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광 1,2호기 건설현장

57. 접대비와 앉은뱅이 가라출장

Thomas Lee 2022. 10. 24. 08:46

한전지점 전기원 아저씨가 더운 여름날 한 여관에 들어선다.

“야, 이거 정말 푹푹 찌는군, 아, 덥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아, 예. 어서 오세요.”

“야, 이 집 에어컨 참 좋네. 아, 시원하다. 이제 좀 살 만 하네.”

“아, 예, 예. 더운데 수고 많으시지요?”

그리고 여관 아줌마는 안에다 대고 소리 지른다.

“야, 안에 누가 있냐? 시원한 맥주 두어 병 내 오너라. 한전 아저씨 오셨다.”

에어컨 시원하단 그 말 한 마디에 주인아줌마는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맨다.

맥주에다 과일까지 대접이 융숭하다. 여관집 아주머니가 왜 한전 전기원 아저씨한테 이렇게 잘 해줄까? 전기회사가 고마워서이겠지, 뭐.

 

전기는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게 아니다. 전류가 많이 흐르려면 더 굵은 전선이 필요하고 더 큰 용량의 설비가 필요하다. 설비나 전깃줄의 용량을 초과해서 많은 전기를 쓰면 과전류에 의하여 과열되고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전의 전기공급규정은 전기의 최대사용량을 정해두고 있으며, 수용가가 이를 초과하여 너무 많은 전기를 사용하면 안전을 위해서 전기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 이게 '계약전력량'이다.

그런데 무서운 한전 아저씨가 온 거다. 여관방마다 달려서 돌아가는 에어컨 용량을 합하면 계약전력량을 한참 초과할 텐데 계약전력을 초과했다고 문제를 삼거나 단전조치를 하지 않는 한전 아저씨가 아줌마는 진심으로 고마웠던 것일 게다.

이건 모두 옛날에 들은 이야기다. 30년 회사생활 하다 보니 주워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믿는다. 정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이런 용도로 쓰이는 게 접대비라고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여관을 경영하는 데도 접대비가 필요하다, 이 말이다.

 

어느 나라나를 막론하고 기업활동을 하고 영업을 하기 위하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경비와 활동비, 특히 접대비가 필요한 것 또한 물론이다. 꽌시로 유명한 중국도 그렇지만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하는 회사들이나, 또 공장 하나 세우려면 1,000 여개의 도장에다, 수 백 개의 서류에다, 인허가에 3년은 족히 걸린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접대 없이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바이어를 만나 상담(商談)을 성사시키고 관청을 찾아다니며 일을 이루기까지 두루두루 접대하고, 때로는 갈비집, 사우나, 요정, 골프장까지 모셔야 하고, 예식장부터 병원, 장례식장까지 두루두루 찾아다녀야 하고, 추석, 크리스마스, 설날명절 떡값인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상식이다.

국회의원님들, 시의원님들도 경조사 챙겨야 하고, 중,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도 육성회비에서 수 천 만원씩 경조비로 지출해야 하고 서울시장님 쯤 되면 판공비 5억원 중 경조비로만 1억2천만원이나 나가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인 것이다. 오가는 접대비와 촌지봉투 속에 따뜻한 인정과 인심이 오가는 나라가 동방예의지국 우리나라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매출액의 1%인가를 영업손비로 인정해 준 것으로 기억난다.

즉, 그 사용처나 내역을 묻지 않고 일률적으로 손비로 처리해 주는 것이다.

하기야 그 내역과 사용처를 밝혀야 한다면 누가 접대를 받으려고 할 것이며, 무슨 접대가 되겠는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접대도 잘 되고 사과박스도 잘 만들어지고 기업도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전은 접대비나 영업손비가 필요한 회사가 아니다. 사과박스, 골프백 만들 일도 없다. 착하신 국민들은 한전이 접대 안 해 드려도 전기 잘 사주고, 거래를 끊거나 거래처를 바꾸는 일도 없다.

오히려 한전은 설비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전소 건설공사부터 송전선로 공사, 사옥건설공사 등을 수주하고 기자재를 납품하려는 업체들이 와서 손을 비비는 회사이다.

