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광 1,2호기 건설현장

56. 업무추진비와 지역홍보비

Thomas Lee 2022. 10. 20. 11:41

앞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좀 더 이야기해야겠다. 한전은 이런 점에서도 정상적인 회사라고 볼 수 없다. 한전에는 사장이 없다. 한전에서 직원들의 급여를 정해주는 것은 사장도 아니고 노사협약도 아니다. 다음 해 급여를 정하는 것은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제 21조(예산편성지침)이다.

“재정경제부 장관은 매년 10월 31일까지 다음 회계연도의 각 투자기관의 예산편성에 적용되는 사항에 관한 지침을 작성하여 이를 각 투자기관의 사장에게 통보하여야 한다(개정 1997. 8. 28)”

정부투자기관들이 예산관리를 제대로 하고 효과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투자 및 관리할 수 있도록 재정경제부장관이 지도한다는 것이 그 법률취지다, 글쎄, 지도한단다.

 

그런데, “예산편성에 적용되는 사항”, 요게 바로 독소조항이다. 이 조항을 근거로 정부는 예산지침으로 다음 해 공기업의 예산을 “딱!” 소리가 나게 정해준다. 예를 들어 “내년도 한전 인건비 예산은 올해 보다 3% 늘어난 8천억원 한도에서 집행할 것”, 하고 지시하면 이 인건비 예산이 한전 전체 직원의 급여를 그대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장에게 아무 힘없다. 노조가 아무리 울고 불어 봐야 소용없다.

 

공기업 올가미가 또 있다. 경영평가..... 정부가 시킨 대로, 계획한 대로, 목표달성 잘 했는가, 예산집행 잘 했는가, 전문가, 교수님들까지 투입해서 해마다 공기업 경영평가를 한다. 정량평가도 하고 정성평가도 한다. 그렇게 해서 말 잘 들은 공기업은 보너스 더 주고 못 한 공기업은 보너스 깎는다. 경영평가 잘 못 받으면 직원들 보너스만 깎이는 게 아니라 사장님 자리도 위태해진다. 그래서 사장님들은 그 목표달성 하려고, 경영평가 점수 잘 받으려고 별 짓을 다 한다. 점수따기지, 그게 무슨 경영?

 

결국 노조는 정부의 "예산지침" 안에서 노조소속인 평직원들의 봉급이라도 좀 더 올려 받기 위하여 노조소속이 아닌 간부직원들의 봉급을 깎아 내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계장이 되면 노조에서 자동탈퇴가 되므로 우리같이 ‘장’자가 붙은 직원들은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낙동강 오리알이다. 노사협약은 예산지침 안에서 갈라먹기 협약이다. 이를테면,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3%인상이라면, 직원들은 5%, 4%, 과장급 2%, 부장급은 1%, 그 이상은 동결, 하는 식이다. "아랫것들은 후하게, 윗분들은 박하게", 이것이 이른 바 하후상박(下厚上薄)이다.

 

이 하후상박을 내가 근속한 30년 동안 노사가 마주 앉아 해마다 하다 보니 나중엔 과장봉급이나 직원봉급이나 그게 그거, 아래위가 딱 붙어서 하후상박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평준화 되어버렸다. 한전이 23개 공기업 중에서 봉급꼴찌라고 했으니까 한전 보다는 나았겠지만 다른 공기업들도 예산지침 안에서 갈라먹기 한 건 비슷했던 것 같다. 1999년도에 정부가 한국조폐공사의 인건비를 전년도 보다 27%인가 깎아서 내려 보냈다. 너무 심하게 깎아버렸으니 이에 반발하는 노조와 회사 간에 임금협상 합의가 될 턱이 없었다. 노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급여는 지난 해 기준으로 계속 지급되었다. 그리고 10월에 정부가 ‘예산지침’으로 내려준 인건비가 동이 나버렸다. 그래서 신문과 TV에 났다. “돈 찍어내는 조폐공사가 돈이 없어서 직원들 봉급을 못 준단다.” 돈 찍어내는 회사에 돈이 떨어져 봉급을 못 준다니 희한한 뉴스거리가 아닌가?

 

30년 세월 하후상박 때문에 등장한 것이 업무추진비와 기밀비, 그리고 홍보비다. 대개 관공서의 기관장이나 부서장이 되면 판공비라는 것이 있다. 군수나 시장 같은 큰 기관장급이 되면 1년 판공비가 수 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넘기도 한단다. 98년엔가 서울시장님의 판공비가 무려 5억원이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98년엔가, 99년 언론보도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도 한 해 4천만 원의 경조비를 기성회비에서 지출한다는 기사가 떴다.

