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4. 슬픈 내 아버지

Thomas Lee 2023. 3. 8. 17:15

1988년 봄 서울 본사로 발령 받아 삼성동 AID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나는 그 해 열리는 올림픽 구경을 좀 하겠거니 내심 기대하였지만 밤늦게 퇴근하여 TV로 올림픽 뉴스나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회사일로 바빠 시간도 낼 수 없었지만 표를 구하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딱 한 번 아내와 두 아이를 올림픽경기장 수영장에 데리고 가서 수구 예선경기를 보았다. 88 올림픽은 그렇게 끝났다.

 

영광원자력에 있을 때는 안동이 그토록 멀었지만 서울로 오니 안동이 좀 가까워졌다. 그러나 200 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길이 막히지 않아도 다섯 시간은 족히 걸렸다. 서울에서 국도로 하남, 장호원, 이천, 충주, 수안보를 지나고 구불구불 이화령 고개를 넘고 다시 문경, 점촌, 예천을 지나 안동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추석이 다가왔다. 나는 회사에서 퇴근한 다음 서둘러 낡은 우리 자가용 포니엑셀에다 아내와 두 아이를 싣고 출발하였다. 강남 AID 아파트를 나서서 강변 올림픽도로로 올라갔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행렬은 끝이 없었고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굼벵이 속도로 기었다. 집을 나선지 두세 시간 넘게 지났는데 겨우 고덕동 중부고속도로 입구에 도착하였다. 차라리 걷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았다. 중부고속도로 쪽은 꽉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핸들을 꺾어 국도로 빠져 하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부고속도로로 가 봐야 얼마 못 가 이천 쯤에서 어차피 국도로 빠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남을 지나고 곤지암을 지나고 이천, 장호원을 지나고, 고개를 넘고 마을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고 밤이 깊어 충주 근방에 도착하였다. 도중 휴게소에서 용변을 보고 좀 쉬기는 했지만 나나 아내나 아이들이나 기진맥진하였다. 충주의 서편으로 빙 돌아 강을 따라 구부러진 길을 따라 수안보를 지나고 골짜기를 빙 돌아 구불구불 산비탈길로 이화령고개로 올라갔다. 높은 이화령고개가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였고 서울-안동 중간쯤 되었고 그 고개 꼭대기에는 넓은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었다. 나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전화카드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야야, 지금 어데 쯤 오고 있노?”

“예, 여 이화령 고개시더.”

“하이고, 서울 떠난다고 전화한 지가 언젠데 아직 고기빼이 몬 왔나?”

“예, 차가 하도 밀리가꼬 요기빼이 몬 왔니더. 인자 두 시간이면 도착 안 할니껴.”

“하이고, 아들은(아이들은) 개한나(괜찮나)? 고향 온다꼬 무신 고생이고?”

우리는 다시 이화령을 출발하여 내리막길을 빙글빙글 내려가서 문경을 지나고 점촌을 지나고 예천을 지나고 풍산을 지나고 안동에 도착하기까지 도합 여덟 시간, 아홉 시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안동을 오갈 갈 때 여러 경로를 시도해보았다. 중부고속도로로 음성까지 내려간 다음 수안보 쪽으로 가보기도 했고, 올림픽대로 대신 성남쪽으로 가보기도 하고 남한산성 고갯길을 넘어도 보았고, 퇴촌을 지나 남한강을 건너 양평을 거치고 박달재를 넘어 원주로 가서 다시 단양, 소백산 아래 죽령(竹嶺)을 넘어 영주를 거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길을 택하든 머나먼 길이었고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 정도는 걸렸다. 200 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고생스럽게 다녀야 했는지.... 지금은 사통팔달 도로가 잘 나있어 세 시간도 안 걸린다던데....