 

원자력도 국산화제고에 힘썼지만 송배전 분야도 국산화를 제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중소업체가 변압기나 피뢰기나 차단기, 릴레이나 분전반, 애자나 금구류 같은 것을 국산화개발했다고 한전에 신고하면 한전사람들이 나가서 인정시험(認定試驗)이라는 걸 한다. 그리고 이 시험에 합격하면 개발비까지 포함해서 수입가격 보다 좀 높더라도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인정해서 한전이 구입해준다. 그걸 국산개발(國産開發)이라고 한다.

한전은 정부의 국산화촉진시책에 따라 수 십 년 동안 이렇게 국내의 중소기업들을 육성, 지원해 왔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해외업체와 기술합작, 개발해 가지고 국산개발을 해서 한전에 납품했다.

조합이라는 걸 만들어서 아예 한전의 구매물품을 통째로 수주해다가 저희들끼리 몇 %씩 나누어 납품하기도 했다. 그런 분들이 한전에 와서 손을 싹싹 비벼야 하는 건 물론이다. 이 때 사용하는 비용도 물론 접대비, 영업손비로 처리될 것이다.

 

전기고장 신고가 들어오면 배전사업소 전기원 아저씨들이 빨간 차를 몰고 헐레벌떡 출동한다. 전선주에 올라간다.

“어이, 그거 고장 난 거 어느 회사꺼야?” 밑에서 소리 지른다.

“제기럴, 아무아무 회사꺼야, 그거 가지고 왔나 확인 좀 해봐.”

올라갔던 전기원이 다시 내려와서 그 회사 제품을 찾아가지고 다시 기어 올라간다.

그 높은 전선주를 두 번씩이나 오르내리면서 투덜거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인군자다.

너도나도 국산화 개발해서 납품하다 보니, 배전설비들이 표준화되지 않고 구구각색이었던 것이다.

 

92년도에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발전, 원자력, 송전, 배전, 토건, 전산통신 분야까지 부장급, 과장급 간부들을 모아서 설비제도개선반이라는 걸 만들어서 검토한 적이 있다.

부장으로 막 승진한 나도 원자력 대표선수(?)로 이 설비제도개선반으로 파견되었다.

많은 납품업체들이 각양각색으로 납품하다 보니 품질문제를 일으키는 업체도 많고, 전기원들이 높다란 전선주를 두 번 씩 오르내려야 하니 이게 될 말인가?

그래서 표준화도 하고 품질 나쁜 업체는 잘라내고 합리적인 품질판정규정과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중소업체들이 들고 일어나 ‘너 죽고 나 죽자,’ 얼마나 아우성이었던지 이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 업체들의 접대비, 아니 영업손비가 도대체 무슨 힘을 썼는지 나는 모른다. 이런 데 쓰는 게 영업손비, 접대비니까....

결국 설비제도개선반은 아무 성과 없이 해체되었고 나도 아무 성과 없이 원자력건설처로 복귀했다.

어쨌든 그 후로도 한전 전기원들은 전선주를 두 번씩 오르내려야 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니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발전소 기자재를 공급하는 회사들이나 대규모 건설공사를 수주하려는 회사들의 수주경쟁도 치열했다.

90년대 기준으로 50만 ㎾급 2기를 건설하는 화력발전소 건설공사비는 1조원이 넘고, 100만 ㎾급 2기를 건설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비 총액은 3조원이 훨씬 넘었다. 지금은 그 두 배가 넘을 것이다.

90년대 기준으로 원자력의 경우, 발전소설계와 기술감리에 3,000억원, 현장건설공사에 6,000억원, 기자재 구입비가 약 1조 4,000억원, 핵연료 구입에도 1,000억원이 넘게 들었다.

영광 3,4호기의 경우, 1조 4,000억원 규모의 기자재 구매비용의 내역을 보면, 한국중공업과 ABB-CE나 GE 같은 해외공급자에 발주되는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에 7,000억원, 해외로부터 구입되는 일반 보조기기들이 2,000억원에 가깝고, 국내업체들로부터 구입되는 일반 기기와 자재만도 5,000억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막대한 공사금액 때문에 한전에는 따가운 의심의 눈총이 끊이지 않았다.

“야, 그 엄청난 금액에서 1%면 접대비가 얼마야? 맨날 퍼마셔도 되겠네.”

