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광 1,2호기 건설현장

59. 문장고개 교통사고

Thomas Lee 2022. 11. 19. 14:59

영광을 떠나기 전에 85년엔가 있었던 교통사고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겠다. 영광에서 광주로 가는 길 중간에 문장고개라는 제법 높은 고개가 있다. 1986년 그 고개 꼭대기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1985년 12월이었던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때였던 걸로 기억난다. 우리 기계기술과 직원 가운데 강S가 서울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나와 직원들 셋, 이렇게 네 사람이 서울로 올라가서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양S씨가 승용차를 몰고 광주역에 마중을 나왔다. 늦은 오후였다.

 

나는 차를 몰고 마중 나온 양S씨가 고마웠지만 평소에 그의 운전실력을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는 나 보다 두 살인가 세 살이 많았고 우리 기계기술계에서 제일 나이 많은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기특하게(?)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그에게 언짢은 내색을 할 수도 없고, 버스 타고 가면 되는데 뭣 하러 이렇게 수고해서 나오셨느냐고 말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 터였다. 나는 오른편 뒷자리에 앉았고 직원 한 사람은 앞자리, 그리고 둘은 내 왼편에 앉았다. 양S씨는 아니나 다를까 출발하면서부터 빨간 신호등에 그냥 진행하는가 하면 차선을 바꾸면서 옆 차와 부딪힐 뻔도 하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아아,,, 조심해요. 빨간 불인데.... 어어... 차가 오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아차,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차가 어떻게 되든 말든 아예 눈을 들어 전방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문장을 지날 무렵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창 밖이 어둑어둑해져 책읽기도 힘들어졌다. 문장을 지나 문장고개에 다다랐다. 양S씨는 엑셀을 힘껏 밟아 차는 빠른 속도로 기다란 오르막길을 차고 올라가고 있었다. 차가 고개 정상에 거의 도달했을 때 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책에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길을 허옇게 덮은 눈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높은 문장고개 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큰일 났구나.”

바로 문장고개 꼭대기였고 길이 90도 왼쪽으로 꺾이면서 내려가는 지점이었다,

이 속도라면 길 밖으로 나가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제야 놀란 양S씨는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급히 꺾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운전을 한 셈이었다.

“어어어어....”

차는 앞바퀴를 왼편으로 꺾은 채 내리막을 맹렬한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커다란 헤드라이트 불빛 두 개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 순간 나의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이 씨발, 이게 뭐야?”

“꽝-”

 

우리가 탄 승용차는 맞은편에서 올라오던 버스와 정면충돌을 하였다.

“꽝-”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일순 조용해졌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오른편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데 그게 뒷문이 아니고 앞문이었다.

내 몸이 앞으로 쏠려 앞좌석에 부딪히는 바람에 앞좌석에 앉았던 최J씨가 대쉬보드와 의자의 틈에 압착되어버린 것이었다. 버스에 부딪힌 차 앞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기 때문에 혹시 차가 폭발하거나 불이 나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망가진 차로부터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앞좌석에 앉았던 최J씨는 숨을 쉴 수 없다면서 눈밭에 드러누워 버렸다. 다른 친구들도 다친 것 같지만 최J씨가 제일 큰일이다 싶었다. 운전을 하던 양S씨도 운전대에 부딪혔는지 가슴을 부여안고 고통해 하고 있었다. 버스 운전기사가 내려서 뭐라고 욕을 하면서 다가오더니 우리 모습을 보고는 도로 버스로 돌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택시 잡아야 해, 택시....”

나는 부서진 차 안으로 들어가 소지품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하였다. 택시를 타든 뭘 타든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누가 우리 소지품을 챙겨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마에서 뭐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뭐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가져다 이마를 만져보았다. 손가락 두 개가 쑥 들어가 미끈거리는 이마뼈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를 덮은 피부가 찢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옆의 직원에게 손수건 있으면 달라고 해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덮어 눌렀다.

 

빈 택시 한 대가 왔다. 우리는 그 택시를 잡아타고 거꾸로 광주로 달려서 광주중앙병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아니, 택시기사가 우리를 그리로 실어다 주었다. 우리가 왔던 길을 거꾸로 달려가는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최J는 연신 신음을 하고 있었고 양씨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비교적 가벼은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택시 안에서 나는 손수건을 이마에 대고 있었는데 오른손이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뿐 아니라 정강이도 아파오고 여기저기 몇 곳이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왼손을 가져다 오른손 위를 덮어 눌렀다.

 

병원에 도착하여 의사에게 제일먼저 최J씨를 봐달라고 하고 그 다음은 양S씨를 봐달라고 하였다. 그 두 사람이 응급처치를 받고 난 다음 내가 의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저도 좀 봐 주세요.”

“아, 그래요. 이마에서 손 좀 떼어 보세요.”

내가 이마에서 손을 떼자 그들이 소스라쳐 놀랐다.“우와, 이 아저씨가 젤 큰일이네. 얼굴 반쪽이 날아갔어.”

오른편 이마의 피부가 길게 찢어져 뒤집히는 바람에 그들이 보기엔 내 오른편 이마가 통째로 날아간 듯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이층 수술실로 데려가 수술대에 눕혔다. 그리고 찢어진 이마부위를 소독하고 세척하기 시작하였다.

“쏴, 쏴아아....”

“하이고, 머리카락이 들어갔네, 지푸라기도 들어가 있고....”

그렇게 세척을 하더니 이마 위 머리카락을 면도기로 밀고 이마를 꿰매기 시작하였다.