 

아무튼 명절 때가 되면 고향에서 손주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에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고향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끔은 안동에서 부모님을 뵙고 난 다음 다시 대구를 지나고 부산 처가에까지 내려가 장모님을 뵙고 처남들을 만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는데 이렇게 전국 남북종주를 하면 참 머나먼 여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명절 때 고향에서 기다리기만 하지 않으셨다. 이따금 서울로 올라오셔서 과자와 선물을 사들고 손주들을 보고 가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맏손자를 유독 좋아하셨다.

 

앞에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아버지는 척박한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 새알산 아래 옛터골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라셨고 이십리길을 걸어 파천면 소학교를 다니셨고 일본군에 징집당하여 복무하던 중 소속부대가 남태평양으로 차출되어 갈 때 이상한 꿈을 꾸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바람에 전염병 환자로 오인되어 남으셨고, 그 부대를 싣고 가던 군함이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되어 부대원 전원이 수장되었고 아버지만 홀로 살아남으셨다.

 

아버지는 4남 1녀 중 차남이셨다. 위로 백부님, 아래로 여동생(고모님), 그리고 두 남동생(삼촌)이 있었다. 그 중 여동생, 곧 나의 고모님은 산너머 마을로 시집갔었는데 해방 전 만주 간도로 이주하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고, 그 아래 남동생은 6.25 전쟁통에 행방불명되었고, 나이어린 막내동생만 무사하였다. 그래서 아버지 오남매 중 삼형제만 남으셨다.

 

그런데 89년인가 90년이었던가......, 해방 전 만주로 간 다음 생사조차 알지 못 하던 고모님이 만주에서 고모부님과 또 고종사촌과 함께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6.25 전쟁 때 우리나라의 허리를 잘라놓은 적국, 죽의 장막으로 가려졌던 그 중공이 88서울 올림픽에 참가했고, 한국과 중공이 국교를 맺었고, 선박과 비행기가 오가기 시작했고, 중공에 살던 한인들이 조국 대한민국을 대거 방문하기 시작한 때였다. 아버지는 50년 만에 여동생을 다시 만난다는 기대에 밤잠을 설치며 고모님이 오는 날을 기다리셨다. 고모님 일행이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전날 아버지와 백부님, 사촌형님, 사촌동생들까지 삼성동 AID 아파트 비좁은 우리 집에 올라와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 김포공항으로 고모님 일행을 맞으러 나갔다.

 

도착승객 출구로부터 하나 둘 중국 동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국민복인지 인민복인지, 잿빛 옷을 입고 납작하고 검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우리는 출구에 눈을 고정하고 기다렸지만 고모님 일행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중국동포들이 거의 다 나온 끄트머리쯤에 드디어 고모님 일행이 커다란 짐꾸러미들을 끌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고모부님은 깡마르고 검은 얼굴을 하고 계셨고 고모님도 고생을 많이 한 모습이었고 역시 인민복과 납작한 검은 신발 차림이었다. 고종사촌은 나보다 키가 약간 더 컸는데 나를 보더니 달려와서 ‘형님’ 하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라고 하는데 나보다 훨씬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어쩐지 어색했다. 나를 알아본 것은 누가 미리 우리 사진을 보내준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고모님은 공항 대합실에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우셨다. 나는 고모님 일행과 또 환영단을 모두 회사 옆 청우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고모님과 고모부님, 그리고 아버지, 세 분만 우리 집으로 모시고 고종사촌은 사촌동생집으로 가도록 했다.

 

지난 5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고모님은 한숨을 섞어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하셨다. 이웃동네로 시집간 다음 만주로 떠나게 된 이야기, 만주에서 고모부님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남북이 갈라지고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고향에 오지도 못 하였다는 이야기, 문화혁명 때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를 하셨다. 만주가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남자들이 소변을 보면 소변이 떨어지는 모양 그대로 둥그렇게 얼어버리는데 그걸 막대기로 툭툭 친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하도 추워서 남자들은 독한 술을 많이 마신다고 했다. 과연 며칠 동안 우리집에 지내시면서 고모부님은 술을 많이 드셨는데 도수 높은 소주를 사다드려도 술이 너무 싱겁다고 하셨다. 독한 위스키와 보드카를 사다 드리니 그제야 조금 술 같다고 하셨다. 고모님은 오빠의 아들이 대견스러우셨던지 잠자는 나를 한참이나 쓰다듬고 계셨다.