“업자들이 사과박스 들고 줄을 서겠구나.”

“야, 너도 원자력에서 돈 좀 만졌겠네?”

일반 국민들은 매출액의 1%가 영업손비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밖에.

 

1987년, 원자력 11, 12호기, 이름이 바뀌어 영광원자력 3,4호기가 된 원자력발전소 발주 때도 이러한 오해가 원자력을 향하여 따가운 눈총으로 쏘아졌던 것 같다.

세계적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줄어들어 일감을 확보하려는 해외업체들이 피 튀기는 경쟁을 하였는데, 한전은 이 기회를 기술자립의 기회로 삼아 한국중공업과 한국전력기술(주)를 주계약자로 하고 해외업체는 국내업체에 기술까지 넘겨주면서 하도급업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CE나 GE나 Sargent & Lundy 같은 해외업체들은 자존심을 죽이고 눈물을 흘리며 출혈경쟁을 하며 이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입찰을 해서 하도급업체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컴버스쳔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과 싸전트 앤 런디(S & L, Sargent and Lundy)사가 3억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거기다 현대건설이 어떻게 로비를 했느니 하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박정기 당시 한전사장은 “에라, 더럽다.” 하고 “큰 산을 넘는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 한 바디를 남기고 물러나 버렸다. 그리고 한전은 감사원 감사, 국회의 국정감사를 거쳐 검찰수사까지 받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나는 이 때, 원자력건설처의 원자로설비 및 터빈발전기 담당부서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자료를 준비하고 검찰에 불려가는 동료직원들을 뒤에서 지원하였다.

과연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한전에 리베이트 3억불을 줬을까? 한전 고위층이 그걸 꿀꺽 받아 챙겼을까? 한 마디로 말도 안 된다. 컴버스쳔 엔지니어링이 수주할 기자재 총액이 3억 달러 정도밖에 안 되고 싸전트 앤 런디사의 수주금액은 1억 달러도 안 되는데 3억 달러 리베이트라니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박정기 사장님이 로비나 사과박스를 받고 건설업체를 현대건설로 결정했다니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영업손비 1% 접대비 때문에 그런 것인지 세상이 원자력을 썩어빠진 관행의 눈으로 본 것이다.

 

몇 주 동안 계속된 검찰수사는 별 문제없이 끝났다. 문제가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수사관들과 검사들이 국가를 위하여 원자력발전소 짓느라 고생 많다고 격려를 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렇지만 사장 자리를 박차고 떠난 박정기 사장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건설현장에서 현대건설로부터 접대를 많이 받았다. 시공업체인 현대건설의 건설공사는 접대비 없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민법이나 상법에 의한 거래(去來)는 그 목적물을 공급하고 그 대금을 받는 교환행위이다. 즉 물품을 납품하면 그 값을 지불받는 것이다. 그런데 건설공사나 용역은 물품이 아니므로 현대건설은 공사 진척도에 따라 매달 기성고(旣成高)를 지불받게 된다. 그런데 공사를 감독하고 공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가를 공정표에 따라 판단하고 인정해 준다. 그래서 현대건설은 한전의 직원들, 특히 감독직원들을 잘 대접해서 제 때 기성고를 원활하게 지급받을 수 있도록 애쓰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기성고를 제대로 받지 못 하여 자금사정이 어려워지고 이로 인해 긴급금융이나 사채를 얻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계장이었으므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감독과장들이나 감독직원들은 정문 앞 식당에 외상장부를 만들어놓고 식사를 하고, 술도 한 잔씩 걸치곤 했는데 그러면 현대건설에서 대신 지불해주었다. 많은 돈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공사진척도와 기성고를 손에 쥔 감독과장이나 감독직원들에게 그 정도는 기꺼이 쓰는 것 같았다. 나도 퇴근길에 감독과장들과 어울려 함께 저녁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고스톱 치다가 집에 온 적 많았다. 명절이 되면 현대건설이 떡값이라면서 얼마를 넣은 봉투를 돌리기도 했고 소고기를 조그맣게 포장해서 찔러 넣어주기도 했다.

