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광 1,2호기 건설현장

58. 영광의 시절 기억

Thomas Lee 2022. 11. 4. 07:15

“영광의 시절”, 제목을 이렇게 써놓고 보니 우습고 아리송하다. 영광스러운 시절이었다는 이야기인지, 영광에서 살던 시절이었다는 이야기인지.......

우리가 흔히 쓰는 영화로운 빛은 ‘榮光’이고 영광원자력이 건설된 곳의 지명은 靈光이다. 靈光이라니, 영(靈)의 빛(光)이라니 지명 치고는 특이하고 으스스하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그 영광의 원자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30대의 절반을 보냈다.

영광을 떠날 때 30대 초반이던 나는 40이 다 되어가는 아저씨가 되었고 아들은 홍농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있었고 딸은 홍농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이 되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도로사정이 열악하여 영광은 내 고향 안동으로부터 너무 먼 곳이었다. 1983년에 내가 전라도 영광으로 발령받아 간다고 하니까 고향 어르신들이 어떻게 그렇게 먼 곳에 가느냐고 펄쩍 뛰었다. “전라도에 가면 김대중 조심해라, 속지마라, 그놈은 빨갱이다.” 고 신신당부하는 어르신도 계셨다.

영광에 발령받은 1983년 그 해는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도 못 갔다. 아니 갈 엄두조차 못 냈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건 둘 째 치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이듬해 추석 때였던가 용기를 내어 고향에 가기로 했다. 어떻게 가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김J씨가 디젤승용차를 빌려주셨다.

 

나는 아내와 아이 둘을 태우고 홍농사택을 출발하였다. 광주로 간 다음 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라 순천 쪽으로 남하하여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를 지나 대구로 가는 구마고속도로를 따라 대구로 갔다. 대구로 올라가는 도중에 커브길에서 반대편에서 차선을 넘어온 트럭을 겨우 피했다. 그렇게 오전에 출발했는데 대구에 도착하니 10 시간 가량이나 걸렸고 늦은 밤이 되었다. 대구의 동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원대를 지나고 칠곡, 군위, 의성을 거쳐 안동으로 올라갔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고향을 방문한 후 돌아올 때는 대구에서 거창, 함양을 거치고 지리산 자락을 넘어 남원을 지나 광주로 오는 국도를 택했다. 거리는 좀 덜 멀었지만 구불구불 끝없는 산길을 운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운전할 때 아이들이 모두 멀미를 하고 구토를 해댔다. 그렇게 광주를 거쳐 홍농사택으로 돌아오니 열 서너 시간도 더 걸린 것 같았다. 운전을 하면서 얼마나 긴장하고 힘이 들었던지 나중엔 차선이 비좁게 보이고 마치 꿈속에서 운전하는 듯하였다. 생각해보니 온 가족이 목숨을 건 귀향길을 다녀온 셈이었다. 그 후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어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홍농에서 출발하여 광주를 지나 고속도로까지 가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고 광주-대구 간 88올림픽고속도로를 통과하는데 네 시간, 대구에서 안동까지 국도로 네 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안 쉬고 부지런히 달려도 꼬박 10시간 넘게 걸리긴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땅덩어리 안에서 어찌 그리도 멀었던지......

 

86년에 1호기가 준공되고 2호기가 시운전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그렇게 바쁘던 건설업무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던 건설현장에 드디어 일요일이 돌아온 것이었다. 현대건설의 인력도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현대건설 모과장이 2년이나 몰고 다니던 포니엑셀 중고차를 200만원을 주고 사서 드디어 마이카의 꿈을 이루었다. 그 때부터 일요일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가끔 주변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그 차는 1992년까지 우리의 자가용이 되어 주었다.

