에게 혼나보지 않은 과장, 부장들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분에게 혼나본 적이 없다. 아니다. 나도 윗분에게 혼 난 적이 있었다. 기술 1부에 과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부장이던 이JJ 부장님이 승진한 다음 후임으로 오신 조(趙) 부장님에게서였다. 업무 때문이 아니라 결재서류 작성 때문이었다. 이 분은 올라가는 결재서류마다 시비를 걸었다. 일단 서류에 빨간 줄부터 좌악 긋고 나서 시작했다.

“결재서류는 이렇게 작성하면 안 됩니다. 결재서류에는 품질에 관한 사항과 유자격 사항이 체계적으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러고는 문구를 이리저리 뜯어고쳤다. 여태 문장이나 문구를 가지고 시비를 당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분은 내가 올린 결재서류의 문구를 이리저리 분해하여 모조리 고쳐놓았다. 이번에는 그 고쳐놓은 문구가 내 마음에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윗분의 마음에 들어야지 내 맘에 들면 뭣하나, 결재서류를 다시 작성하여 결재를 올렸다. 그랬더니 또 다른 문구를 고쳐서 퇴짜를 놓았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번번이 이런 일을 당하자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당장 서류를 집어던져 버리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었다. “내가 당신 때문에 회사를 나가?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런 그 분이었지만 사람은 참 좋았다. 언제나 부드러운 언행으로 부하직원들을 대하였고 주말에는 과장들과 직원들과 함께 등산도 가고 양평의 산골짜기에 캠핑도 가고 한 번은 설악산 대청봉에도 함께 올랐다. 어느 날 아차산에 하이킹을 갔었는데 그 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단풍 든 가을날 이른 새벽 설악산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소청봉을 지나 대청봉에 이르고 다시 오색약수터로 내려온 열 두 시간 강행군 등산의 기억은 지금도 아름답게 남아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기술2부로 가서 보조기기를 담당하게 되어 그 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분의 그 특이한 결재서류 시비와 내가 받았던 심적고통은 잊히지 않는다.

 

아무튼 1992년, 나는 12년 만에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92년 5월쯤엔가 나는 사무, 발전, 송배전 등 회사의 다른 직군들에서 함께 승격한 신임부장들과 함께 공릉동 사원연수원에 한 주일인가 두 주일간 입소하여 소양교육인지 기초경영교육인지를 받았다. 무슨 경영기법인지 분석기법인지 하는 과목들도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 이런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해결될 것인지 분석하고 해법을 찾으라.” 뭐 이런 과제를 놓고 잠시 즉석토론을 하게 했다. 신임부장들이 나름대로 즉석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답을 내놓았다. 내 차례가 되어 나도 나름대로 즉석분석과 해법을 내놓았다. 교수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며 ‘이 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는 분석과 해법을 즉석에서 내놓습니까?“ 하였다. 교수가 가르치려는 것은 물고기 뼈 같은 그림을 그려가면서 문제점을 나열하고 분석한 다음 해결책을 찾아가는 일종의 분석기법이었는데 내가 직관적으로 미리 들여다본 것 같이 결론을 맞춰버리니 놀랐던 모양이었다.

 

회사의 경영에 기여할 수 있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분임토의와 발표과제도 주어졌다. 각 그룹별로 발표하도록 되었는데 우리 그룹에서는 모두들 나더러 준비하라고 내 등을 떼밀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서 발표자료를 만들어 발표하게 되었다. 발표시간에 그룹별 발표가 이어졌지만 부장들이라고 해도 한데 모아놓으면 군대나 혹은 예비군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여러 발표자들의 발표가 길게 이어지니 모두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표를 유심히 듣고 있는 부장들도 있었는데 연수원 교육 마지막날 회식자리에서 부장들 몇 사람이 내게 와서 술잔을 권하며 인사를 했다.

“이 부장님 같은 인재가 우리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수원 교육을 받고 돌아왔지만 원자력부서에는 여전히 빈자리가 없었다. 무보직 부장이 될 판이었다. 그런데 내자처에서 국산화 기자재에 대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하여 Task Force Team으로 설비제도개선반을 만들고 송배전, 원자력, 수화력 등 직군에서 부장들과 과장들을 차출하였다. 나는 졸지에 그리로 차출되었다. 설비제도개선반에 사실 원자력 직군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설비제도개선반이 겨냥한 것은 송배전설비였기 때문이었다. 송배전설비에는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설비나 부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국가의 국산화정책과 한전의 국산개발지원을 노리고 수많은 국내 중소업체들이 중구난방으로 외국기술을 도입하여 적당히 만든 다음 국산화 개발을 했다고 한전에 신고하여 국산개발품으로 인정받고 비싼 값으로 납품해온 행태를 근절하고 정리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업체들의 극렬한 반발로 설비제도개선반은 반 년 쯤의 활동 끝에 별 성과 없이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때 설비제도개선반의 리더인 실무부장이 내자처 구매부장이었던 김S라는 분이었는데 나 보다는 몇 살 위였다. 몇 달 함께 일하면서 팀원들이 친밀해지자 김 부장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특히 내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 부장님, 난 이제 쉬고 싶어요. 퇴직해서 아내와 함께 골프나 치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이젠 회사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러면서 한 번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 A 사장님의 이야기였다. 승진도 승진이었지만 사무직은 위로 올라갈수록 윗사람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아부가 필수였고 그 정점에 있는 사장님은 아랫것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과 다름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아랫것들은 항상 사장님의 심기를 살피고 사장님의 의전과 필요를 손발처럼, 입안의 혀처럼 알아서 맞춰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장님이 원하는 물품을 찾아서 조달하는 임무는 언제나 내자처 구매부장에게 떨어졌다고 했다.

 

한 번은 사장님의 생신이 다가오는데 사장님이 기뻐할 만 한 생일선물을 구해 오라는 특명이 떨어졌단다. 무슨 선물을 찾아온단 말인가? 막막한 그 특명을 받아 고민하다가 사장님이 말띠니까 말 조각품을 찾아보자 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영화 ‘벤허’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진 말 네 마리의 멋진 청동조각품을 찾았단다.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 말 청동조각품을 구입하여 드렸더니 사장님이 매우 흡족해 하셨단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김 부장은 이제 그런 일은 그만 하고 싶다고, 이젠 회사생활에 회의가 온다고, 그리고 너무 피곤하여 쉬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그러던 김 부장이 어느 날 한전부속병원인 한일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더니 간암판정을 받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말기라고 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김 부장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이것도 무슨 인연인지 하필이면 김 부장의 집은 자곡동 우리 교회 근방에 있었다. 김 부장은 한 동안 집에서 요양하면서 우리 교회에도 두어 번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한일병원에 입원하였다. 내가 한일병원에 병문안을 갔을 때 그의 온 몸은 팽팽하게 부어 있었고 손이며 발이며 얼굴이 물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가 있을까? 나는 그를 위하여 주님의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지만 그는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회사생활이 그런 것이었을까? 승진에 목매여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일까?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회사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 아직은 한창 나이인 40대에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간, 사장에게 바칠 말 네 마리 조각상을 구하던 이야기를 하던 김 부장의 모습과 그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