 

개인기업에서도 사업소장, 영업소장, 부서장, 영업직원들에게 대외업무와 영업활동을 위하여 판공비 또는 업무추진비, 활동비를 준다. 세법상으로 총매출액의 1%인가를 증빙서류 없이 영업손비로 인정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한전엔 그런 거 없었다. 일반기업처럼 영업할 일이 없으니까 그랬겠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내가 영광원자력에서 일하던 그 때, 1985년까지, 한전에는 판공비나 업무추진비, 기밀비 같은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절 공무원들에게 공무원 보다 많은 공기업의 급여수준은 눈엣가시였다. 정부는 “국영기업 수준으로의 공무원 처우개선”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공무원 봉급을 올려주기 보다는 한전 같은 공기업의 봉급을 깎는 것이 훨씬 빠른 “국영기업 수준으로의 공무원 처우개선”의 방법이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한전 간부직원의 봉급은 계속 박해져만 갔다. 해마다 거듭된 공무원기준의 봉급억제와 하후상박으로 과장이나 부장이나 직원이나 모두 박봉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윗사람 체면에 죽겠다는 소리는 할 수 없고, 때때로 아랫사람들 일도 저녁밥이라도 사 먹여 가면서 시켜야 하고, 더러는 손님접대도 해야 하고, 관청에도 들어가야 할 텐데, 판공비도 한 푼 없고 봉급도 많지 않은 간부의 애로와 체면과 품위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사장 맞바꿔!” 명령으로 한국중공업으로 성낙정 사장님이 가고 박정기 사장님이 한전사장으로 온 것이 1983년인가 그랬다. 그리고 박정기 사장님은 “살 맛 나는 한전”, “세계초일류기업 한전” 같은 기치를 걸고 한전의 로고를 바꾸고 통금버스 색깔도 바꾸고 “걷지 말고 뛰자.”, “하루 5분 명상하기” 같은 행동지침을 하달하는 등 한전의 분위기를 바꾸는 노력을 했다.

 

1985년엔가 전 간부직원이 일제히 특진을 했다. 계장은 과장으로, 과장은 부장으로, 본사의 차장은 부처장, 부장은 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봉급은 못 올려주지만 명칭이라도 올려준다는 것이었다. 민간기업들에서는 40대만 되면 부장이 되는데 한전은 자녀들 결혼시킬 때까지도 만년 계장이고 과장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나는 과장님이 되고 과장님은 부장님이 되셨다. 갑자기 바꾸어 부르려니 몹시 어색했다.

그리고 본사의 몇 개 부서씩을 묶어서 관리본부장, 영업본부, 발전본부 식으로 본부를 만들고 큰 사업소들도 본부가 되었다. 고리원자력본부, 영광원자력본부, 월성원자력본부, 울진원자력본부가 되었고 본부장은 집행간부라 하여 전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그러더니 1986년 여름쯤엔가 본사 인사처에서 공문이 날아왔다. 부장급에게는 월20만원, 부처장급은 월30만원, 처장이나 사업소장인 경우는 50만원인가 60만원을 업무추진비와 기밀비로 지급할 테니 알아서 사용하고 영수증 처리는 그 부서가 필요경비로 쓴 것으로 잘 정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과장봉급이 35만원, 부장 봉급이 40만원 근방일 때였으니 업무추진비와 기밀비를 합해 20만원이나 더 주는 것은 파격적인 대우격상인 셈이었다. 부장들은 이걸 품위유지비라고 불렀다. 사장님은 지금까지의 하후상박으로 부하직원들 보다 봉급도 많지 않으면서 회사를 위하여 헌신해온 간부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는 회사는 이런 변칙적인 방법으로라도 간부직원에 대한 처우개선과 배려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는 소문도 들렸다.

 

정부의 물가억제와 공기업 임금억제 정책으로 간부들의 봉급을 올려주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다른 회사나 공무원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간부들을 처우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월 월말이 되면 한전의 각 부서의 서무담당 직원이 또 바빠졌다. 부장님, 처장님들이 업무추진비와 기밀비를 어디에 얼마씩 썼다는 ‘가라장부’를 만들고 ‘가라 영수증’(가짜 영수증이 아니고, 일본말로 가라 영수증이다)을 붙여서 총무부에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장급 이상은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과장들에게는 업무추진비와 기밀비가 한 푼도 지급되지 않았다. 한전의 업무부서 단위가 부 단위로 되어있고 과 단위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기가 막히는 이유 때문이었다. 업무추진비와 기밀비는 그 부서의 업무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경비이므로 부서장이 아닌 과장들에게는 업무추진비나 기밀비를 지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러웠다.