 

그 무렵이었던가 그제야 우리 기계기술과도 단합 야유회를 가자 해서 어느 일요일, 봉고차 두 대를 얻고 승용차도 몇 대 동원해서 가족들까지 싣고 변산반도 채석강으로 갔다. 몇 년이나 건설현장에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멀지도 않은 그 곳에도 처음 가 본 것이다. 모두들 내려서 채석강을 구경하는데 하필이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밭에 무슨 기구나 작물을 보관하려고 만들었는지 나무기둥을 세우고 위에 함석지붕을 덮은 캐노피가 보였다. 제법 널찍했다. 우리는 모두 그 아래 들어가 비를 피하다가 아예 거기 자리를 깔고 개스 버너를 피우고 준비해간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그 장소를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야유회를 하고 돌아왔다.

 

또 한 번의 가족여행이 있었다. 이번에는 가족을 이끌고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지리산 뱀사골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민박을 하면서 일요일 하루 온종일 계곡물에 풍덩거리며 놀았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5년 동안 우리 기계기술과의 단 두 번의 가족야유회, 가족여행이었다.

어느 토요일엔가 회사에 출근했다가 우리 기계기술과 전직원이 함께 건설현장이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금정산에 올라갔던 적도 있었다. 거기에서 건설현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다.

 

한 번은 남자들끼리만 오붓하게 토요일 오후에 일박이일 여행을 떠났다. 메시하씨(Mr. Messiha)도 동행하였다. 우리는 승용차 세 대인가에 분승하여 영광을 지나고 함평과 무안을 지나고 목포에 가서 유달산을 구경하고 영산강댐을 지나고 해남 땅끝마을이라는 데도 가보고 거기서 점심을 먹고 완도로 들어가서 몽돌해변을 구경하고 어떤 술집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며 밤새도록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등산도 가보자 해서 직원들과 몇이서 일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암 월출산으로 갔다. 월출산 서편의 도갑사로 해서 천황봉으로 올라갔는데 몇 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운동이라고는 거의 안 한 저질체력 덕분에 나는 몇 시간 산길을 오르면서 거의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힘을 다 해 천황봉에 올라서 내려다본 풍경은 황홀하였다. 발아래 펼쳐진 들판과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비행기를 탄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편 천황사로 내려오는 길에서 본 월출산의 기암과 절벽들은 놀라운 절경이었다.

 

지리산에도 올라보자 하여 나를 포함하여 네 사람이 진주로 가서 택시를 타고 중산리로 갔다. 거기서 민박을 하고 아침에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두 시간 쯤 올라가니 법계사인가 하는 조그만 절이 나왔다. 거기가 천왕봉까지의 중간지점이라고 했다. 거기서 잠시 쉰 다음 다시 천왕봉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하였다. 급경사가 이어졌다. 로프를 잡고 오른 구간도 있었던 것 같다. 역시 내가 제일 문제였다. 직원들은 나와 보조를 맞추느라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장터목산장을 향하여 내려갔다. 제석봉인가에 이르렀을 때 붉은 석양이 고사목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멋진 광경을 가지고 간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그 사진을 크리스마스카드에 붙여서 보내기도 했는데 그 사진이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장터목산장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저녁밥을 지어먹고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하산길 산행을 시작하였다. 한참을 내려가 세석평전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내려가다가 어디쯤에선가 우리는 뱀사골 계곡을 향하여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급경사가 이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가 뱀사골로 흘러내려가는 계곡물을 만났을 즈음 드디어 나의 다리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무릎이 점점 아파오더니 나중에는 다리를 구부리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나는 짐을 직원들에게 모두 맡기고 나무 작대기 하나를 지팡이로 삼아 짚어가며 한 쪽 다리로 절뚝절뚝 걸어서 겨우 뱀사골에 도착하였다.