 

고종사촌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준비를 많이 했다고 했다. 녹용인지 녹각인지를 몇 개나 고모님 허리춤에 숨겨왔고 산삼에다 호랑이 뼈로 담근 술인지 뭔지에다, 무슨 약재인지 고약인지, 별별 희한한 물건들을 잔뜩 담아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아주 한 몫을 단단히 잡으려고 벼른 것 같았다. 한국에 그런 물건들을 갖고 와서 팔아 이삼천만 원만 만들어 돌아가면 만주에서는 부자로 살 수 있다고 하였다. 고종사촌은 그 물건들을 팔아 달라고 우리 형제들과 사촌들에게 떠안겼다. 헤어져 생사도 알지 못 한 채 50년이나 지난, 죽었다가 살아온 것 같은 피붙이의 부탁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가. 녹용인지, 녹각과 산삼 같은 것들은 고종사촌이 직접 약재상에 가져다 판다고 했지만 다른 별 쓸데도 없는 자질구레한 약재들은 나와 형제들과 사촌들이 나누어서 맡아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종사촌을 낡은 내 승용차 포니엑셀에 태워가지고 서울구경을 시켜 주었다. 남산 타워에도 데리고 올라갔다. 그런 다음 고모님 일행은 고모부님 형제들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체류기간 한 달이 지난 다음 고모님 일행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편으로 출국하였다. 고종사촌이 얼마의 돈을 벌어서 갔는지는 모르지만 기대에 못 미쳤는지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사촌들로부터 한 이천만원은 넘게 들고 갔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고모님 일행이 만주로 돌아가고 난 다음 아버지에게 변화가 생겼다. 둘째 동생 가족이 고향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생활하였는데 아버지는 당신이 건강해야 만주에 고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다면서 이런저런 약과 건강식품을 드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또 중국에서 온 무슨 환약(丸藥)을 한 움큼씩 드신다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런 환약이나 건강식품이 아버지의 건강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아버지는 외출하셨다가 뇌졸중 스트로크로 쓰러지셨다. 친구분이 놀라서 구급차를 불러 아버지를 안동병원으로 급송하였지만 당시 의술로는 그저 혈액용해제를 투여하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안동으로 내려갔지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뇌를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은 왼편 두정엽 한 부분이 검게 죽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 부위가 언어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한 번 죽은 뇌세포는 다시 재생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언어기억 대부분을 상실하셨다. 아버지는 ‘집’이라는 단어도 잊어버리고 ‘학교’라는 단어만 사용하셨다. 모든 물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약’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셨다. 병원에서 며칠 동안 링거에 혈액용해제를 투여했지만 아무 차도가 없었다. 혈액용해제를 사흘 이상 사용하면 혈관이 파열될 수 있다면서 병원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래도 혹시나 방법이 있을까 하여 아버지를 차에 태워 서울로 모시고 올라와 쌍문동에 있는 한국전력 부속병원인 한일병원에도 가보고 경희대병원에도 가보았다. 영등포의 침술병원에도 가보고 멀리 전의에 있는 유명하다는 의원에게도 가보았고 영주의 한의원에도 가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언어기억을 상실하신 아버지는 당신에게 닥친 이 재앙을 인정하지 못 하시는 듯 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런 저런 말씀을 늘어놓으시고 의사 앞에서도 당신이 정상이시라는 듯이 보이려고 애를 쓰시는 듯 했다.

