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3. 군축교 참사

Thomas Lee 2022. 12. 26. 17:42

1969년 1월 23일, 우리는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기계과, 전기과, 화학과, 토목과, 건축과, 방직과, 자동차과, 이렇게 일곱 과 520여명이 졸업하는 졸업식은 우리 기계과 교실 앞에 있는 함석판으로 지붕만 씌워놓은 어설픈 강당에서 치러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대구로 내려오셔서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색종이 테이프를 어깨에 감아 주면서 축하해 주셨고 흑백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우리 기술전공부 졸업생 32명은 이날 저녁, 대구시내 서성로의 한 중국집에 모여 짜장면과 배갈로 졸업자축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홀어머니가 동인동 로타리에서 옷가게를 하시는 태석이네 집에 몰려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웃다가 울다가 부둥켜안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새웠다.

 

나를 포함하여 한전에 들어가게 된 다섯 놈은 행복한 놈들이었다. 유공에 들어가기로 된 태석이도 괜찮았다. 그러나 무림제지공장, 제일모직, 대구철공소, 그리고 서울의 삼양라면, 원진레이욘...... 일당 100원씩 쳐서 월 3,000원을 준다는 이런 회사들이 대부분의 우리반 아이들의 취직된 직장의 이름들이었다.

 

그나마 취업조차 안 된 녀석들도 있었다. 3년 전 입학할 때는 수석으로 입학하였으나 무슨 병인지 기운이 빠지고 몸이 바짝바짝 여위는 병에 시달리다가 취직은커녕 졸업도 겨우 하게 된 남기, 취업이 뜻대로 안 되어 낙제를 자청하여 고3을 한 해 더 다니게 된 도일이와 찬이, 이 녀석들이 우리를 또 서럽게 만들었다. 그랬다. 우리는 너무 서러웠다.

 

그러나 아무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를 부러워하는 소리를 하는 녀석은 없었다. 그저 막걸리잔을 권하며 지난 3년 동안 함께 공부한 급우들의 어깨를 끌어안고 노래만 불러댔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르다가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를 부르다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르다가 그렇게 밤을 새우며 우리 서른 두 명은 몸부림하듯이 3년 동안의 급우생활을 마치는 이별의 잔치를 치렀다.

 

생각해보면, 국가시책 공업입국에 발맞추어 신설된 ‘기술전공부’라는 특별반과 ‘국비대여 장학생’이라는 미명의 제도가 우리 부모들의 찌들은 가난과 합작하여 만들어낸 게 바로 땜쟁이 고등학교 졸업생인 우리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 다음 우리들은 거의 서로 만나지를 못 하였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5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어떤 친구들은 그 어려운 속에서도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동창생들은 그렇게 땜쟁이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철공소랑, 기계공장이랑, 제지공장, 방직공장 같은 곳에서 조국이 우리에게 맡긴 조국경제개발, 산업역군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자랑스러운(?) 선배 두 분이 계시니, 바로 전두환 선배와 노태우 선배이시다. 전두환 선배는 6.25 전쟁 무렵 우리 대구공고를 다니고 졸업하셨고 노태우 선배는 대구공고를 다니다가 사대부고로 전학한 다음 거기서 졸업하여 전두환 선배와 함께, 또 김복동씨와 함께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셨단다. 전두환 선배님이 24회이고 우리가 40회 졸업생이니 16년 까마득한 선배님들인 셈이다.

 

두 분이 왜 대구공고에 다니셨는지, 그 분들도 우리처럼 가난 때문에 공고를 택하였는지, 우리처럼 줄질, 톱질, 대패질 하고, 용접을 하고, 함석판 구부려 양동이 만들고 그랬는지, 선반, 밀링 돌리고 그랬는지, 혹은 6.25 전쟁통에 제대로 공부나 하셨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분들은 철공소나 방직공장에 취직하지는 않았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관학교에서 시험을 치렀단다.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미술가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단다. 우수생도였던 김복동씨가 ‘로뎅’이라고 정답을 써놓았는데 뒷자리의 노태우 생도가 컨닝을 했단다. 그런데 노태우 생도, “로뎅이 머꼬? 오뎅이겠지.” 하고 ‘오뎅’이라고 답을 써놓았단다. 그런데 그 뒤에 앉은 전두환 생도, “응? 오뎅이라고?” 그런데 똑같이 ‘오뎅’이라고 썼다간 커닝한 게 탄로 나겠지?” 머리를 굴려 쓴 답이 “덴뿌라”였단다. 하긴 우리도 그랬을지 모른다. 3년 동안 우리는 미술, 음악 같은 과목은 아예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 자랑스러운 전두환 선배님은 한국전력주식회사를 한국전력공사로 바꾸어버렸고 우리 퇴직금을 반 토막, 아니 반의 반 토막을 내 버렸다.

더욱 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는.... 1990년 11월 4일에 일어난 끔찍한 사고...