그 하산길에서 전기과에서 근무하는 직원 하나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커다란 배낭을 지고 마치 사슴처럼 바위 위를 요리조리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산을 다녔다고 했다. 운동도 않고 산에도 안 가고 죽자고 책상에 붙어 앉아 일만 한 나는 멍하니 그 친구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요일에 직원들과 함께 난(蘭)을 캐러 산을 오르기도 했다. 분재를 만든다고 나무를 잘라오기도 했다. 목포의 유명한 수석전시관을 구경하고 와서는 수석을 주우러 강으로 해변으로 다니기도 했다. 누구는 중투니 소심이니 하는 특이한 춘란(春蘭)을 캐서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 몇 십만 원을 받고 팔았네, 누구는 멋진 몇 백만 원 짜리 수석을 주웠네 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런 행운이 내게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일요일, 우리가 수석을 주우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가마미 마을 시위대가 경운기를 몰고 발전소에 쳐들어와 난리가 났었고 사택에는 비상이 걸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시위대가 우리 건설사무소로도 쳐들어와 건설소장을 포위하고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의 주말의 꿈은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다시 산으로, 강으로 마음 놓고 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건설막바지에 잠시 찾아왔던 주말의 기쁨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1987년에 한 친구의 권유로 방송통신대 2학년 법학과에 편입하였다. 그 동안 보조기기 공급계약과 시공계약을 다루다 보니 법률도 좀 공부해 보고 싶어서였다. 강의는 라디오 교육방송으로 들었는데 한밤중이나 새벽에 방송되는 때가 많아 더러 강의시간을 놓치기도 했다. 민법개요, 형법개요, 국제법..., 그런 과목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계휴가를 며칠 내어 학교여름방학에 한 주일인가 전남대학교에 가서 출석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이 숙제를 내어주셨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떤 법률적 문제를 놓고 일종의 간략한 논문을 쓰는 숙제였다. 200자 원고지 열 몇 장인가 스무 장 쯤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 숙제를 냈더니 교수님이 첨삭지도라 해서 붉은 글씨로 고치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고 평가도 하여서 돌려주었다. 그런데 내가 받은 점수가 높았다. 친구가 그걸 보더니 지금이라도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그러냐고 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이듬해 1988년 봄 내가 본사로 발령받고 나자 다시는 그렇게 공부를 할 틈도 나지 않았고 그렇게 공무를 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1987년에는 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대통령선거였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거두들의 각축전이었다. 김대중 선생이 영광에 온다는 날 건설현장의 많은 직원들이 온다간다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가 몇 시간 뒤에 나타났다. 영광에 가서 김대중 선생이 토하는 열변의 유세를 듣고 온 것이었다. 사택 안에도 80년 5.18 광주사태 때의 동영상이 떠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라도 사람들끼리 은밀히 나누는 정보였고 나 같은 외지사람에게는 전혀 공유되지 못 하였다. 살벌한 분위기가 역력히 느껴졌다.

 

그렇게 대통령 선거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외지인 과장들 몇 사람이 모여서 이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이 3등을 하게 된다면 별 일 없겠지만 만일 2등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만일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 홍농읍에서는 우리가 타깃이 되지 않을까? 우리 차에다 기름 가득 넣어놓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 직전에 있었던 국회의원선거 결과를 가지고 대통령선거 판세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별로 표를 만들어놓고 투표율과 투표수, 정당지지율을 대입하여 대통령후보별 예상득표수를 산출하였다. 우리가 얻어낸 예상결과는 노태우 1등, 김영삼 2등, 김대중 3등이었다. 그리고 이 예상결과는 거의 정학하게 일치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가 예측한대로 별다른 소요사태는 없었다.

 

건설이 막바지에 이르고 건설현장에 여유가 생기자 좋은 점도 많았지만 이별의 아픔도 시작되었다. 우리 부서에 와서 일하던 한기(韓技)의 인력공급 하청회사들의 소속직원들이 가장 먼저 감원되어 현장을 떠났다. 못내 아쉬워하며 그들이 떠나가고 나자 한기 소속직원들이 또 복귀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한전직원들이었다. 최J와 김H가 울진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으로 발령 받았다. 영광에서 울진은 그야말로 끝에서 끝, 아득한 곳이었다. 고향이 대구인 최J는 울진에 가서 잘 있다고 했지만 고향이 전라도인 김H는 타향살이를 버티지 못 하고 이듬해 영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 둘 헤어졌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그렇게 하나 둘 떠나갔다.