 

“우리 과장들도 부하직원이 있는 간부인데......”, 과장들의 불만이 누적되던 1987년엔가 드디어 과장들에게도 월 5만원씩 홍보비를 지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만원도 아니고 겨우 5만원의 기업홍보비....,

그런데 이 홍보비를 주는 명분이 재미있었다. 바야흐로 매스컴 시대, PR시대, 광고홍수시대에 기업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경비라고 정부가 추가로 인정하기로 한 영업비용이 기업홍보비라고 했다. 기업홍보비? 한전이 뭐 맥주회사나 화장품회사나 냉장고 회사처럼 전기를 써달라고 TV광고를 해댈 일인가?

 

그렇지만 한전도 여름철이면 절전홍보도 하고, 전기안전 캠페인도 하고, 원자력 홍보도 하고, 또 국민으로부터 신뢰받고 사랑 받는 한전이 되려면 기업 이미지 쇄신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자력발전소 주변지역에는 주민들에 대한 원자력안전 홍보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전도 기업홍보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과장급들과 일선직원들을 활용하여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홍보, 즉 각개전투식 대국민홍보를 한다는 것이었다. 기껏 5만원으로......

그래서 과장들에게 홍보비 5만원을 지급하면 과장들이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밥도 사주고 막걸리도 사 줘 가면서 ‘원자력은 안전합니다, 절전합시다, 한전은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세요,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개별홍보를 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홍보도 되고 과장들 처우개선도 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라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지역주민 홍보를 하면 더욱 좋겠지만 안 하더라도 월말 서류정리는 잘 하라는 것이 암묵적인 지시였다.

 

이렇게 하여 이제 과장들도, 나도, 드디어 겨우 5만원이지만, 좌우지간 더 받게 된 것이었다.

“야, 오늘 홍보비 나왔다. 그 동안 맨날 여러분들 야근시키면서 저녁도 못 사 줘서 미안하다. 오늘은 내가 지역주민홍보 할 테니 퇴근시간 후 지역주민들은 회사 앞 일미식당으로 모여라.”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부하직원들에게 저녁밥을 사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장님, 저도 지역주민입니다요, 지역홍보비로 저녁밥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요. 제 주민등록증 보여 드릴까요?”

“그래, 그래. 너도 주민이고 나도 주민이다. 지역주민홍보비로 한 잔 받아라.”

이렇게 과장과 직원들이 지역주민이 되어 비록 한 달에 한 번이지만 5만원 홍보비로 저녁밥 사먹고 소주도 한 잔 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홍보비 지출보고서에는 몇 월 몇 일 어느 식당에서 지역주민 몇 명을 대상으로 기업홍보를 했다고 꾸며서 적었다. 허구한 날 식당에서 밥만 사먹었다고 하기가 뭐 하니까 가끔씩은 지역주민들을 초청해서 야유회도 하고 윷놀이도 하고 막걸리 파티도 했노라고 그럴 듯하게 홍보비 지출보고서를 써서 가라영수증을 붙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엔가 이 홍보비가 10만원으로 대폭(?) 인상되었다. 그래서 이 홍보비를 다 못 쓰고(?) 생계보조비로 유용하여 살림살이에 보태기도 하였다. 하긴 마누라와 자식은 지역주민 아닌가?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른 1999년 여름 어느 날, 정부의 감사원에서 감사가 나왔다.

“어디 홍보비 사용내역 좀 보자, 음, 기업홍보를 위해 지역주민 밥도 사 먹이고, 막걸리도 사주고 그랬군, 어라? 이게 뭐야? 야유회에다 윷놀이까지 했어?”

지난 3년 동안 한전이 지출한 홍보비 내역을 살펴보니 전체 과장들 수 천 명에게 매달 5만원씩, 10만원씩 지급된 홍보비가 모두 146억원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한전, 홍보비 146억원 윷놀이, 야유회에 흥청망청” 신문에 대문짝 만 하게 보도되었다. 겨우 5만원, 10만원 줘놓고 "윷놀이, 야유회, 흥청망청"이라니, 거 참 얼굴이 화끈거리는 창피한 보도였다.