머리에서부터 이마를 지나고 눈썹을 지나고 눈 오른편까지 꿰매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눈썹을 지나고 눈 옆에 이르렀을 때에야 조금 따끔거렸을 뿐이다. 눈으로부터 나와서 이마로 올라가는 신경들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오른편 이마에는 감각이 없다.

 

그렇게 이마를 꿰매고 압박붕대로 동이고 나서 부어오른 오른손을 엑스레이로 찍었다.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손목 가까운 손등에서 검지손가락 뼈가 금이 간 것 같다고 했다. 부어오른 오른손은 붕대로 감아지고 성한 왼손에는 주사바늘이 꽂혔다. 그리고 얼굴이 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붕대로 감은 오른손은 퉁퉁 부어 물풍선이 되었고 살짝 닿기만 해도 아팠다. 그렇게 되고 보니 혼자 화장실에도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김H가 화장실에 따라와 내 바지 지퍼를 내려 주었다.

 

두 시간 쯤 뒤에 소장님과 부장님, 그리고 아내가 달려왔다. 아내는 내가 가장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들어서 병원으로 오는 내내 울었단다. 나는 별 거 아니라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 와중에서도 이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속으로는 화가 나 있었지만 밝은 얼굴을 지키고 있었다. “소장님, 이런 사고를 내서 죄송합니다. 전 괜찮습니다. 겉 포장지만 다쳤지 내용물은 이상 없습니다.”

아내가 나중에 내게 말해 주었다. 의사가 그러더란다.

“저 분이 머리를 저렇게 크게 다쳤으니 심히 걱정이 됩니다. 지금 저렇게 태연하게 농담도 하고 웃고 있지만 뇌를 다쳤기 때문에 저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밤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숨을 못 쉬겠다던 최J도 회복되어갔고 운전대에 부딪혀 갈비뼈 서너 개에 금이 갔다던 양S씨도 조금씩 나아져갔다. 우리는 이틀인가 지난 뒤 영광읍내 영광병원으로 옮겼다.

내 머리의 붕대를 바꾸기 위하여 풀었을 때 나는 거울로 꿰맨 내 이마를 보았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은 일그러진 호박 같았고, 머리에서부터 이마를 가로질러 눈썹을 지나 눈 오른편까지 이어진 바늘자국은 바가지를 꿰매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부은 얼굴이 비뚤어져 있어서 아무리 봐도 이마를 비뚤게, 어긋나게 꿰매어놓은 것만 같았다.

흡사 프랑켄슈타인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 나는 이제 내 얼굴을 잃어버린 건가, 이제 얼기설기 바늘자국 난 저 흉측한 꿰맨 바가지 같은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서글픔이 밀려왔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성한 얼굴일 때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어둘 걸......’

‘아, 그 때 문장고개 꼭대기에 도달할 때 내가 10 초만, 아니 5 초만 일찍 고개를 들었었더라도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한 주일쯤 지나자 얼굴의 부기가 좀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아팠지만 부기는 빠지기 시작하였다. 회사에서는 출근하라고 은근히 압박을 가해왔다. 내가 없으니 도무지 일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포장지만 상했을 뿐이니 출근 못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열흘 쯤 지나 퇴원한 다음 나는 머리와 손에 붕대를 감은 채 회사에 출근하였다. 다시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붕대를 풀고 머리카락 민 자리와 이마 꿰맨 자리를 감추려고 털실로 짠 모자를 뒤집어쓰고 출근했다. 많은 직원들이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다. 한 여직원이 털모자를 뒤집어 쓴 나를 보고 점잖은 과장님이 무슨 서커스 광대처럼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느냐고 흉을 보더란다.

 

치료비는 운전을 했던 양S씨가 책임져야 했다. 도로교통법상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보험에 들어있기는 했지만 보험회사의 부담한도가 있어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사고 직후 노조위원장이 내게 혹시 자가운전자보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에는 내게 차가 없었지만 얼마 전 혹시 필요할까 해서 들어놓은 자가운전자보험이 있다고 했더니 그 보험증을 달라고 해서 가지고 갔다. 그러더니 무슨 수를 썼는지 나의 치료비는 전액 그 보험으로 해결되었다고 했다.

 

우리 다친 다섯 사람은 얼마 후 함평의 한 용하다는 침술원을 찾아갔다. 경미하긴 했지만 머리를 다친 김H와 허리를 삐끗한 박J는 거기서 침을 맞았다.

 

그 사고가 있고나서 차를 타는 것조차 불안했다. 택시는 물론 버스를 타도 무서웠고 차가 조금만 흔들려도 깜짝깜짝 놀랐다. 운전을 하다가도 그 생각이 나기만 하면 이마가 섬뜩해지고 다리가 떨렸으며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차가 심하게 흔들리기만 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심했고 오래 갔다. 일년이 지나자 조금 나아졌고 삼년쯤 지나자 그 공포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병원에서 6개월이 지난 다음 성형수술을 받으라고 했기 때문에 6개월이 디기를 기다려 나는 광주의 한 성형외과를 찾아갔다.

성형외과 의사가 내 이마를 살펴보더니 말했다.“어느 병원에서 꿰맸어요? 야, 기가 막히게 잘 꿰맸네.”

그러더니 내게 굳이 성형수술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좀 더 있으면 바늘자국도 거의 사라질 거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 일했고 또 그렇게 한 차에 생명을 담았던 운명공동체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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