벡텔사 직원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나와 함께 일하던 메시하씨도 미국으로 돌아갔다. 벡텔사 직원들이 철수하자 사택의 외국인 아파트들이 비게 되었다. 회사는 그 빈 아파트에 부장들과 과장들 가운데 고참들을 입주하게 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도 넓은 아파트에서 1년 가량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88년 봄에는 나도 영광을 떠나 본사로 올라가게 되었다.

 

87년 여름이었던가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하여 영광 1,2호기 준공식이 열렸다. 준공식을 대비하여 보도자료를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토목, 건축, 기계, 전기, 계측, 품질 등 각 부서마다 건설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과 홍보자료를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각 부서로부터 자료를 받아 종합하여 보도자료를 만드는 그 일이 또 내게로 떨어졌다. 건설현장 과장들 가운데서 내가 제일 글을 잘 쓴다는 이유에서였다. 각 부서 과장들을 며칠 동안 독촉했지만 제출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몇 제출한 글들이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거의 전부를 다 썼다.

 

내가 쓴 그 글들이 준공식에 참석한 인사들과 기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이라 내가 쓴 글은 타자수 여직원이 타자기로 옮겨 찍었고 그렇게 복사한 것이었다. 나는 그걸 한 부 챙겨두었다가 훗날 그걸 내 컴퓨터에 옮겨 넣었다.

 

영광(靈光), 거기에 영적인 뭐가 있었는지, 영광원자력건설현장에서 일했던 직원들 가운데 이상하게 나중에 회사를 떠나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1998년에 내가 다시 영광5,6호기 건설현장으로 갔을 때 영광출신 직원들 가운데 목사, 선교사가 된 사람의 수가 열 명이 훨씬 넘는다고 했다. 나중에 나도 그 숫자를 하나 더 보탰으니 그것도 기이한 일이다.

 

이제 내 나이 일흔이 넘어 그 영광의 시절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준공보도자료 말미에 나는 이렇게 썼다.

“추위에 떨며, 더위에 허덕이며, 때로는 배고픔도 잊은 채 졸음을 쫓으며, 현장작업 감독과 서류 속에서 씨름하던 일, 도면을 뒤지고, 자재를 산출하고, 전산기에 입력하고, 온갖 서류 속에 파묻혀 있던 시간들, 뜻하지 않은 일이나 사고 때문에 밤을 새운 일, “하루 공기 백만불”에 쫓겨 일하던 건설요원들과 시운전요원들의 쉴 틈 없는 움직임, 되지도 않는 손짓, 발짓 영어로 외국인기술자들을 독려하고, 씨름하던 일....

한 푼이라도 공사비를 절감해야 한다고 일일이 계산기를 두들겨보고, 맞춰보고, 따져보고, 외국업체와 어려운 협상을 벌이며 1불의 외화도 헛되이 쓰지 않으려 했던 노력들.

그러나 또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들과 아득하게 느껴졌던 순간들......

검정고무신에 보릿고개를 넘으며 깜박거리는 석유등잔 밑에서 자라난 우리들이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저 웅장한 원자력발전소!

그 모든 일들을 기적처럼 마쳐낸 그 시간들을 이제 모두 털고 잊어버릴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신우회 성가대가 불러주던 아름다운 캐럴 송,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려 독생자를 보내셨네’.

금정산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 시원스레 불어오던 해풍, 홍농사택의 눈부신 벚꽃길,

눈이 내리면 나뭇가지마다 탐스럽게 피어나던 하얀 눈꽃....

초가와 오솔길과 논밭, 그리고 아담한 작은 국민학교 하나 서있던 계마리 동네는 사라지고, 이제 우뚝 선 원자력발전소!“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그립다.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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