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독야근

11. 마산에서 영월로

Thomas Lee 2022. 3. 25. 20:22

 

한국중공업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52년 전, 1969년으로 돌아간다.

 

69년 2월 17일에 입사한 우리가 쌍문동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초등반 교육을 마친 날이 3월 15일이었고 정래혁 사장의 이름과 커다란 직인이 찍힌 빨간 사령증을 받아가지고 마산으로 내려가 마산화력에 집결한 날은 아마 3월 18일이나 19일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안동에 들러 부모님을 뵙고 다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대구에서 경부선 열차로 갈아탄 다음 삼랑진역에서 다시 남해선 열차를 타고 마산으로 갔다. 내 눈에 처음 비친 마산은 무학산이 미끄러져 마산만으로 흘러내려가는 비탈 밑자락에 대롱대롱 붙어있는 도시였다.

 

마산화력으로 집결한 신입사원 교육생들이 100여명 가까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수습교육이 3개월이 넘어가고 여름이 되어 날도 더워지자 100여명 가까이나 빽빽이 들어앉아 비좁은 강의실에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두 대로 버티는 것도 여간일이 아니었고 몇 달이나 계속되는 교육에 교육계장님도 지치셨는지 교육은 점차 자습시간으로 바뀌었고 또 자율시간으로 바뀌어갔다.

 

7월이 되자 가포해수욕장에 “마산화력 하계체련장”이 설치되었다. 가포해수욕장은 극동철강을 지나고 결핵요양소를 지나 마산만으로 들어가는 해협에 위치하고 있었다. 회사는 해수욕장 한켠에 흰 광목천 텐트를 치고 탈의실과 샤워장을 만들었고 날마다 버스를 운행하였다. 그러자 우리 교육생들은 아침에 출근했다가 버스를 타고 가포해수욕장으로 출근(?)했다. 해수욕장에는 다이빙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모래사장은 좁았고 모래도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모래가 쓸려가지 않도록 모래주머니들이 물속에 쌓여 있었다. 그러건 말건 우리는 온종일 신나게 해수욕을 즐겼다. 그리고 그 7월 어느 날 아폴로 우주선이 달나라에 착륙하는 걸 텔레비전으로 보려고 우리는 마산시내 다방에 모여들었다. 그 당시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곳이 다방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 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다방에서 나는 흔들리고, 줄이 찍찍 가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흑백텔레비전으로 아폴로우주선 달 착륙 광경을 보았다.

 

나는 유난히 흰 피부 때문에 여자 같다는 놀림을 당하는 게 싫었던지라 이 기회에 피부를 구리빛으로 태워볼 요량으로 온 종일 햇볕 아래에서 불속에서 첨벙거렸다. 다이빙대에 기어올라가 바다로 첨벙 다이빙도 했다. 그 때에야 무슨 선불락이나 선크림이 있었겠는가. 맨살을 그냥 종일 햇볕으로 태우자 내 몸은 온통 빨갛게 익고 물집이 생기고 껍질이 홀라당 벗겨졌다. 나중 영월화력으로 가서 만난 친구가 그랬다. 통근버스 안에 앉아서 통근버스를 타려고 하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세상에 저렇게 흰 놈이 다 있나 싶었단다. 그 소리 듣고 어이가 없었다. “야, 내가 가포해수욕장에서 얼마나 구웠는데?”

 

어느 날 거대한 선박 한 척이 마산만으로 들어갔다가 며칠 후 마산만을 다시 빠져나갔는데 우리는 해수욕장에서 넋을 놓고 그 산더미 같이 거대한 선박을 구경하였다. 3만 톤이라고 했다. 해수욕장 가까이에는 결핵요양소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결핵은 죽는 병이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면서도 마음이 께름칙했다. 극동철강에서는 사고가 가끔씩 난다고 했다. 하숙집 아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철판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다가 철판이 떨어졌고 그 철판이 바람에 날리면서 한 사람을 덮쳐 허리를 잘라버렸는데 잘린 다리는 철판 저편에 있고 상체는 이편에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더라고.... 너무 끔찍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하숙집 아저씨와 그 친구분이 나와 명호에게 함께 배낚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좋아라 하고 합류했다. 우리 몇 사람을 태우고 마산만을 출발한 통통배는 가포해수욕장을 지나고 진해를 지나 거제도 근방까지 가서 거기에서 닻을 내렸고 우리는 줄낚시를 내렸다. 나는 한 마리도 못 잡고 낚싯줄만 몇 번 끊어먹었고 명호는 제법 커다란 도다리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1969년 8월이 되자 신입사원들의 배치발령이 본사로부터 내려왔다. 몇몇은 마산화력에 남게 되었지만 대부분은 떠나야 했고 우리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스무 명은 머나먼 영월발전소로 가게 되었다. 나와 명호, 규성이, 용석이도 영월팀에 포함되었다. 성호는 울산화력인지 영남화력인지로 가게 되었다. 나는 짐(짐이래야 달랑 가방 한 개였지만)을 꾸려 하숙집 아줌마와 아저씨, 그리고 우리 또래였던 완이라는 하숙집 아들과 예쁘장한 여고생 딸에게도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또 울산으로 떠나는 성호와도 작별하고 마산을 떠났다.