 

그런데, 가라영수증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아주 쉽다. 단골 음식점에서 도장 찍힌 용지 몇 장 달라고 하면 거저 준다.

여기에다 2만원, 3만 몇 천원 식으로 적당히 써넣으면 가라영수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몇월 며칟날 몇 사람이 저녁식사 했다거나 지역주민 홍보했다는 식으로 보고서에 쓰면 되는 것이다.

가라영수증이라는 거 뭐, 대단한 것 아니다. 그 시절엔 대한민국 봉급생활자라면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공무원, 공공기관, 개인기업 할 것 없이 다들 가라영수증으로 그렇게 했다.

 

가라영수증...., 가라영수증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한전, 아니, 우리나라 전체 국영기업 직원, 공무원, 일반기업까지 수십만, 수백만 명의 인원들이 그렇게 많은 가라영수증을 써 붙여 비용지출 서류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당시 우리나라 세법은 인심이 참 좋았다. 인정(人情)도 많고 인정(認定)도 많았다.

그래서 인정과세(認定課稅) 또한 무척 많았다.

웬만한 음식점이나 술집이나 점포들은 거의 모두 과세특례자요, 인정과세대상이었다.

과세특례자가 무엇인가? 영세한 업소로써 매출액이나 수입이 너무 적어 세금을 조금만 내도 되겠다고 세무공무원이 인정(人情)으로 인정(認定)하는 업소이다.

그 때 1986년도 기준으로는 연간 매출액이 1,200만원 이하인 업소를 과세특례자로 인정토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2000년도에는 년간 2,400만원인가 그랬다.

연간매출액이 1,200만원, 한 달 매출액이 100만원, 즉, 하루매출이 3만 몇 천원 밖에 안 되는, 근근이 먹고사는 영세업소들이 과세특례자들이다.

과세특례업소들은 금전등록기를 쓰지 않아도 되었고, 세금은 매출액의 2%만 "인정과세"로 내면 되었다.

그런데 영광군내 수많은 업소들이 거의 모조리 과세특례자들이었다. 그 업소들은 우리 봉급쟁이들이 연간 근로소득세를 수백만원씩 내는 1년 동안 기껏 10만원이나 20만원을 세금으로 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손님이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조그만 간이세금계산서에다 밥값 얼마, 술값 얼마 식으로 써주면 된다. 영수증 용지를 거저 달라고 해도 주었다. 금전등록기처럼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세무서에 보고되는 것도 아니니까 얼마든지 거저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들 업소로부터 업소 상호와 도장이 찍힌 간이세금계산서를 얻어다 적당히 써서 업무추진비 지출보고서에 붙이는 가라영수증으로 쓴 것이다. 공생관계라고나 할까?

 

1985년, 1986년 무렵, 건설공사가 한창일 때 영광원자력 발전소 건설현장에는 약 1천명의 한전직원들과 한기, 한국전력보수, 현대건설과 수많은 하청업체들의 수천 명 직원들, 그리고 수천 명의 노무자들을 합하여 1 만여 명의 인원이 건설현장을 드나들고 있었다.

용접사들 같이 보수가 좋은 노무자들은 술집마다 인기가 최고였다. 영광군의 인구는 발전소 건설 전 보다 무려 2만 명 이상이 증가해 있었고, 홍농면은 인구가 1만 명 이상 늘어나서 홍농읍으로 승격되었다. 주택이며, 아파트도 늘었고, 오가는 사람들과 출장자들이 묵는 여관과 호텔, 굴비가게며 횟집, 특히 술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유사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구가했다. 큰 음식점과 술집들은 하룻밤 몇 십만 원은 보통이요 몇백만 원 씩의 매상을 올렸다.

 

그런데 참 희한했다. 영광군 전체를 통틀어 금전등록기를 갖추어놓은 업소, 즉 일반과세업소는 단 두 개에 불과했다. 하나는 한전사택 슈퍼마켓이었고 또 하나는 영광읍내의 ‘아리랑하우스’라는 아담한 경양식집이었다.

흥청거리는 그 많은 술집들, 음식점들도 모두 "영세한 과세특례자"였던 것이다. 번쩍거리는 불빛 속에 밴드음악에 맞춰 밤새 돌아가는 영광읍내 ‘관광열차’나 열 명도 넘는 아가씨를 데려다 놓고 밤새도록 영업을 하던 법성포 ‘아방궁’도, 손님들로 북적대던 고래등 같은 음식점들도 모두 1년에 10만원에서 20만원만 내면 되는 ‘영세한’ 과세특례자들이었던 것이다.