 

나는 뇌혈관의 혈류를 개선하면 혹시 증세가 호전될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모스쿠알렌인지 심해상어기름인지를 구입해서 드리기도 했는데 세모스쿠알렌은 무척 비싸서 조그만 병 하나에 이십만 원씩이나 되었다. 아버지가 앞이 잘 안 보이신다고 하여 한일병원 안과검사를 받고 백내장 수술을 해 드렸다. 병원에서는 각막 렌즈는 병원에서 제공하지 않으니 개별적으로 구입하라고 하였고 나는 병원에 진치고 있는 렌즈 판매상에게 거금 삼십 만원인가를 주고 손톱보다도 작은 각막렌즈를 사야만 했다.

 

언어기억을 잃어버리신 아버지는 차츰 다른 기억들과 사고능력도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자녀들의 이름도 잊어버리고 어머니나 아내를 못 알아보고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하셨다. 자신에게 화를 내시고 난폭해지시기도 하였다. 도저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예순아홉 살이 되셨지만 힘이 워낙 세서 아무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를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으셨고 그 분노를 억누르고 참으시는 듯 했다. 나는 서울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돌봐 드리려고 했지만 조그만 15평짜리 AID 아파트가 비좁기도 했고, 그 보다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 하시는 아버지가 자꾸만 집에 간다며 현관문을 열고 나가시는 바람에 아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다시 안동으로 모시고 내려가 동생 부부가 모시고 보살펴 드리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회사에서 윗분께서는 나에게 미국 커네티컷주 CE 사무소 파견근무를 제안하셨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뉴욕사무소 해외근무를, 그러나 나는 병드신 아버지를 놔두고 도망가는 것 같아 사양하였다.

 

나는 적어도 두어 주에 한 번씩은 주말에 안동으로 내려갔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씻겨드리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보지 못 했던 나는 아버지가 병들고 나서야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서 알몸을 씻겨 드릴 수 있었던 셈이다. 목욕시켜 드릴 때마다 느꼈지만 아버지는 참 피부도 희고 손목이나 발목이 나보다 굵으셨고 머리통도 동글동글 참 잘 생기셨다. 빈대떡같이 납작한 내 뒤통수나 도끼뿔같이 툭 튀어나온 내 동생 뒤통수와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알아보기는 하셨지만 아들의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점점 보폭이 좁아지며 어둔해져갔고 점차 모든 것을 체념해 가고 계셨다.

 

나의 주말 아버지 방문은 그 후 내가 승진하여 울진원자력에 가 있을 때나 다시 본사로 올라왔을 때나 나중에 뉴욕사무소로 갈 때까지 오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결국 발병 7년 후 눈을 감으셨고 그 때 뉴욕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임종을 지키지 못 하였다.

 

지금 같았으면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당시엔 병원에서조차 뇌혈관 치료기술이 없었고 그래서 김영삼의 오른팔이라던 최형우(?) 의원도 아버지와 똑같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치료를 위하여 중국으로 갔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왜 그렇게도 몰랐을까?

나나 내 동생들이나 어찌 그렇게 노인병과 뇌혈관질환에 무지하였을까?

뇌경색만 아니었더라면 건강하게 오래 사셨을 것이 틀림없었을 텐데.......

조금만 더 건강하게 사셨더라면 이 아들이 미국구경도 시켜 드렸을 텐데.....

 

국민학교 교편을 잡으시면서 안동군에서는 적수가 없었던 100미터, 1,500미터 선수,

일본서적으로 독학을 하여 의술을 익히시고 산골학교 양호교사와 무의촌 의사가 되어서 많은 생명을 구하셨던 아버지,

기억력이 워낙 뛰어나 의술은 물론 역사와 족보까지도 줄줄 외우셨던 아버지,

생활고 때문에 교사직을 내려놓고 약국을 경영하시며 다섯 남매를 키워내신 아버지,

남의 생명은 그렇게 많이 구하셨으면서 왜 정작 당신의 건강은 지키지 못 하셨는지......

아, 불쌍한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