 

한 번은 송년회라는 명목으로 현대건설이 한전의 건설사무소 과장급 이상 전체 간부직원들을 초청하여 광주까지 나가서 거나하게 대접한 적이 있었다. 소장님부터 부장님들, 과장님들까지 수십 명이 현대건설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광주시내 요정으로 출동하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맥주를 돌리더니 양주가 등장하고 색시들이 나와서 장고를 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무조건 마셔야 했다. 술이 약한 나는 양주 몇 잔을 억지로 받아 먹고 혼절해 버렸다. 아침에 깨어보니 여관방이었다. 나를 업어다 여관방에 눕혀놓고 간 것이었다.

 

그런데 한전도 접대할 곳이 많았다. 한전이 눈치보고 두 손을 비벼야 할 높은 자리가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정부의 중앙관서는 물론이고, 지방사업소의 경우 인허가, 통관을 해주는 도청과 군청, 경찰서와 소방서, 관세청 등이 모두 한전이 손을 비벼야 하는 곳이었고, 면사무소, 경찰지서, 소방서 같은 곳도 무시하면 안 되는 곳이었고, 의원님들과 지방유지들, 환경단체, 신문기자 같은 손님들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되는 분들이었다. 이런 무서운 나으리들에게 찍히는 날이면 "오라, 가라, 무슨 규정 위반이다, 절차가 어떻다.'는 식으로 시비를 걸 수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힘 드는 발전소건설이 더욱 힘들어지는 것이다.

 

영광원자력건설소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전시관과 발전소 구석까지 안내하며 설명을 해드리고 정성껏 식사라도 대접해서 보내야 했고, 때로는 약간의 촌지 봉투나 거마비도 마련해 드려야 했다. 장례식, 결혼식도 가끔은 찾아가서 봉투와 함께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대접이 소홀했다가는 신문에 뭐라고 때릴는지, 무슨 트집을 잡히고 무슨 봉변을 당할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원래 본부장과 소장이 관공서나 나으리님들을 대접해야 하는데 기술직 엔지니어들이 이런 일에는 도통 맹탕이라 하여 한전은 행정실이라는 사무직 부서를 새로 만들고 행정실장이 이런 골치 아픈(?) 대외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영광원자력본부에도 행정실이 설치되고 행정실장이 부임하였다.

 

아무래 높은 사람이 되려면 주량이 커야 하는 것 같았다. 소장님 쯤 되려면 술도 잘 마셔야 하고 행정실장쯤 되려면 술자리 매너도 좋아야 하는 것 같았다. 나같이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아예 그런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해도 못 앉을 것 같았다.

지방유지나, 행세깨나 한다는 주민들도 와서 손 내밀고, 군민체육대회니, 무슨 청년회니, 클럽이니, 운영회니, 야유회 가는 데까지 한전의 후원을 요구했다. 학교 교장선생님까지 한전의 발전소나 건설소에 오셔서 학습용 컴퓨터를 사 달라든가, 어린이들을 위하여 학교 운동장에 마사토 몇 트럭을 깔아달라든가 하는 요구도 해왔다.

개인기업이라면 총매출액의 1%를 인정해 주는 영업손비로 계상되어 처리될 것이지만 한전과 같은 공기업에 이런 영업손비나 접대비가 있을 수가 없었다. 사업소장의 업무추진비 외에 공용업무추진비라는 명목의 약간의 예산이 있었지만 이걸로 감당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전은 현대건설이나 동아건설 같은 시공업체에 이런 민원(?)을 떠넘기기도 했다.

“시공업체도 같은 배를 탔으니 운동장에 마사토 까는 건 현대건설이 좀 해 주시오.”

더러는 술값 영수증을 시공업체에 슬며시 떼밀어 대신 갚게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튼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각 부서는 소장님의 대외활동비 조달을 위해 부서마다 출장비를 만들고, 소모품 경비를 쪼개어다가 소장님이 손님접대에 보태 쓰시도록 조금씩 성금(?)을 갹출해 드렸다.

소장님만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각 부서장들도 돈이 필요했다. 각 부서장들도 찾아오는 손님들이나 관청 나으리 접대도 해야 하고 직원들 회식이나 야유회도 가끔은 해야 했다. 그래서 관행적으로 하는 일이 ‘가라출장’이었다.

