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5. 나를 찾아오신 주님

Thomas Lee 2023. 3. 9. 17:47

만주에서 고모님이 오시고,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것 말고도 내게 또 다른 큰 어려움이 닥쳤었는데 그것은 자양동주택조합에 가입하여 내 집 마련을 하려던 내게 1가구 2주택이라는 이유로 주택조합원 자격이 박탈된 사건이었다. 고덕동에 분양받은 18평 아파트에다 고향의 아버지께서 지은 집을 내 앞으로 등기를 해놓은 까닭이었다.

 

아내는 그 무렵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결혼하여 서울에 와서 살았는데 그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돌연 그만 두고 대전 침례신학대학을 마친 다음 자곡동에 조그만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잠시 교회에 나갔던 아내는 그 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다가 이제 친구가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으니 거기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 대한민국의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니 내가 어떻게 막겠나? 그렇지만 나 한테 교회 가자는 소리는 하지 말고 또 내 돈 교회에 갖다 주지는 마라.” 하고는 일요일마다 아내를 차에 태워 교회로 데려다 주었다.

 

교회는 자곡동 마을 주택가 골목길에 접한 한 집의 조그만 반지하 공간을 빌려 초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조그만 교회 앞 골목에다 차를 세워놓고 드러누워 라디오방송을 들으며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아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교회에 다녀볼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교회나 신앙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다른 세계였다.

 

전부터 나는 밤하늘별을 쳐다보면서 우주를 생각했고 과학잡지를 읽으면서 진화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 보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수백억 년 시간 속, 광활한 우주공간 속에 티끌 같은 지구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갈 허무한 인류라는 동물을 생각했었다. 끝없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절대자가 없다면 아무 의미 없이 소멸되어야 하는 존재일 것이요 그러므로 절대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종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종교란 죽음이 두려운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하고 스스로를 위안하려고, 아니 스스로를 속이려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했다. 전능자인지 주재자인지 몰라도 만일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백년도 살지 못 하고 죽는 불쌍한 인간들의 일생을 빼앗아 자기를 섬기라고 하는 잔인한 신이겠는가?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만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죄? 그래. 죄도 로맨스 같이 달콤한 죄라면 짓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죽어 신 앞에 선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하리라. 신이시여, 내가 신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다만 후회 없이 인간답게 살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이제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신이 뭐라고 하겠는가? 신은 틀림없이 자비롭고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을 거야.

 

또 그렇게 생각했다. 설혹 참종교가 있다 해도 이 세상 수많은 종교 중에 어느 종교가 진짜란 말인가? 참된 신은 누구란 말인가? 하나님인가, 부처인가, 알라인가? 아니면 힌두교의 시바신인가? 그래. 어떤 신을 믿더라도, 어떤 종교를 가지더라도 사랑과 믿음으로 신실하게 착하게 살면 그게 신의 뜻이 아니겠는가? 신이 지구 여기저기 인간들에게 이런 모습, 저런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 기독교, 천주교, 불교, 힌두교 같은 세계 4대 종교 아니겠는가? 그것은 마치 큰 산과 같아서 어느 길로 오르든지, 어느 종교로 오르든지 선량하고 진실하게 꼭대기에 다다르면 다 같은 것일 게야. 그래. 나를 속박하는 종교는 갖지 말자. 종교는 나이가 들면, 죽음이 임박하면 그 때 필요한 거야. 내가 늙으면 그 때 종교를 가지긴 해야겠지. 그런데 어느 종교가 좋을까? 기독교는 어쩐지 천박한 것 같고, 천주교는 일생 결혼도 않고 거룩하게 사는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을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고, 그런데 그 보다도 더 깊고 심오한 깨달음은 불교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는 교회에 나가더라도 나는 불교에 대하여 좀 알아보기로 하고 회사의 직원들이 모이는 반야회라는 불교모임에 나가보았다. 반야회에서는 매주 스님을 모셔와 설법을 들었는데 설법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불도(佛道)란 일평생 공부해도 다 깨닫지 못 하는 심오한 경지이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일반인이나 범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몇 반야회원들이 나에게 며칠 코스로 절에 함께 가서 수련을 하자고 권유하기도 하였고 몇 회원들은 수계인지 뭔지를 받았다면서 팔뚝에 불탄 심지로 생긴 흔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혼불’이라는 책을 사다 내게 선물하고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좋다면서 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혼불’이라는 책을 앞머리만 조금 읽다가 덮어버렸고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도 보지 않았다. 나는 불교에 깊이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한 편 주택조합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스무 명 가량 되는 무자격자들이 조합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아파트 건설허가가 안 나온다면서 난리를 했다. 나는 건설부에 전화로 항의도 해보고 다른 방법도 찾아보았지만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합에서는 나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요구해 왔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데다 주택조합까지 이렇게 되고 보니 인생의 폭풍우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것 같았다. 생각다 못 한 나는 아내에게 아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에게 조합원 명의를 빌려달라고 부탁해 보라고 시켰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선선히 허락해 주셨단다. 나는 그렇게 편법으로 자양동 주택조합의 아파트를 목사님 이름으로 분양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무척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나 신앙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나는 교회에 몇 가지 사무기기를 사드리는 것으로 답례를 하고 여전히 일요일에 아내를 태워다 주고 밖에서 기다리기를 계속하였다.