 

1969년 1월 23일 졸업식을 한 다음, 그렇게 동인로터리 태석이네 집에서 밤을 새워 울며 막걸리를 마시고 주절거리며 고등학교 졸업축하연(?)을 하고 헤어진 지 22년이 지난 1990년 11월 4일, 관광버스 한 대가 강원도 소양강 군축교에서 다리 아래로 곤두박질한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내가 서울 삼성동 한전본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 관광버스는 바로 대구공고 동창생들이 설악산을 관광하고 나서 당시 대통령에서 물러나 백담사로 쫓겨가 있던 전두환 선배를 뵙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고로 이제 나이 서른 아홉, 마흔 살 된 동창들과 그 아내들 모두 스물 세 명이나 떼죽음을 당하였고, 이 소식을 듣고 강남병원으로 달려온 우리들은 또 목 놓아 울어야 했다. 나는 그 날 강남병원에서 구로공단에서 달려온 노하, 근수, 성만이를 만났고 또 여러 동창생들을 만났다.

 

신문들마다 대문짝만하게 “군축교 교통참사” 보도를 한 1990년 11월 5일 밤, 우리들은 시신이 도착한다는 강남병원에 모여 죽은 동창들의 시신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밤 열 두 시가 가까워서 스무 대도 더 되는 앰블런스들이 파란 불빛을 번쩍이며 시신을 담은 관을 하나씩 싣고 강남병원으로 도착하였고, 태석이네 집에서 그렇게 헤어지고는 22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던 찬이도 시신이 되어 친구들에게로 돌아왔다. 찬이 옆자리에 탔던 찬이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것도 모르는 채, 척추뼈가 부서진 중상으로 온 몸을 붕대로 감은 전신마비의 몸을 병원에 눕히고 있었고, 아무도 남편의 죽음을 그녀에게 차마 알려주지 못 하였다.

 

병원에 줄지어 도착한 앰블런스들로부터 시신을 담은 관들을 내려 영안실 냉동실로 옮기며 우리는 죽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이 녀석들아, 전 두환이가 선배면 선배지, 백담사엘 말라꼬 찾아 갔드노?”

“야, 임마, 와 먼저 죽었노? 대답 좀 하그라, 이게 뭐고?”

 

강남병원의 영안실이 부족하다 하여 일부 시신들은 동부병원에 도착하였다. 우린 강남병원에서 동부병원으로 옮겨가서 그 밤을 동부병원 영안실에서 지새웠다. 거기서 우리는 또 소줏잔을 기울이며 우리 땜쟁이 고등학교 시절과, 그리고 우리의 힘들고 험악한 삶의 이야기와 이 처참한 사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죽은 한 친구는 천주교인이었던지 성당에서 조문 온 교우들이 죽은 자의 세례명을 부르며 그를 위하여 너무도 애절한 조가를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밤새도록 불렀다.

“주여, 인도하소서, 눈물 골짜기를 넘어 요단강 건너 주께 가오니, 주님이시어, 이 불쌍한 영혼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소서. 아픔도, 슬픔도, 근심 걱정도 없는 안식처, 주님 계신 영원한 그 곳으로....”

그들의 애절한 조가(弔歌)는 우리의 가슴을 헤집고 싸늘한 밤하늘 위로 솟아올라 멀리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 죽은 자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그들은 먼저 가고 우린 그들의 시신을 놓고 울어야 하는가?

 

나는 한전에 입사하여 본사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마산, 영월, 부산 발전소, 그리고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에서 오래 근무하였기 때문에 서울지역의 동창들에게 별 연락을 하지 못 하고 지냈지만, 철공소, 방직공장 같은 험한 공장생활을 거쳐 영등포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모여든 동기생들은 저희들끼리 또 그렇게 내왕하며 친하게 지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을 어느 날 부부동반으로 설악산 단풍구경을 갔는데, 그 길에 백담사를 들렀다는 것이다. 전두환 선배님이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턱이 뾰족하신 이순자 여사와 함께 백담사에 칩거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호기심 반, 동정 반으로 전두환씨를 보러 백담사를 가던 그 때, 그들도 아마 그래서 설악산 단풍도 구경할 겸, 우리도 한 번 안 가볼래, 하는 의논이 되어 전세버스로 설악산을 다녀오던 길이었다는 것이다.

 

기식이는 병원에서 머리와 손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로 침대에 앉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난, 뒷자리에서 졸고 있었어. 버스가 긴 다리 위를 지나는데 갑자기 차가 휘청 하고 흔들리더니 '꽝, 꽈당' 하더군. 그러더니 차가 기울어지면서 다리 아래로 떨어졌어. 나중에 알았지만 1.5톤 트럭과 정면충돌했다더군. 버스 앞쪽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으니 충돌상황을 본 사람도 없고..., 어느 쪽이 잘못 했는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른대. 양쪽 기사도 다 죽어버렸고.

 

난 무엇에 부딪혔는지 정신을 잃었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물속이더군.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캄캄한데 살아야겠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더군. 그래서 정신없이 차창 틈을 비집고 기어나와 물위로 헤엄쳐 올라와서 밖으로 나왔지. 밖에 나와서 돌아보니까 버스는 뭍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물속에 처박혀 보이지도 않고 몇 사람만 물위로 올라와 허우적거리고 있더군.