 

본사나 다른 사업소로 출장 간다고 출장비를 타내어 부서의 경비로 쓰는 것이었다. 직원 한 사람을 앉은뱅이 가라출장을 보내면 4, 5만원 정도 출장비를 타낼 수 있었다. 출장가는 사업소 서무부서에 전화를 걸어 누구 며칠자로 거기 출장 간 걸로 등록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 알아서 등록을 해 주었다. 사업소들이나 본사부서들이나 서로서로 그렇게 상부상조로 가라출장 등록을 해주었다. 각 부서마다 한 달에 서너 사람이 이렇게 가라출장을 가서 돈을 타내어 경비를 조달하고 때로는 부서 회식도 하고 단합대회도 했다.

앉은뱅이 가라출장.... 한전에 근무했던 분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고 익숙한 일이었다. 한전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모든 공기업, 모든 기관, 관청 공무원들이 다 이런 식으로 비공식 경비를 조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부의 지시로 주변지역을 접대하기로 하였다. 이름하여 주변협력지원비였다. 반경 몇 킬로미터까지는 얼마, 몇 킬로미터까지는 얼마 식으로 발전소가 한 해 수십억 원 씩을 주변지역에 지원해주라는 것이었다. 이 주변지원협력비 예산으로 인근 군, 면 고아원, 양로원, 농로나 진입로 개.보수, 노인복지후원, 운동회 행사 같은 것을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그래도 별 약효가 없었다. 그까짓 푼돈에 넘어갈쏘냐는 식이었다.

반경으로 그어지는 동그라미 바로 바깥쪽 동네 주민들이 와서 왜 우린 안 주느냐고 항의를 했다. 가마미 해수욕장 마을에 74억원을 주었다는 소문에 인근 지역들까지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 “두들기라, 두들기면 열릴 것이니, 두들겨 패라. 두들겨 패면 한전은 돈 나오는 데다.”

 

군(郡)에서는 한전으로부터 받는 주변지역협력비는 군(郡)예산에 편성해 써버리고 막상 한전의 사업소로 들어가는 비좁고 꾸불꾸불한 도로는 10년이 넘도록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한전으로 가는 길이니 한전이 알아서 도로를 고치거나 새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과연 주변지역협력비가 주변지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데 도움을 주었을까? 글쎄다. 주변지역협력비가 해마다 수십억 원씩 뿌려져도 발전소엔 여전히 기관장, 지방유지, 단체장, 의원님, 지역유력자들이 끊임없이 오셔서 시찰과 견학을 하시고, 사업소장님은 오늘도 여전히 접대비가 필요했다. 아랫것들은 오늘도 가라출장 끊어서 접대비를 만들어 드리고, 소장님은 오늘 저녁도 의원님, 기관장님, 유지님과 함께 술자리에 앉아 계실지 모른다,

 

나는 떠나온 지 20년도 넘었지만 지금도 건설현장에서는 그렇게 접대를 받으며 술들을 마시고 있을까? 지금도 가라출장 끊어서 저녁밥 먹고 있을까?

 

아무튼 대한민국은 술 안 마시면 안 되는 나라였고 접대비 없으면 안 돌아가는 나라였다.

88년 무렵이었던가 내가 본사에서 근무할 때 입사동기 한 친구가 한전에 사표를 내고 현대로 옮겨갔다. 한전의 박봉 보다 훨씬 많은 두 배의 봉급을 준다고 했단다. 그런데 열흘인가 두 주쯤 지나서 되돌아왔다. 그 친구의 상사가 사표를 수리 않고 설합 속에 넣어두고 그 친구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단다,

그런데 그 친구가 돌아온 이유는 그게 아니고 술 때문이었다. 현대에 갔더니 밤을 새다시피 새벽까지 술을 마시게 하더란다. 술이 떡이 되다시피 하여 집으로 갔다가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일어나 출근했는데 밤새도록 함께 술 마시던 상사가 먼저 출근해 있더란다. 돈도 좋지만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전으로 돌아왔단다. 그 친구, 결국 처장까지 하고 40년 근속하고 정년퇴직했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쓰긴 했는데....., 이런 이야기 하려니 참 거시기하네요.

그러나 우리의 그 시절 이야기라 남겨놓고 싶었습니다. 이것도 우리의 역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