 

그렇게 다시 몇 달이 다시 지났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 어느 날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한참 지나도 아내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 한 나는 문을 열고 교회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내의 친구인 사모님이 벽에다 색종이를 오려 붙여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나도 들어가 거들어 주었다. 그것이 내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건(?)이었다. 그렇게 교회에 발을 들여다 놓고 보니 나는 주일마다, 그리고 수요일마다 한다는 성경공부에서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나 궁금해졌다. 회사의 반야회에서 잠깐이지만 불교공부도 해봤으니 이제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공부에 참석하기로 했다. 목사님은 내가 성경공부에 참석하겠다니 무척 반가워하였다. 성경공부에 참석하니 목사님은 프린트로 만든 조그맣고 얇은 책자를 주셨다. 그렇게 나는 성도님들 틈에 끼여 앉아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성경공부 첫날 내가 들은 것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었다. 뭐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학교에서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이렇게 네 분이 4대성인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었다니!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니! 그것은 여태 마흔 살 되도록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전에 몇 몇 사람들이 내게 교회에 나가자거나 예수 믿으라고 권해온 적은 있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내게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성자(聖子) 하나님이라니! 그렇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종교가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참신이 인간에게 주신 종교가 아닌가.

 

나이 마흔이 넘을 때까지 나는 무엇을 배워왔던가? 학교에서 배우고, 발전소 교대근무를 하면서 다닌 대학에서 배운 게 무엇이었던가? 세상에서 직장에서 배운 것이 다 무엇이던가. 그것은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기술일 뿐이지 아니한가? 누가 우리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 죽음의 문제, 영혼의 문제, 생명의 문제를 가르쳐 주었던가? 이런 학문이 어디에 있었던가. 성경공부가 내게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접한 인생의 문제,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으로 다가왔다.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성경공부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주일예배에도 아내와 함께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 생명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아버지의 쓰러지심과 주택조합의 어려움 가운데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 같았다. 일과 스트레스에 파묻혀 이십년이나 피워오던 담배도 끊었다. 술도 입에 대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냐?“ 하고 집어던졌던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목사님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면서 성경은 묵독하지 말고 반드시 나지막하게라도 소리를 내어 읽어서 자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대로 나지막이 소리 내어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하루에 30분씩, 한 시간씩, 틈을 내어 읽어나갔다. 성경이 그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 하....... 나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에 이르러 목숨을 건 두 친구의 우정에 눈물을 흘렸다. 아, 내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성경 책장에 뚝뚝 떨어졌다. 그 날 밤 나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나의 구주가 되어 주시기를 구하며 기도하였다.

 

나는 회사에서 신우회가 한 주일에 한 번 여는 예배에도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에서나 회사 신우회에서나 모든 설교와 성경공부가 나의 생명과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것 같았다. 신우회 여직원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이 천사들의 노래같이 아름답게 들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회사 신우회 예배에서 “나의 등 뒤에서”를 들으며, 따라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다. 주님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시며 나를 돕고 계신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한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아시는 주님이 내 뒤에 서서 나의 등을, 나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 같았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고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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