 

영광, 법성포만 그런 게 아니라 전국이 다 그랬다. 그들의 세금을 바로 우리들 봉급쟁이들이 대신 내 주었다. 그 과세특례자 수십 개 업소가 내는 세금 보다 더 많은 세금을 우리 봉급쟁이 한 사람이 다 내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랬겠지.

“뭐? 내가 너희들 봉급쟁이 보다 적게 낸다구?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세무서에서 한 번 씩 나올 때마다, 보건소에서 한 번 나올 때마다, 파출소, 소방서다, 뭐다, 한 번씩 올 때마다 너희 월급쟁이 몇 달 봉급이 뒷주머니로 들어간다.”

“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불쌍한 봉급쟁이들은 봉급명세서에 모든 소득이 빤히 찍혀 나온다. 근로소득세가 원천공제 되어 손에 쥐어보지도 못 하고 공제된다. 나는 세무당국이 만일 이러한 과세특례자 문제만 제대로 해결해도 봉급생활자들 세금을 몇 분의 1로 낮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우리끼리 그런 소리도 했다. “우리의 세금을 낮추려면 말이야, 모든 봉급생활자들이 일치단결해서 음식 사먹거나 물건 살 때 영수증을 철저히 받아내고 그 매상이 세무당국에 드러나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그건 그저 해보는 소리였을 뿐이었다.

일치단결이 그리 쉽게 되는가? 당장 가라영수증을 못 얻을 판인데.....

 

뿐만 아니었다. 커피 자동판매기 한 대가 대학까지 나온 봉급쟁이 몇 배나 돈을 잘 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수 억 짜리 고급주택 소유자가 겨우 몇 만원이나 몇 십만 원만 세금을 내고 있다거나, 개인 사업자, 의사, 변호사, 심지어 운동선수까지도 우리 봉급쟁이에 비하여 턱없이 적은 세금을 내면서 고급승용차를 굴린다는 이야기, 그리고 발전소 건설현장 정문을 나서면 길 양편에 줄줄이 늘어선 포장마차도 우리 보다 몇 배나 벌이가 좋다는 소리들을 들어도 우린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하면서 그저 못 들은 체 해야 했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과세특례자의 간이세금계산서를 얻어다가 가라영수증을 만들어내고 업무추진비와 기밀비 몇 푼씩 받아썼다.

그들이 낼 세금을 우리가 내 주고 그 대신 가라영수증을 얻어 쓴 것이었다.

한 달에 기껏 5만원, 10만원 홍보비 때문에 그래야 했을까?

어쨌든 그렇게 우린 공범이 된 셈이었다.

 

10년 세월이 흘러 1998년 여름, 여러 국영기업들이 감사원으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한전에도 감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이 부서, 저 부서의 영수증들을 갖다놓고 대조했다.

그랬더니 같은 날짜에 같은 사람이 다른 음식점에 가서 두 번씩 세 번 씩 저녁을 먹었는가 하면, 조그만 같은 식당에서 이 부서 저 부서, 어떤 날은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이 동시에 밥을 먹었다는 등, 앞뒤가 안 맞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수증들이 ‘가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모르셨어요? 그렇게 하라고 시켜놓고선.....”

 

그래서 감사원 감사는 이걸 적발했고 언론들은 ‘한전을 비롯한 공기업, 업무추진비 흥청망청, 몇 십억 원 부당지출’ 이렇게 신문을 또 한 번 대서특필로 장식했다.

정말이지 국민 앞에 또 "흥청망청" 창피스러웠다.

그까짓 몇 푼이나 된다고 달마다 가라영수증 써 가면서, 양심 찔려 가면서, 아니 세금 대신 내 줘가면서 그렇게 푼 돈 얻어 썼을까?

 

봉급쟁이 인생이란 이렇게 가라영수증 인생일까?

쥐꼬리에 달달 떨다가 업무추진비, 홍보지 몇 푼 가라영수증을 만들어가면서 타먹고 살아야 하는 그렇게 째째한 인생일까?

이렇게 범국가적, 총체적으로 ‘가라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봉급쟁이인생은 ‘가라인생’이란 말일까?

난 한전을 떠나왔지만 올해도 예산지침이 내려왔겠지.

올핸 몇 % 올려줬을까?

그거 놓고 또 노.사가 마주 앉아서 하후상박(下厚上薄)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