 

이번엔 기차를 타지 않고 창녕을 거쳐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탔다. 큰 비가 내린 다음이라 도로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버스가 창녕 근방을 지날 때 너른 들판과 도로가 온통 흙탕물에 잠겨 있었으나 내가 탄 버스는 무사히 그 곳을 통과하였다. 신작로 양편에 미류나무가 서 있어서 운전기사는 그 사이로 조심조심 버스를 몰았다. 대구에 도착하여 원대주차장으로 가서 다시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안동에 도착하였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나는 안동 부모님 집에서 이틀인가를 지내고는 영월로 향하였다. 나를 태운 중앙선 열차는 영주를 지나고 ‘따배굴’이라고 불리는 죽령터널을 지나고 단양을 지나 제천에 도착하였다. ‘따배굴’이란 중앙선 죽령터널이 빙글 한 바퀴 돌면서 올라가기 때문에 여자들이 물동이 일 때 쓰는 따배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나는 제천역에서 함백선으로 갈아타고 태백산맥 영월 땅, 단종이 귀양 가서 죽은 유배지, 그 곳으로 갔다.

 

높은 산들과 깎아지른 듯 한 벼랑 아래로 동강 푸르른 물이 굽이쳐 흐르는 영월..., 숙부 세조에 의해 폐위되어 왕비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끝내 살해당한 단종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청령포, 단종의 비(妃)와 후궁(後宮)들이 꽃잎처럼 동강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그리고 영월 엄씨(嚴氏)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했다는 장릉(莊陵)...... 단종과 함께 짧은 생애를 마친 왕비가 청송 심씨(沈氏)요, 그 청송심씨가 태어난 곳이 내가 태어난 경북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의 이웃동네인 호박골이니 이것도 무슨 인연인지...

 

1969년 8월 9일 늦은 오후, 나는 그렇게 영월화력발전소 정문 앞 간이식당인지 매점인지에 도착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석탄과 재로 뒤덮인 거대한 영월발전소는 비에 젖은 거대한 괴물처럼 새까만 모습으로 웅크린 채 굴뚝마다 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발전소 뒷산에서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삭도(케이블카)가 흔들흔들 줄줄이 석탄을 싣고 내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새까맸다. 발전소도, 건물도, 길바닥도, 산도, 강물도, 나뭇잎도, 풀잎도,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석탄재와 재를 뒤집어쓴 새까만 색깔뿐이었다.

 

나와 명호, 그리고 원석이는 석포리, 영월역 가까운 곳 길가의 ‘희망여인숙’이라는 하숙집에다 짐을 풀었다. 이리저리 여인숙과 하숙집을 찾다가 명호가 ‘희망’이라는 이름이 좋다고 하는 바람에 그 집으로 들어갔다. 여인숙 아줌마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촌티가 줄줄 나는 젊은 여자였고, 주인 아저씨는 전에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는데 두 눈이 쏙 들어가고 광대뼈가 삐죽 나온 깡마른 얼굴에 바람이라도 불면 날려갈 듯 한 비쩍 마른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진폐증 때문인지 연신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있었다.

 

잠시 흥정 끝에 하숙비는 한 달에 5,500원으로 정하였고 우리 하숙생들은 방 한 개씩을 차지하였다. 이곳에서 두어 달을 살았는데 여인숙 아주머니의 형편없는 음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나는 짐을 싸들고 나와 춤 선생 부부댁으로 옮겨 두어 달을 지내다가 다시 거기서 만난 친구들의 권유로 청경으로 발전소 경비를 하시던 김씨네 댁으로 옮겨서 하숙하게 되었다. 김씨네 댁 작은 아들 국민학생 꼬마가 나의 사투리를 흉내내며 놀려댔다.

"머락카노. 아저씨 머락카노..."

"요 녀석 머락카노."

"머락카노, 머락카노, 아저씨 머락카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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