 

막 해가 진 다음이라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어. 군축교 다리 위를 올려다보니까 다리 위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늘어서서 우릴 구경하고 있더군, 야, 그런데 말야, 누구하나 내려와서 우릴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더구먼.

 

그제서야 버스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내가 건져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네. 버스는 꽤 깊은 물속에 잠겨있었는데 바퀴가 위로 향해 있고 완전히 180도 뒤집어져 있더군. 나는 물속에 잠수해 들어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끌어당겨 끄집어 올렸네. 내가 그래도 수영을 좀 하는 편이거든.

 

버스 창문들이 유리가 깨어진 채 찌그러져 있었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정신없이 붙잡고 끌어내느라 몰랐는데, 깨어진 유리, 찢어진 철판에 내 손가락 살점이 다 찢겨나가 손가락뼈가 허옇게 드러나 보이는데도 아픈 줄을 모르겠더군. 피가 나도 물속이니까 피나는 줄도 모르겠고...

 

숨이 차면 물위로 올라오고, 또 잠수해서 들어가서 옷자락이든, 머리채든 닥치는 대로 붙잡아 뭍으로 끌어내고 그렇게 한참동안 대여섯 명을 끌어낸 것 같은데, 나도 그만 기진맥진해서 뭍으로 올라와서 쭉 뻗어 버렸네.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이 탈진했다네. 그런데 그렇게 뻗어 있으려는데 갑자기 마누라가 생각나는 거야. 가만, 마누라는 어떻게 된 거야? 빙 둘러보니 마누라가 안 보이는 거 있지. 야, 이거 큰일이구나, 다시 벌떡 일어나 물 속으로 들어갔네.

 

물 속 버스로 다시 내려가 마누라가 앉았던 좌석이 있는 곳쯤을 더듬어서 기어 들어가 보니 마누라가 물 속에서 안전벨트에 묶인 채 의자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 있지? 난 안전벨트 생각은 미쳐 못 하고 정신없이 마누라를 옷이고 머리채고 손에 잡히는 대로 잡고서는 마구 끌어당겼는데 아무리 끌어 당겨도 안 당겨져 오는 거야.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라 깊은 물 속에서 뭐가 제대로 보여야 말이지.

 

그러다가 숨을 더 참을 수가 없어 마누라를 놓고 물위로 다시 솟구쳐 올라왔는데 물위로 올라오면서 아하, 마누라가 안전벨트에 묶여져 있구나,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물위에 올라와 숨 한 번 크게 들이키고 다시 들어갔다네. 그리곤 안전벨트를 겨우 풀고서 마누라를 끌어내서 물 밖으로 헤엄쳐 나왔지. 마누라는 이미 죽은 거 같더군. 그 사이에 시간이 한 10분은 넘게 흘렀으니까 마누라가 물 속에 잠겨 있은 시간이 아무래도 10분, 15분 정도는 지났지 않았겠나.

 

정신없이 마누라를 끌고 땅으로 기어 나와서 마누라 배를 눌러 물을 토해내게 하고, 옛날에 군대에서 배운 응급처치법 기억나는 대로 마누라 코를 붙잡고 입으로 숨을 불어넣고 배를 누르고 한참을 그랬더니 마누라가 다시 숨을 쉬잖아. 휴우... 하마터면 정작 내 마누라는 황천 보낼 뻔 했네. 애새끼 둘 달린 홀아비 될 뻔했네.”

손가락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다쳤지만 기적적으로 마누라까지 살려냈으니, 기식이는 그래도 다행인 셈이었다.

 

아이들만 고아로 세상에 남긴 채 부부가 함께 가버린 게 다섯 쌍이었고, 대여섯은 남편을, 또 대여섯은 아내를 잃어버린 참혹한 대형사고였던 것이다. 그런데 또 기막힌 것은 사고 버스가 보험도 들어있지 않은 사설 관광버스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날엔가 신문들이 “무보험 관광버스 불법영업”하고 또 크게 보도를 했다.

 

보상은커녕, 당장 병원비부터 개인이 부담해야 할 판이었다. 동창생들이 이리저리 뛰고 동문회도 나섰던 것 같다.

“백담사엔 돈 없습니까? 비자금 많다면서요? 정치 이 따위로 해놓고서 무보험 관광버스가 영업하게 개판 만들어놓고 절간에 들어가 있으면 답니까? 또 노태우 대통령은 뭡니까? 대통령선거 할 때는 우리한테 와서 대구공고 동문이라 카더니 이럴 땐 사대부고 동문입니까?”

 

나는 전대통령이나 노대통령이 어떻게 해 주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이 후배들을 외면키는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랴? 대통령을 둘씩이나 배출한들 그게 우리 땜쟁이 인생들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죽은 자들에게 두 대통령 선배들이 도와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대구공업고등학교 40회 졸업생, 우리들은 또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었다.

이 무슨 운명인지?

 

나는 한국전력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 때 그렇게 힘든 인생길을 걷고 있던, 그 참혹한 일까지 당한 내 동창생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 궁금하고 그립고 미안하다. 아, 그리고 슬프다. 서럽다.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